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트의 말에 사색이 된 영애들이 서둘러 해명하려 했다.
“저, 저희는 그런 게 아니라-”
“다 설명할 수 있어요. 이건 모두 레이디 루체의 짓이에요, 저흰 억울해요! 저희는-”
하지만 리살리가 사람을 부르는 것이 먼저였다.
“집사! 저택에 불청객이 이렇게나 많은데 아무것도 하지 않다니, 제정신이야? 당장 이 사람들을 내쫓아!”
“레이디 데솔리에!”
내쫓길 위기에 처한 영애들이 사색이 되어 주모자를 붙들었다.
“얼른 사과드리세요, 레이디 루체!”
“저희까지 전부 쫓겨나게 생겼잖아요!”
“이거 놔요! 사과는 무슨, 내가 없는 말 한 것도 아닌데.”
그러나 주모자, 레이디 루체는 패색 짙은 얼굴로도 뻔뻔하게 고개를 들었다.
“레이디 데솔리에, 지금은 기세등등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지 두고 보겠어요. 당신 옆에 있는 레이디 노하가 당신을 얼마나 지켜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샤를로트 노하는 이방인이고, 심지어는 가까이 두었던 사람을 언제든 내친다는 소문이 자자한 인간이었다.
“당신은 곧 버려질 거예요. 그때 가서 후회한다고 해도 소용없을걸요?”
“글쎄요,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죠!”
리살리의 말에 레이디 루체가 코웃음을 쳤다.
“흥, 여유 부리긴. 그렇게 보석만 치렁치렁 건다고 누가 모를 것 같아요?”
레이디 루체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요. 데솔리에가 빚더미에 앉았다는 사실 말이에요!”
* * *
엄밀히 말하자면 데솔리에가 빚더미에 앉았다기보다는, 그럴 위기에 처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데솔리에는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신전에서 투자금이라고 읽고 대출이라고 쓰는 돈을 빌렸다.
담보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누호아 산.
“겉으로는 별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라베흐느의 유산이 묻혀 있을 거라는 정보를 입수했지. 이제는 그걸 캐내는 것도 그리 멀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데솔리에가 알아서 패망의 길을 걸어주니 말이다.”
수도의 노하 저택.
노하의 현 가주인 도미닉 노하가 잘린 시가를 입에 물며 중얼거렸다.
팅, 소리와 함께 시가 커터를 도로 품에 넣은 퀸시가 말을 받았다.
“그거 잘된 일이군요. 알로이스가 허탕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렇잖아도 그 정보를 들고 온 놈은 폐기 처분했다. 그딴 헛소문이나 주워오라고 돈을 주는 게 아닌데 말이지.”
쯧, 도미닉이 혀를 찼다.
수도에 오자마자 퀸시에게 받았던 보고를 떠올린 까닭이었다.
-알로이스에는 라베흐느의 유산이 없더군요, 아버지.
-뭐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
-로한 알로이스가 손을 내놓으면서까지 증언한 것이니 틀림없습니다. 아무래도 헛소문이었던 모양이더군요.
퀸시는 그렇잖아도 알로이스에 접근한 성과가 영 미적지근했는데, 샤를로트 덕분에 정보 캐내기가 쉬웠다며 약간의 공치사를 곁들였다.
-건수 하나만 잡으면 빌미 삼아 지하실을 열까 했는데, 마침 로한 알로이스가 샤를로트의 뺨을 쳤더군요. 덕분에 수고를 덜었습니다.
-그래? 샤를로트는 어디 있느냐.
-드베인으로 보냈습니다. 로한 알로이스가 여기저기 이야기를 흘려 뒀기에 말입니다. 괜한 소문이 나면 시끄러울 테니 며칠 떠나 있으라고 했습니다.
알로이스에 대한 일 때문인지, 도미닉은 결혼에 관해서는 더 묻지 않았다.
아마 굳이 재촉하지 않아도 맡은 일은 늘 해내던 샤를로트였으니 이번 일도 그러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라베흐느의 유산 때문에 다른 것을 신경 쓸 틈이 없었던지.
도미닉과 신전은 부쩍 강력해진 황권에 대항하기 위해 라베흐느의 유산을 찾는 데 눈이 벌게져 있었다.
도미닉이 근 며칠 저택을 떠나 있었던 이유 또한 데솔리에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한 번 정도만 더 다녀오면 누호아 산도 어렵지 않게 넘어올 것 같더구나.”
“이번에는 일이 잘 풀리고 있나 봅니다.”
“잘 풀리고 있지! 그 멍청한 것들! 썩은 줄인 줄도 모르고 거기에 투자하겠답시고 돈을 빌리러 왔을 때 웃음 참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도미닉이 음험하게 낯을 구기며 큭큭 웃었다.
“내가 늘 말하지 않았느냐? 욕망이 뚜렷한 인간일수록 다루기 쉽다고. 옆에서 조금만 건드려주면 어떻게든 눈에 보이는 먹이를 잡아채려 혈안이 되지.”
이것은 신전과 노하가 애용하는 고전적인 수법 중 하나였다.
목표물을 지정해 두고, 그 주변인을 통해 괜찮은 투자 상품이 있다고 말을 흘려 넣는 것이다.
‘물론 허위 매물이지만.’
그러면 목표물은 아무것도 모르고 돈을 끌어다 상품에 투자하고, 담보만 있다면 돈을 제한 없이 빌려주는 신전에서 투자금을 가져온다.
그리고 투자한 매물이 허위 매물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담보는 그대로 신전에 넘어오는 것이다.
사실 말이 좋아 신전이지, 투자금을 빌려주는 사업체는 노하가 대리 운영하고 있으니 노하로 넘어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데솔리에에 빚이 얼마나 있죠?”
“자세한 건 장부를 봐야 알겠다만, 아마 광산 여러 개는 처분해야 갚을 수 있는 금액일 거다. 그걸 처분하느니 그냥 담보로 맡긴 산을 넘기려 하겠지.”
누호아 산은 이제 노하의 손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며, 도미닉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퀸시는 그런 제 아버지를 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버지. 만약 데솔리에가 빚을 갚으면 어쩌시렵니까?”
“뭐? 그럴 일은 없다. 그치들이 무슨 수로 그 돈을 갚아?”
“돈 많고 멍청한 고객을 하나 잡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누호아 산을 파헤쳐 본다거나.”
“하하, 그럴 일이 있겠느냐? 누호아 산은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산이다. 빚 감당도 못하는 데솔리에가 그런 데다 인력을 투자할 겨를이 있을 리가. 무엇보다 라베흐느의 유산은 그 가치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저 볼품없는 골동품일 뿐이다. 팔아봐야 돈이 나올 리 없지.”
“하긴, 그도 그렇습니다.”
라베흐느의 유산을 판명하는 방법은 그 물건에 라베흐느의 문장, 혹은 고대 라베흐느의 언어가 새겨져 있는지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고위직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것들을 거의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탓에 라베흐느의 유산들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고, 더더욱 찾기 어려워지기까지 했다.
노하 역시 고대의 기록들을 토대로 추적해 가며 알음알음 찾아내는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서 차나 내오거라. 요즘 들어 자주 속이 나쁘구나. 네가 준 차가 없으면 불편해서 못 견디겠다.”
“제 선물이 마음에 드신 것 같아 기쁘네요. 금방 준비해 올리라고 하겠습니다.”
퀸시는 살가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도미닉의 방을 나섰다.
탁. 등 뒤로 문을 닫는 청년의 낯은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을 것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데솔리에. 데솔리에라…….’
그는 도미닉과 달리 라베흐느의 유산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고작 과거의 유산에 매달려야만 지탱할 수 있는 권력은 언제든 와해되기 마련이다.
현 황제 브누아도 그것을 알고 있으니 에두아르트 공작을 전쟁터로 보낸 게 아니겠는가?
과거에 의존하는 이들은 필히 자멸할 것이다.
‘그러니 누호아 산이 어떻게 되든 상관은 없겠지.’
에두아르트가 프레시오를 구하기 위해 데솔리에에 연락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럴 줄 알고 미리 데솔리에에 사람을 보내 언질을 주었으니까.
과연 에두아르트는 데솔리에의 빚을 대신 갚아줄까?
아니면 데솔리에가 노하의 계획대로 누호아 산을 잃게 될까.
‘어느 쪽이든 곧 마무리가 되겠군.’
어떻게 되든 에두아르트는 분명 큰 손해를 볼 테고, 노하에 대한 앙심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알폰소가 샤를로트에게 청혼할 이유는 더더욱 사라질 터.
퀸시는 층계를 내려가 제게 고개를 숙이는 집사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집사, 아버지께서 차를 찾으시니 올려드려.”
“알겠습니다, 소가주님.”
“내일쯤 데솔리에에 다녀온다고 하시니 그것도 준비해 두고. 샤를로트에게도 사람을 보내. 그만 돌아올 때가 되었으니까.”
도미닉이 돌아오면 모든 게 정리되어 있을 테니, 샤를로트도 돌아올 시기가 된 셈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소가주님, 말씀하신 별장에 가 보았으나…… 아가씨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관리인의 말로는 며칠 전 이미 떠나셨다고 합니다.”
“마부가 아가씨께서 떠나시기 전 어떤 남자와 접촉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은발의 청년이라는 말로 미루어 보아…… 에두아르트 공작 같습니다.”
샤를로트가 제 눈을 벗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