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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 27화 (29/122)

그녀가 선 복도의 모퉁이 건너편에서는 싸움이 한창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샤를로트가 연회에서 선보인 장신구들이 모두 상당한 고가였던 까닭에, 지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다들 값비싼 물건을 착용하고 나온 것이다.

그 사실이 이런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고.

“이번엔 레이디 데솔리에가 실수했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좀 과한 건 사실이잖아요?”

“뭐, 뭐라고요?”

“레이디 데솔리에야 비싼 보석들을 찰 재력이 될지 몰라도, 우리는 안 된다고요. 그렇게 치렁치렁하게 걸고 나타나면 다른 사람들 체면이 어떨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너무 부를 과시하는 것도 천박해 보여요.”

“유감스럽지만 저는 이번 티타임에는 함께할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들은 저마다 리살리에게 한 마디씩 핀잔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

구두소리가 멀어지자 리살리가 씨근덕대며 울분에 차 중얼거렸다.

“이, 이 가증스러운 인간들이……! 평소에 내가 주는 보석은 잘도 받아놓고!”

그래놓고 이제 와서 자신을 두고 졸부라고?

“샤를로트 노하에게는 한 마디도 못할 것들이!!”

“그러게 말이에요.”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비음이 섞여 우아하면서도, 끝을 꺾어 내리는 특유의 위압적인 어조.

“다들 참 못됐군요. 안 그래요?”

샤를로트 노하.

그녀를 보자 잠깐 놀라 굳어졌던 리살리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대, 대체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죠?”

“얼마 안 됐어요. 보석걸이…… 그쯤부터였나. 끼어들기가 좀 민망할 것 같아서 지켜보고 있었죠.”

티파티가 이렇게 엉망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건조하게 덧붙이는 말에 리살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날 비웃는 거라면 관둬요! 이미 충분히 모욕적이니까.”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난 비웃을 생각 없어요. 그럴 거라면 아까 끼어들었겠죠. 당신 친구들이 신나게 당신을 몰아세울 때.”

“그, 그건…….”

시큰둥한 샤를로트의 목소리에 리살리가 얼굴을 와락 구기나 싶더니, 이내 후두둑 굵은 눈물을 떨어트렸다.

“저런. 속이 많이 상했나요?”

“흐, 흐윽…….”

“화장이 망가지겠는데. 여기 손수건이라도 써요.”

“돼, 됐어요! 흐윽, 끅, 동정 따위는 필요 없어요!”

“줄 때 받아요. 같잖은 자존심을 세워서 남는 건 없을 텐데.”

묘하게 위압적인 목소리는 건조했으나, 얼핏 상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제 착각인 걸까?

리살리는 젖은 눈을 들어 샤를로트를 올려다보았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도 붉은 머리칼만큼은 선명히 보였다.

그리고 제게 지독히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듯한 표정 역시.

그 무관심한 낯이 그토록 신뢰가 가는 이유는 뭘까.

툭, 느리게 눈꺼풀이 오르내리자 리살리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위로 샤를로트의 손수건이 부드럽게 닿았다.

무심한 듯, 친절한 듯.

도저히 의중을 알 수 없어 보이는 여자의 녹안이 뱀처럼 빛난 순간.

“레이디 데솔리에. 복수하고 싶지 않아요?”

나직한 물음이 던져졌다.

“……복수요?”

“그래요. 화가 나잖아요. 당신을 멋대로 모욕하고 망신을 준 저들한테 복수하고 싶지 않아요? 저들은 분명 뒤에서 당신을 두고 비웃고 있을 텐데.”

졸부니, 보석걸이나 다름없다느니.

그 말들을 떠올린 리살리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수치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렇게 당신을 비웃고 모욕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만들어주고 싶어요.”

리살리의 입술이 홀린 듯이 열렸다.

혼자라면 그저 이를 갈고 끝냈을 일이다.

하지만 복수를 묻는 상대가 샤를로트 노하라는 사실에, 리살리는 기묘하게 힘을 얻었다.

악한 마음은 구실이 생겼을 때 가장 크게 타오르는 법이기에.

‘이 사람은 샤를로트 노하야. 그 노하의 악녀.’

연회장 한가운데에서 다른 영애의 뺨을 서슴없이 때리고, 모욕을 주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했다던!

게다가 방금 떠난 영애들은 제게 그렇게 모욕을 퍼부었으면서, 샤를로트의 앞에서는 얼이 빠진 채 고개를 주억거리던 것들이다.

그러니 그녀의 앞에서라면 그 가증스러운 여자들도 아무 말 못 할 터.

그런 리살리의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듯, 샤를로트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도와줄게요, 그 복수.”

성서에서 불순한 유혹을 속삭이는 악마의 목소리가 이랬을까.

샤를로트는 두려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거부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뻗고 마는 유혹.

리살리는 결국 그녀의 손을 외면하지 못했다.

샤를로트의 손을 잡은 리살리가 떨리는 심정으로 물었다.

“이, 이제 어떻게 하려는 거죠?”

소문으로 들었던 것처럼 그 영애들의 뺨이라도 때리는 걸까?

아니면 그 집안을 풍비박산 낸다거나, 협박을 하는 건 아닐까?

리살리의 머릿속에 온갖 위험한 상상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런 리살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샤를로트가 차갑게 웃었다.

“아주 간단해요.”

그리곤 덧붙였다.

“나랑 친구가 되는 거예요. 아주 절친한 친구.”

“……네?”

“일단 이 티파티를 즐기는 것부터 시작하죠. 이리 와요.”

샤를로트가 리살리의 손을 잡고 마련된 티테이블로 척척 향하기 시작했다.

어어 하는 사이 샤를로트에게 붙잡혀 끌려가면서, 리살리는 멍하니 생각했다.

‘이, 이게…… 맞나?’

소문 속 그토록 잔악하던 노하의 악녀와, 제 손을 잡아당기는 이 여자의 상관관계에 대해.

* * *

그 시각, 데솔리에의 정원.

“흐음. 여태 소식이 없네요.”

“저희가 말이 너무 심했던 걸까요?”

“아뇨, 레이디 데솔리에가 과했던 건 사실이잖아요. 이 기회에 레이디 데솔리에도 본분을 지키는 법을 배우는 게 도움이 될 거예요.”

조금 전 리살리의 티파티에 참석하지 않겠노라 자리를 박차고 나간 아가씨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티파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을 했으니 진즉 집에 갔어야 옳겠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고 내심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리살리가 그들을 붙잡으러 오는 것.

‘레이디 데솔리에는 허영심이 많으니까.’

‘기껏 샤를로트 노하까지 초대해 놓고 텅 빈 테이블을 보이고 싶진 않을 거 아냐?’

‘이렇게 나와 주면 분명 미안하다고 숙이러 오겠지.’

처음부터 그들은 티파티에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 없었다.

그 유명한 샤를로트 노하와 함께할 자리라니, 대체 이 기회를 어떻게 놓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단지 겸사겸사 리살리의 콧대를 조금 눌러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리살리에게 면박을 주고, 다 같이 우르르 티파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자리를 뜬 것까지.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그래, 분명 그랬는데.

‘……왜 소식이 없지?’

다들 무언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점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꽁지에 불붙은 듯 튀어나올 줄 알았던 리살리가 이렇게까지 튀어나오지 않다니.

술렁이며 서로 눈치를 보던 와중, 누군가가 돌연 어딘가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 저기 봐요!”

그렇게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의외의 장면이 있었다.

리살리와 샤를로트가 팔짱을 낀 채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외에, 무척 친밀해 보이기까지 한 그 장면에 영애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레이디 루체, 분명 레이디 데솔리에가 저희를 잡으러 나올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 그러니까…….”

다른 영애들이 계획을 짠 주모자에게 분통을 터트리자, 그녀는 당황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말 좀 해보세요, 레이디 루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더니, 대책도 없었나요?”

“시, 시끄러워요! 대책 없는 건 당신들도 마찬가지잖아! 머리 빈 것처럼 동조해 놓고는 이제 와서 책임 회피를-”

“어머.”

그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디 루체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다들 티파티에 불참하겠다 전했다고 들었는데, 아직 데솔리에에 계셨군요?”

“레, 레이디 노하……!”

붉은 머리칼을 본 순간 모두가 얼어붙었다.

샤를로트는 바짝 굳어버린 무리를 건조하게 바라보더니, 옆에서 마찬가지로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리살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리살리?”

“……그러게 말이에요. 도저히 모르겠네요. 분명 돌아가겠다고 말한 사람들인데.”

“모임에 참석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와 있는 걸 보통은 불청객이라고 부르던데…… 데솔리에에 불청객이 이렇게 많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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