“노, 노하라고요? 노하가 왜 여기에…….”
“그 이야기 못 들은 겁니까? 노하에서 에두아르트에 청혼장을 보냈다지 않습니까.”
“그게 헛소문이 아니었다고요? 그럼 그 혼담이 진행되고 있단 말입니까?”
“저, 정황상 그렇게 볼 수도…….”
이곳에 모인 가신들은 모두 수도와 멀리 떨어진 본인 관할의 영지에서 올라온 이들이었다.
게다가 결혼하겠다는 알폰소의 연락이 도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으니,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니 알폰소가 이미 노하의 청혼을 공식적으로는 거절했다는 걸 알 길은 더더욱 요원한 일.
르나르를 제외한 가신들의 눈에는 이미 샤를로트가 미래의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으로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고, 대부분은 그런 상대와 직접적으로 마찰하기를 꺼렸다.
그토록 기고만장했던 르나르 역시 주춤했던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노하의 악녀가 이 자리에 있을 줄은 몰랐군.’
그렇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노하와 에두아르트의 결혼이라니, 애초에 말이 되는 이야기던가?
그 고지식한 알폰소가 노하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고작 노하가 뭐라고!’
무엇보다 기껏 사람을 여럿 끌고 왔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돌아갈 수는 없다.
이를 으득 문 르나르가 다시 목을 빳빳이 치켜들었다.
“짖다니, 그게 무슨 망발이오! 당신이야말로 지금 얼마나 큰 무례를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는 거요!”
“죽을 때 되면 혓바닥이 길어진다더니, 당신들 하는 꼴을 보니 내가 헛소리를 들은 건 아닌 모양이네요.”
“뭐, 뭐라고?”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죠? 내가 없는 소리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화를 내면 내 말에 신뢰만 더해주는 꼴 아닌가요? 안 그래요, 알폰소?”
샤를로트가 그렇게 물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기분이 퍽 미묘해졌다.
알폰소는 차치하고, 그의 옆에 선 다른 이들의 표정이 기묘했던 탓이다.
“푸흡, 큽.”
“야, 나는 내 생에, 으흡, 이렇게나 맞는 말을 드, 들어본 적이 없다……. 크흐흡.”
“동의,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나같이 얼굴이 빨개져서는 숨을 참는 것 같은 모습.
특히나 아르노는 숨을 참다 못해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가신들이 이토록 바보처럼 구는데도 한 마디 없는 알폰소 역시 기묘하긴 마찬가지였다.
‘분명 인상을 쓰고 있긴 한데.’
뭐랄까,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해야 할까.
기분 탓인가?
“……그쯤 하십시오, 샤를로트. 이건 에두아르트 내부의 일입니다. 더 이상의 첨언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알폰소의 목소리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기분 탓인 모양인지.
샤를로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러났다.
“그렇게 말한다면 첨언은 이쯤 하죠. 하지만 날 더 기다리게 만들지 않길 바라요.”
“물론입니다.”
알폰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차가운 시선을 르나르에게로 던졌다.
“베호닉 경, 그대도 들었다시피 더는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 내 관용이 바닥을 보이길 기다리겠나, 아니면 스스로 나가겠나.”
말은 부드러웠으나, 결국 당장 나가지 않으면 쫓겨나게 될 거라는 축객령이다.
의미를 이해한 르나르의 낯이 분노로 시뻘게졌다.
‘다 된 일이었는데, 저년 하나 때문에……!’
샤를로트의 등장으로 판도가 뒤집히지만 않았더라면 알폰소를 밀어붙일 수 있었을 텐데.
기껏 사람들까지 끌고 온 일을 이렇게 실패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사실에 이가 으득 갈렸다.
‘이렇게 나오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
믿는 구석 하나 없이 이런 일을 벌이는 사람이 있겠는가?
르나르 역시 이 방법이 먹히지 않을 때의 대책이 존재했다.
그는 애써 노기를 삭이고 다시 능청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말씀대로 저희가 각하의 시간을 많이 앗아가긴 한 모양입니다.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정말로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조금 나누는 게 용건의 전부였다는 듯한 르나르의 태도에, 다른 가신들 역시 작별을 고했다.
그렇게 몇 마디의 허울 좋은 인사가 오고 간 이후.
르나르가 인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 결혼하신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전통적으로 공작부인의 반지는 선대 공작부인께 물려받는다는 것을 각하께서도 잘 아실 테지요.”
“……물론이다.”
“선대 공작부인께서 저와 막역하셨던 터라, 그 반지를 보게 될 일을 무척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럼 또 불러주십시오.
의례적인 덕담과 작별인사였다.
달리 귀담아 들을 것도 없는 말.
그러나 샤를로트는 그 대화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알폰소…… 또 커프스단추를 만지네.’
대화를 나눈 알폰소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으니까.
* * *
덜컹이는 마차 안.
‘르나르 베호닉. 대체 그자가 뭐길래?’
샤를로트는 고민에 잠겼다.
그녀는 조금 전 알폰소의 배웅을 받고 노하로 돌아가는 마차에 오른 길이었다.
마차의 문이 닫히기까지도 알폰소는 이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때까지 커프스단추를 두 번이나 더 만졌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이상하단 말이야.’
알폰소는 대체 뭐에 그토록 여유를 잃은 걸까.
르나르 베호닉을 비롯한 가신들의 압박?
‘이건 아니야.’
에두아르트가 오랜 가주의 부재로 인해 가신들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으며, 그 탓에 알폰소가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다는 것은 샤를로트도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또한 르나르 베호닉, 그자가 반발하는 가신들의 선두에 있다는 것 또한.
하지만 알폰소는 과거 결혼을 통해 그 문제를 어렵지 않게 해결했다.
그러니 고작 가신들의 반발 때문에 그랬을 리는 없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결혼에 애로사항이 있다는 것.
하지만 샤를로트가 알기로 알폰소의 결혼에 더 이상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르나르 베호닉이 반지를 언급했었지, 분명.’
선대 공작부인의 반지에 대한 것이 남는다.
르나르의 말에서 유독 강조된 것은 그 반지에 대한 이야기뿐이었으니까.
‘선대 공작부인의 반지라.’
돌이키자면 제법 감회가 새로운 소재였다.
‘예전에도 반지로 나한테 시비를 걸었었지.’
르나르가 샤를로트에게 트집을 잡았다가, 도리어 거하게 까였던 일이 있었다.
샤를로트가 결혼 직후 처음으로 에두아르트 내부 일원들만 참석하는 연회에 자리했던 날.
-반지가 무척 화려해 보입니다, 공작부인. 결혼 후 가문의 일원들을 소개받는 연회에서는 격식을 맞추어 선대 공작부인의 반지를 착용하는 전통이 있는데, 혹 그 반지가 선대 공작부인의 반지인 겁니까?
르나르가 샤를로트에게 대뜸 이런 말을 건네 온 것이다.
당연히 샤를로트가 끼고 있던 반지는 선대 공작부인의 반지가 아니었다.
또한 르나르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으니,
그 목소리에 깔린 비웃음으로 미루어 보아, 샤를로트에게 어떤 트집을 잡아서라도 체면을 깎아내릴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제아무리 가주 내외라고 한들 전통과 선대의 일은 어쩔 도리가 없으니, 르나르가 선택한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상식적으로 볼 때 말이다.
-그딴 낡아빠진 반지, 끼고 싶지 않아서 안 꼈어요.
그리고 당시의 샤를로트-특히나 심기가 언짢을 때였다-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고작 전통 때문에 내가 이런 자리에서 그런 볼품없는 반지를 껴야 하나요?
-아, 아니. 부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대의 물건을 물려받는 것은 전통과 검소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내겐 불필요한 이야기겠군요. 난 검소할 생각이 없으니 말이에요.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인 내가 그런 볼품없는 차림을 하면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겠죠. 신분에 맞는 차림을 하는 게 미덕 아니겠어요?
-이토록 사치스러운 태도라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에두아르트의 재정을 걱정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쉽게 당하지 않는 샤를로트에 혈안이 된 르나르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았지만, 샤를로트는 오히려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재정이요? 에두아르트의 재정을 걱정해? 차라리 다리 밑 거지가 황궁 창고가 빌까 봐 걱정한다고 하지! 하하!
샤를로트는 그렇게 웃어젖히고는, 이내 차갑게 낯을 굳히고 경고했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그따위 얘기를 들먹이거든 당신 가문의 재정을 걱정하게 만들어 드리죠. 그게 당신에게도 좀 더 실용적인 이야기가 될 테니 말이에요.
덕분에 르나르는 얼굴이 아주 시뻘게진 채로 도망을 쳤다.
사실 샤를로트에게는 별것도 아닌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이걸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알폰소가 묘하게 통쾌해했던 일이었으니까.’
늘 샤를로트의 행동을 전해듣고는 난색을 표하던 그가, 그 일에서만큼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미루어 짐작건대 그도 제법 속 시원했던 모양인지.
‘그렇게 도덕적으로 굴어도 사람이긴 한가 보다 생각한 일이었지.’
그렇다고는 해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 일이었다.
르나르가 트집을 잡은 까닭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결국 선대 공작부인의 반지는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