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년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말하자면, 설마는 언제나 사람을 잡는다.
물론 이번에는 샤를로트의 우려와 달리 노하와 관련된 일이 아니기는 했다.
그보다 더 번거로운 일이었다는 것이 문제지만.
응접실보다 더 바깥에 위치한 에두아르트 공작저의 현관.
울상이 된 세르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각하께서는 선약이 있어 자리하시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가신들이 멀리서 왔는데 얼굴 한번 비치지 않으신다는 겐가?”
“이런 문전박대라니, 믿을 수가 없군.”
세르주를 비롯한 기사 몇이 함께 막고 선 자리에는 노회한 중년 귀족들이 여럿 있었다.
모두 에두아르트의 가신들.
개중 선두에 선, 희끗한 밀색 머리칼을 가진 중년 남성 르나르 베호닉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각하께서 결혼이 머지않았다는 소식에 기껏 수도까지 올라왔건만, 이런 푸대접을 받을 줄은 내 진정 몰랐군. 이게 그 고명한 에두아르트의 방식인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베호닉 경. 선약을 잡으셔야-”
“각하께 잠시 인사를 드리겠다는 게 선약까지 필요한 일이란 말인가? 오만하기 짝이 없군!”
르나르의 말이 한마디 이어질 때마다 가신들은 기세등등해지고, 세르주의 낯빛은 점차 희게 질려 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연락 한번 없이 불쑥 쳐들어온 건 저들이다.
그런데 세르주가 잘못 처신하면 알폰소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되고, 멀리서 온 가신들을 푸대접한 가주가 된다.
덕분에 세르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치를 이어가는 상황이었다.
‘정말 악질적이다.’
주동자가 누굴지는 불 보듯 뻔했다.
저 귀족들의 선두에서 콧대를 치켜세우고 있는 르나르 베호닉.
알폰소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바로 그 베호닉 영지의 영주이자, 현 에두아르트의 가신들 중 가장 반발이 강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부인과의 밀접했던 관계 때문에 쉽사리 처단할 수 없는 자였다.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을 따라 에두아르트로 들어온 사람이니 깊은 충성을 바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알폰소를 이렇게까지 무시하다니?
세르주는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 것은 세르주 혼자뿐이 아니었다.
세르주의 바로 옆에 있던 쟝-자크나, 아르노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기는 매한가지.
“조엘 경. 저렇게 무도한 짓거리를 하는 자들도 가신이라 불러야 하는 겁니까?”
“안 부르면 뭐 어쩔 건데? 맘에 안 든다고 자를 수 있었으면 각하께서 진즉 자르셨겠지.”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참아라, 쟝-자크. 여기서 네가 칼을 뽑으면 네 체면이 아니라 각하의 체면이 상한다.”
선배 기사인 아르노의 말에 서슬이 퍼렇던 쟝-자크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두 기사의 인내심은 상당해 보였다.
“이래서 혈통 모를 놈은…….”
“전쟁놀이나 좀 하면서 전쟁영웅 소리 들었다고 기고만장해서는…… 쯧쯧.”
……적어도 귀족들 중 누군가가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는.
철컥.
검집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쟝-자크가 기겁해 온몸을 던졌다.
“조, 조엘 경! 진정하십시오!”
“아르노, 참아!”
“야, 이거 놔! 안 놔? 지금 내가 저 말을 듣고도 진정하게 생겼어!”
“너 일 치면 각하가 더 곤란해지신다니까! 제발 참아!”
아르노가 눈앞의 가신들을 당장 썰어버리겠다며 몸부림을 치고, 그런 그를 말리기 위해 쟝-자크가 매달리며 작은 소란이 일었다.
그들의 소란이 눈물겨워질수록 몰려온 가신들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질 따름.
그 선두에 선 르나르 베호닉의 낯에도 음흉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계획대로군. 애송이들 좀 모여 있다고 해서 연륜을 당할 수는 없는 법이지.’
현 에두아르트에는 나이 든 이가 없었다.
보통은 선대가 죽기 전에 작위를 넘겨주지만, 알폰소의 경우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이 타계한 이후 작위를 승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은 본인의 남편과 거의 유사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으니.
당연히 노회한 가신들을 당해낼 만한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전쟁터나 돌다 온 어린놈들이 이런 일에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알 리도 없고.’
그러니 이렇게 어쩔 줄 모르고 절절매는 게 아니겠는가.
‘아마 한 마디만 더 하면 저 기사가 당장 죽이겠다고 덤벼들겠군.’
그리고 이 일을 문제 삼으면 애송이 가주 하나쯤 허수아비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닐 터.
르나르의 목표는 알폰소를 찍어 누르고, 빈집이나 다름없는 에두아르트의 실권을 삼키는 것이었다.
‘언제까지 중소 귀족에 머무를 수는 없지.’
알폰소가 결혼을 준비하는 지금이 기회였다.
내실을 다지기 전에 자신이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르나르가 일부러 가신들을 모아 쳐들어온 데에는 그런 속셈이 숨어 있었다.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은 르나르가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층계 위에서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태양 아래서는 더욱 희어 보이는 은발. 그리고 깎아지른 벼랑 같은 그림자.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저택에 은발이라곤 오직 하나뿐일 테니.
“가, 각하…….”
알폰소의 등장에 세르주의 낯에 패색이 짙어졌다.
그러나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르나르가 선수를 쳤다.
“간만에 인사를 드립니다, 공작 각하. 이제야 얼굴을 보여주시는군요. 모시는 주인 한번 뵙기가 참 까다롭습니다.”
비꼼 가득한 목소리에 알폰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베호닉 경, 그대에게 선약을 잡는 것이 그토록 까다로운 일일 줄은 몰랐군. 기별 없이 찾아오는 것이 무례임을 모르는가?”
“허허, 먼 길을 오다 보니 소식을 전하기가 여의치 않았습니다. 부디 너무 탓하지 마시지요.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 각하께서도 언제든 방문하는 가신들에게는 시간을 내어 주셨답니다.”
선대 공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알폰소의 낯이 굳어들었다.
“……아버지께서 관용을 베푸셨다고 한들 그대들이 저지르는 일이 무례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면, 그대들은 현 에두아르트의 가주인 내 권위에 도전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도전이라니, 그런 무서운 말씀은 마십시오.”
“당치도 않습니다. 다만…… 선대 공작부부께서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분들이셨다는 걸 기억해주십사 하는 것뿐입니다. 허허.”
얼굴이야 웃고 있다지만, 가신들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세르주와 아르노, 쟝-자크의 낯은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다.
‘선대 공작부부를 내세워 협박하다니…….’
‘자칫 잘못하면 각하께서 권위만 내세운다는 평판을 얻겠군.’
‘이 더러운 족속들…….’
특히 아르노는 역겹다는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르나르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욱 짙어질 따름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제 아비를 들먹이면 제깟 게 할 수 있는 게 있겠어?’
알폰소가 얼굴을 비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이 어린 놈 다루는 거야 유리창 너머를 들여다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
모든 것은 르나르의 예상대로였다.
‘이제 계획대로만 진행되면 에두아르트는 내 손 안에 들어오는 거나 마찬가지다.’
르나르는 자신의 계획이 어렵지 않게 먹혀들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 소란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인물이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사람이라는 사실까지도.
들키지 않게 2층 난간에 몸을 숨긴 샤를로트의 잇새에 힘이 들어갔다.
‘보고 있자니 아주 가관이군…….’
에두아르트의 가신들 주제에, 제 주인인 알폰소를 눈앞에 두고 선대가 뭐?
‘노하와 관련된 일이 아닌 건 다행이다만.’
그것 빼고는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전,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던 와중 소란을 눈치챘을 때.
“……죄송합니다. 샤를로트. 잠시 무슨 일인지 확인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난 신경 쓰지 말아요. 어차피 곧 돌아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렇다고는 한들 귀가하시는 길을 배웅해드리지 못하면 제 마음이 불편할 겁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여기 계십시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알폰소는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곤 밖으로 나갔다.
그로서는 나름대로 샤를로트를 방 안에 수납해 놓은 셈이었다.
안타깝게도 샤를로트는 그의 의도대로 얌전히 수납을 당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고.
더욱 애석하게도 지금 일어나는 상황은 샤를로트가 가진 얄팍한 인내의 끈을 더욱 얄팍하게 만들고 있었다.
‘곧 관짝에 들어가게 생긴 것들이 감히 알폰소한테 대거리를 해?’
다른 것도 딱히 용납할 생각은 없지만, 특히 알폰소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만큼은 두고 볼 수 없다.
샤를로트는 1층의 현장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잠겼다.
‘그냥…….’
알폰소 모르게 다 죽여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