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더 온건한 방법도 존재했을 것이다.
알폰소에게 보물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가 시간을 들여 데솔리에를 설득한다거나.
보다 자연스럽게 데솔리에에게 누호아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알려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전부 시간이 많이 걸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샤를로트 입장에서는 상당히 온건한 경우에 속했다.
그 누구도 죽이거나 협박하지 않고 모든 문제를 해결했으니까.
‘이제 데솔리에는 누호아에서 나온 보물을 팔아 빚을 해결할 수 있을 테지.’
그리고 그 보물을 캐내는 데 막대한 도움을 준 것이 에두아르트이니, 에두아르트에게 더는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하지도 않을 터.
그렇게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리살리도 다음엔 레이디 루체의 콧대를 눌러줄 수 있을 것이다.
‘미움은 좀 사겠지만.’
언제는 샤를로트가 그런 것을 신경 썼던가.
그녀 혼자 악역이 되고 모든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이만하면 괜찮은 결말이다.
비록 그녀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이게 좀 골치가 아프지.’
수도의 노하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 안.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너머를 바라보며 샤를로트가 착잡한 낯을 했다.
인부들에게 시킨 일이 끝난 뒤, 샤를로트는 데솔리에 인근의 작은 오두막으로 피신해 왔다.
분명 알폰소가 서신을 읽고 자신을 찾으려 들 테니 미리 몸을 숨긴 것이다.
‘이대로 도망치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퀸시와 노하 때문에 그 생각은 접어 두었다.
데솔리에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노하에서 샤를로트가 이 일에 관여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퀸시도 내가 없어진 것을 알 테고.’
섣불리 도망쳤다가 그 불똥이 에두아르트에 튀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샤를로트는 우선 잠시 몸을 피해 두었다가,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되면 알폰소의 눈에 띄지 않고 곧장 노하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현재는 그 계획의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고.
노하로 돌아가면 물론 화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샤를로트는 체벌을 받거나 가문에서 제명당하게 되더라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보석을 판 돈으로 자금은 어느 정도 있고.’
궁핍한 생활은 알폰소를 살릴 방법을 찾아 돌아다니는 동안 충분히 겪은 바 있어 익숙했다.
노하에서 제명당하기라도 하면 알폰소가 샤를로트와의 결혼을 빠르게 단념할 테니 그것도 나쁘지 않고.
애초에 그녀에게는 많은 돈이 필요치 않았다.
‘1년 뒤면 죽을 테니까.’
운이 좋다면 그보다 더 이를 수도 있겠지.
샤를로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마차에 타기만 하면 졸음이 찾아드는 것은 그녀가 가진 멀미의 일종이었다.
‘……옛날 생각이 나네.’
전생에서 별 예고도 없이 새로운 마차가 공작저에 들어왔던 날.
-마차를 탈 때 불편해 보이시기에 새로 한 대를 주문했습니다. 암막 커튼도 달려 있고 좌석도 완만히 되어 있으니 다니시기에 불편은 없을 겁니다.
알폰소가 말하는 ‘불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맞대고 황궁 연회에 참석해야 했던 날, 마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았던 일을 얘기하는 것이리라.
다른 이였더라면 알폰소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을 받았을지 모르겠으나 샤를로트에게는 그 배려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이 느껴져 화가 났다.
-그냥 온 수도에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이 마차만 타면 조는 머저리라고 소문을 내지 그래요? 날 수치스럽게 만들려는 목적이라면 성공했군요. 저 마차에 타느니 내 발로 걷겠어요!
그런 이유로 새 마차는 에두아르트 공작저에서 쫓겨났다.
이후 소피아 황녀가 그 마차를 아주 애용하며 타고 다니더라는 소문으로 그 마차의 행방이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할 따름이었고.
덕분에 마차를 탈 때마다 샤를로트는 그때의 일을 되짚어 보곤 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진저리를 내며 지긋지긋한 인간이라고 화를 내기도 했고.
별것 없는 체면이 뭐가 그렇게 귀하다고 알폰소의 배려를 그토록 무참히 차버렸을까, 고맙다는 말이라도 할 걸, 후회도 했다.
이유 없는 호의가 자신을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니었음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때는 알폰소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고, 무엇보다 샤를로트 본인이 호의를 받는 것에 익숙지 않았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알폰소에게 진심을 말할 텐데.’
샤를로트는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한번, 이라고? 네가 미쳤구나, 샤를로트 노하.’
알폰소를 다시 만났다고 들뜨기라도 한 건가?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녀가 해야 할 것은 평생 알폰소를 멀리하는 것밖에 없다.
그의 삶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최대한 남남으로 지내는 것만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이다.
샤를로트 노하, 그녀는 파멸이었으니까.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미련을 버려.’
이제 알폰소와 엮일 일은 없을 것이다.
샤를로트가 눈을 질끈 감고 스스로를 다잡는 사이, 마차가 멈추었다.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마부가 마차를 세우고, 문이 열렸다.
샤를로트는 심호흡을 하고 눈을 떴다.
아주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정문으로 향하는 대리석 계단, 그리고 그 양옆을 장식한 독수리 문양.
익숙하기 그지없는 에두아르트의 저택이었다.
‘……잠깐.’
에두아르트의 저택이라고?
분명히 노하 저택이라고 말해놨는데, 마부가 목적지를 착각한 건가?
마차에서 내리던 샤를로트는 아주 드물게 당황했다.
그 바람에 마차에서 내리던 발을 헛디디고 만 것까지도 한 박자 늦게 깨달을 정도로.
기우뚱 기우는 몸을 인지하고서야 샤를로트의 낯 위로 낭패감이 물들었다.
샤를로트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고통이 찾아들지 않았다.
그 대신 몸을 붙든 단단하고, 익숙한 무언가가 느껴질 뿐.
설마.
샤를로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내 눈을 뜨니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동시에 끔찍이도 그리웠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에두아르트의 저택보다도 익숙한 은발.
자정의 정적을 닮은 얼굴.
“……알폰소?”
“격조했습니다, 샤를로트.”
당황한 샤를로트와 달리 차분한 알폰소의 손아귀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결코 도망가지는 못하게.
“당신과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샤를로트의 계획이 완벽히 어그러졌음을 알리는 말이었다.
* * *
마부를 매수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알폰소는 굳이 샤를로트를 찾기 위해 사람을 여럿 풀 필요도 없었다.
“당신은 철두철미한 성격이니 그 밤에 멀리 움직였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데솔리에 안에서 피신했을 테고. 일이 끝나면 노하로 복귀할 생각이었던 것 아닙니까.”
그리고 데솔리에에서 수도로 가기 위해서는 마차를 빌려야 하는 게 당연한 일.
“목적지가 수도인 마차 대여 요청을 모두 확인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필체를 대조해 보았습니다.”
“……필체는 바꾸어 썼어요.”
“압니다. 하지만 여기, 철자 끝을 꺾어 쓰는 건 귀족들의 전유 필체라 알아보기 어렵진 않았습니다.”
귀족인 사람이 평민들이나 방문할 마차 대여소에서 마차를 빌리진 않을 테니.
알폰소가 샤를로트의 앞에 서신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거기에는 샤를로트가 마차 대여를 위해 적은 내용이 있었다.
흉내 낼 수 있는 필체 중 가장 투박하고 흔한 것을 골라 적었는데, 귀족인 게 티가 날 줄이야.
“당신 청렴한 일만 하는 거 아니었어요? 마차 대여소의 장부를 함부로 보는 사람인 줄 몰랐는데.”
“영주가 허가한 일이니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아, 데솔리에. 이 배은망덕한 인간 같으니…….”
에두아르트에 큰 은혜를 입은 데솔리에가 알폰소의 추적을 도왔다는 말에, 샤를로트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래서 착한 일은 하고 싶지가 않다니까.
남 좋은 일만 잔뜩 시켜 놓으니 몰래 집에 가는 것도 쉽지가 않군.
착잡함을 뒤로하고, 샤를로트는 다시 표정을 지워냈다.
“그래서, 날 에두아르트 저택으로 납치해 온 이유가 뭐죠?”
“……납치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이 앞서 도주하였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요. 도망자는 나였죠. 하지만 이제는 큰 연관이 없는 이야기 아닌가요?”
내 역할은 데솔리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끝이 났고.
청혼은 이미 거절했고.
“우리 사이에 남은 이야기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남은 이야기가 없다면.”
단정적인 샤를로트의 말에 알폰소의 낯이 굳어 들었다.
“당신은 왜 자꾸 내게서 도망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