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결혼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 35화 (37/122)

밑에 있는 가신들은 샤를로트도 알음알음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 ‘알음알음’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나는 말만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이었지, 사실 실질적으로 한 일은 딱히 없으니까.’

샤를로트는 에두아르트에 속해 있되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알폰소가 새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이 될 사람에게 원한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존재함으로써 가문의 구색을 맞추는 것.

게다가 알폰소의 직속 가신들에게조차 배척당하던 샤를로트였으니, 그녀에게 가문 내부 깊숙한 일들이 전해질 리 없었다.

물론 샤를로트가 알고자 했거나 가문의 일에 권리를 행사하길 원했더라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에두아르트의 일에 내가 왜? 나는 노하의 사람이야. 내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남편이 알아서 굽히고 기어들어오겠지.

결혼 초에는 이러한 이유로 관여하지 않았고.

-알폰소는 나를 싫어하지. 그리고 이 가문은 나를 환영하지 않고. 그런데 내가 공작부인입네 나서면 알폰소가 좋아하겠어? 지금처럼 아무 관심도 없는 척 눈 감고 살아주는 게 알폰소에게도 속 편한 일이겠지.

이후에는 이런 이유로 가문 일에는 일부러 눈을 돌리고 살았다.

‘무엇보다 그때는 내가 노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워낙 확고하기도 했고.’

실제로 도미닉과 퀸시가 종종 알폰소나 에두아르트의 동태를 샤를로트에게 물어 왔었다.

요컨대 샤를로트는 에두아르트에 속해 있되, 노하에 적을 둔 첩자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이런 사실을 다른 이들이라고 모를 리 없다.

에두아르트의 모든 이들은 샤를로트를 꺼렸고, 샤를로트는 배척당하는 자리라면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샤를로트는 일부러 에두아르트의 내부 일들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출하고 다녔다.

가신회의를 비롯한 가문의 깊숙한 행사들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샤를로트의 평판은 바닥을 쳤다.

-우리 안주인께서는 정말 염치도 없으시군. 공작부인씩이나 되어서 어떻게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있지?

-아르노! 말이 심하잖아.

-하하, 왜? 이번에도 각하께서 혼자 영지에 내려가신다며? 누가 보면 미혼이신 줄 알겠어.

-이번만큼은 아르노의 말이 맞다. 그러는 주제에 각하께서 보내는 선물은 선물대로 받아 챙긴다지? 결혼 초기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쳤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된 의무를 다해야 할 때가 된 거 아닌가?

알폰소의 직속 가신들이 그런 말을 주고받는 것을 들으면서도 샤를로트는 침묵했다.

그게 자신이 알폰소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니까.

‘내가 나서지 않는 것에 불만이 많다지만, 정작 나서면 날 경계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지.’

그럴 바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도움이 되는 일 아니겠는가.

덕분에 샤를로트는 에두아르트의 일에는 문외한이었다.

당연히 가신들과의 왕래도 전무.

‘그나마 알음알음 아는 게 있긴 하지만.’

노하에서의 습관 때문에 만나 본 인물들의 정보를 강박적으로 기억하는 샤를로트가 아니었더라면 그나마도 없었으리라.

‘저자가 르나르 베호닉이었지.’

샤를로트의 시선이 희끗한 밀색 머리통으로 향했다.

그래도 르나르에 대해서는 제법 기억하는 게 많았다.

첫 번째 이유는 르나르가 알폰소에게 대거리를 하려 든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분명 선대 공작부인과 사촌지간이라고 했었지? 둘 다 베호닉이 고향이라고.’

르나르 베호닉 본인은 정작 선대 공작부인과 막역한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의 여동생이 선대 공작부인과 무척 가까웠다고 했다.

그래서 선대 공작부인은 결혼 이후에도 베호닉을 자주 방문했으며,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을 때도 베호닉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그러니 베호닉은 선대 공작부인의 고향인 동시에 외척이 되는 셈이다.

‘그걸 믿고 기 싸움을 하려 들어서 알폰소가 상당히 애를 먹었던 것 같은데.’

그 과정에서 샤를로트 또한 조금 얽힌 게 있었다.

그게 바로 두 번째 이유.

어쨌든 기억 속에 썩 좋은 인상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인간인데.

‘이 시점에 사람들을 이끌고 부랴부랴 찾아왔다, 라고.’

아무리 봐도 좋은 의도로는 보이지 않는다.

저 아래 1층에서 나누는 대화만 들어도 그랬다.

“……여, 각하께서 결혼하신다는 소식에 찾아뵙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요. 예물 준비에 모자람이 있으시다면 가신 된 도리로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옳습니다. 각하께서는 작위를 승계하자마자 전쟁터로 떠나셨으니 가문 내부의 일을 처리할 때 조언을 구할 사람이 필요치 않겠습니까.”

가신들의 말에, 알폰소의 미간이 꿈틀했다.

“……조언이라고?”

“아무리 가주라 하신들 에두아르트의 전통을 따라야 하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결혼 같은 중대사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이끌어 드릴 선대께서 계시지 않는 지금은 나이 든 가신들의 조언을 들으셔야지 않겠습니까.”

조언이니 뭐니 말은 좋지만 결국 참견할 권리를 달라는 뜻이다.

결혼 같은 중대사가 생겼으니 참견할 명분도 좋겠다, 이참에 에두아르트에 저들 다리 한 짝을 걸쳐 보겠다는 심보가 노골적이었다.

‘문제는 저들이 다 나이 든 사람들이라는 거지.’

매번 전통이니 선대니, 현 세대로서는 대응할 수 없는 문제들을 꺼내드는 탓에 알폰소조차 섣불리 대답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아버지까지 욕보일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알폰소의 인내가 길어질수록 가신들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지고, 샤를로트의 인내심은 급격히 얄팍해져 갔다.

“그렇잖아도 각하께서 선대와 달리 겸손이 부족하시다는 이야기가 가신들 사이에서 왕왕 돌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가신들과 의논하여 가문의 대소사를 진행하셔야 합니다.”

“설마 전쟁놀이에 심취해 저희의 말을 등한시하실 생각인 건 아니시겠지요?”

결국 그 마지막 말이 샤를로트의 인내심을 뚝 끊어 놓았다.

알폰소가 저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알폰소의 얼굴을 봐서라도 정말 참으려고 했는데.’

다들 애를 먹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샤를로트가 몸을 숨기고 있던 자리를 벗어나 층계를 밟으며 입을 열었다.

“전쟁놀이라. 그것 참 얼굴에 기름 낀 인간에게 듣기 좋은 말이군요.”

당신들이 따뜻한 집 안에서 뒹구는 동안 누군가는 황무지에서 칼바람을 맞고 있었다는 걸 몸소 증명해줄 심산이라면 말이죠.

“아무래도 거기 계신 분들은 그 나이 먹도록 이 간단한 이치를 아직 배우지 못했나 봅니다.”

또각, 또각.

계단을 밟는 선명한 구두 소리와 나른한 듯 서늘한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세르주였다.

“레, 레이디 노하!”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알폰소가 당혹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샤를로트에게 다가왔다.

“샤를로트? 방 안에 계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긴 왜…….”

“잠깐이면 된다더니 하도 오지 않기에 나와 봤어요. 날 기다리게 한 이유가 고작 이따위 헛소리를 들어주기 위함인가요?”

“그건,”

알폰소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르나르가 노기 어린 얼굴로 끼어들었다.

“레이디 노하! 지금 이게 무슨 무례요?”

“무례라니, 지금 당신이 저지르는 일을 말하는 건가요?”

“지금 각하께서는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계셨소! 게다가 노하라면 에두아르트와 연관이 있는 가문도 아니지 않나? 지금 타 가문 사람이 감히 가문 내부의 일에 참견하려는 겐가?”

“한창인 선약에 끼어들겠다고 난동 부리는 불청객도 있는데, 타 가문 사람이 가문 내부의 일에 참견하지 못할 이유를 모르겠군요. 참견 당하기 싫었으면 내 코앞에서 시끄럽게 굴지 말았어야지.”

“뭐, 뭐요? 지금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게요?!”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건 거기 계신 분 같군요.”

에두아르트 공작저에 초대된 손님은 나고, 그쪽들은 보아하니 초대받지 못한 손님 같은데.

“대체 얼마나 대단한 뒷배가 있기에 에두아르트의 앞마당에서 짖어대는 건지 궁금하네요.”

샤를로트가 성가시다는 투로 인상을 쓰자, 가신들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이 은퇴를 앞두고 있는 가주들이다.

딸뻘인 젊은 여인 하나에게 막말을 듣고 있는 상황이 달가울 리 없는 것이다.

상황이 달랐다면 샤를로트 한 명에 이렇듯 쉽게 분위기가 바뀌었을 리는 없었을 터다.

그러나 그녀의 신분을 듣는 순간 기세등등하던 가신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