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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 30화 (32/122)

달이 기운 깊은 밤.

데솔리에의 가주, 노베르 데솔리에는 시간이 늦도록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평생 모자람 없이 살았던 그의 가문에, 아들의 연이은 투자 실패로 막대한 빚이 생겨 버린 까닭이었다.

섣부르게 거액을 투자한 아들을 따끔히 혼냈지만 그런다고 돈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다른 가문들에게 돈을 빌리려 해 봐야, 데솔리에보다 부유한 가문은 없다.

그러니 그 막대한 금액을 빌릴 곳도 요원한 것은 당연한 일.

‘아이들은 불안해하지 말라고 일부러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지만…….’

누호아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에두아르트에서 부디 프레시오를 사겠다고 해야 할 텐데.’

노베르 역시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에게는 달리 매달릴 곳이 없었다.

며칠 전 그 이름 높은 노하의 악녀가 연회장에 등장했을 때는 빚 독촉을 하러 온 건가 싶어 눈앞이 새하얘지는 경험까지 할 지경이었다.

‘리살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지만…….’

틀림없이 노하에서 데솔리에를 압박하려고 보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샤를로트 노하 정도 되는 인물이 이 지방까지 직접 올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오늘 저녁식사 시간에, 리살리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었다.

“아빠, 레이디 노하 말이에요.”

“으, 응? 레이디 노하가, 무슨 말이라도 한 게냐?”

“네! 선물을 주겠다던데요? 분명 친애의 표시가 아닐까요?”

리살리는 샤를로트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게 틀림없다며, 자신도 보답의 뜻으로 선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선물을 받으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될 거라고,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이라고도 했어요.”

요즘 수도에서 유행한다는 샤를로트 노하 향수라도 주려는 게 아니겠느냐며 기대가 역력한 표정은 덤이었다.

바로 옆에서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아버지의 속은 조금도 모르고 말이다.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을 주겠다니.’

그건 분명 반어법을 쓴 경고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상황을 전부 눈치챌 수밖에 없게끔 대대적으로 빚 독촉장을 보내려는 거겠지.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노베르의 고민이 깊어지려던 찰나.

벌컥 문이 열리고, 노베르의 아들 나단이 헐레벌떡 뛰쳐 들어왔다.

“아, 아버지!”

“……뭐지? 무슨 일이냐.”

“그, 그게,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에두아르트에서-”

“잠시 실례하지.”

나단이 무언가를 말하려던 순간, 그의 등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도끼의 날만 석둑 잘라다 놓은 것 같은 장신의 사내.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굳이 통성명까지는 필요치 않았다.

이 나라에서 은발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황가의 피를 이었다는 뜻이므로.

또한 현 황제를 제외한 은발의 남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에, 에두아르트 공작?”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노베르는 제 귀를 부정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에두아르트 공작, 알폰소 리누스 에두아르트는 다소 결벽적으로 격식과 절차를 따지는 인간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소위 말해 법 없이도 살 사람. 그게 알폰소였던 것이다.

그래서 노베르 역시 그 점을 믿고 에두아르트에게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런데 그런 알폰소가 이 밤중에 저택으로 쳐들어오다니?

“공작, 이게 무슨 무도한 짓입니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데솔리에 가주. 사안이 시급하여 절차를 거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사안이. 시급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가 거칠게 끊겨 나왔다.

마치 어절을 씹어 뱉는 듯한 그 목소리에는 얼핏 노기까지 서려 있었던 터라, 노베르는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그리고 그 당황이 노베르를 언짢게 했다.

“대체 무슨 사안이기에 이러는 겁니까! 에두아르트에 시급한 일이 있다 하여 타 가문에 이렇게 무례를 범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누호아 산에 폭탄이 심어져 있습니다.”

“……예?”

알폰소의 짧은 그 한마디에 노베르는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알폰소는 품에서 즉각 무언가를 꺼내 내밀며 말했다.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자 급히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걸 확인해 보십시오.”

“그, 그게 무슨…….”

노베르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더듬더듬 알폰소가 건넨 것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한 장의 서신이었다.

발신인은 샤를로트 노하.

서신의 시작은 이러했다.

「친애하는 에두아르트 공작.

내 가문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이 서신을 적습니다.

데솔리에가 프레시오의 값으로 과도한 금액을 청구한 원인은 누호아 산을 담보로 하여 노하에 지고 있는 빚 때문인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데솔리에와의 협상을 유리하게 만들 길이 없을 것 같더군요.

당신의 가신들이 아둔하지 않고 데솔리에의 단속이 강퍅하지 않으니 어쩌면 당신도 이미 알고 있는 정보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대로 복귀하기에는 나의 데솔리에행이 썩 보람차지 못한 일이 될까 우려가 든다는 이야기이고.

하여 나는 드베인에서 맺은 협약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협약은 도덕과 사회질서를 준수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수단이란 패배자의 자기위로를 위한 변명거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해결책을 제시해주겠노라 데솔리에까지 와 놓고 당신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돌아간다면.

이 일로 내가 약속을 지켰다는 보람찬 마음 외에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겠어요?」

사선으로 기울어진 날카로운 필체부터, 그 내용까지.

정말이지 그녀다운 서신이었다.

그러나 가장 경악스러운 것은 마지막에 있었다.

「그런 이유로, 누호아 산에 폭탄을 좀 심었어요. 이걸 협상에 이용하길 권합니다.

데솔리에는 이미 광산을 운영하는 것조차 빠듯해서 급히 인력을 끌어올 여력이 없어 보이더군요.

그러니 분명 이것이 당신에게 좋은 입지를 가져다 줄 거라고 자신 있게 적습니다.

부디 이 서신의 결말이 당신을 행복으로 이끌기를 바라며.

샤를로트 노하 배상.」

편지를 든 노베르의 손에 힘이 들어가 덜덜 떨렸다.

함께 서신을 읽은 나단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이게 무슨…….”

그러나 노베르가 서신을 채 구기기 직전, 알폰소가 종이를 채 갔다.

“더 나눌 이야기는 없습니다. 상황을 확인했다면 서둘러 누호아에 인부를 파견하십시오. 에두아르트 역시 돕겠습니다.”

그의 말에 나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실례지만, 각하. 말씀이 잘못되신 것 아닙니까? 돕는 게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잖습니까! 샤를로트 노하, 그 빌어먹을 악녀가 에두아르트와 손을 잡지만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데솔리에가 에두아르트에 과도한 금액을 청구하지만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지. 나단 데솔리에, 네가 투자 실패로 거액을 날리지만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고.”

“그, 그건.”

나단이 주춤하며 물러났다.

알폰소의 신랄한 지적에 대답할 말이 여의치 않았던 까닭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마주한 푸른 눈동자에 여과 없이 서린 날 선 기세 때문이었다.

아니, 날이 서 있다는 표현은 어쩌면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알폰소가 특별히 눈을 부라리거나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지독히 정적이고 까마득한 것들은 그 자체로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바닥을 감히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물을 들여다볼 때라거나, 마찬가지로 높다란 벼랑 앞에 설 때 같은 것.

그러니 굳이 비유하자면 알폰소는 벼랑이었다.

높은 곳에 서서 누군가를 내려다본다는 점에서 그러했고, 그 앞에서 까딱 잘못하면 무사하지 못할 것 같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했다.

그 무기질적인 시선이 날카롭게 나단에게 꽂혔다.

지독하게 무감정하여 오히려 더욱 경멸스러워 보이는 시선.

“에두아르트는 이 일에 연루된 책임을 다하고자 밤도 마다치 않고 찾아왔다. 그런데도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쥔 너는 고작 하는 말이 타인의 책임을 묻는 것인가? 데솔리에의 유산이 잿더미가 되면 유감스러울 쪽은 샤를로트 노하나 내가 아닐 텐데.”

“하지만-”

“그만! 나단, 각하의 말씀이 옳다.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됐습니다. 당장은 제 기분보다 우선시해야 할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 말씀이 옳습니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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