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트에게서 나온 말이 지나치게 뜻밖이었던 터라, 알폰소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그녀가 저런 말을 하는 연유를 곧장 짐작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행복이라니.
“……청혼을 거절하는 핑계로는 지나치게 진부합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더 할 말은 없겠지만, 진심이에요.”
“당신은 아델린 라베루즈와의 결혼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럼요. 아무렴 나보다는 낫겠죠. 아니, 장담해요. 당신은 아델린과 결혼하면 행복해질 거예요.”
샤를로트를 바라보는 알폰소의 시선은 이제 흡사 펄펄 끓는 호수를 바라보는 것과 다를 바 없어졌다.
한마디로 불가해한 것을 바라보는 눈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샤를로트는 이미 그에게 이해받는 것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알폰소, 나는 당신의 행복을 바라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으니.
샤를로트는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알폰소가 그녀의 말에 담긴 무게를 헤아릴 틈도 주지 않고.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행복을 바란다는 말은 일상적이다. 그 단어의 평범함이 알폰소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오로지 짐작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샤를로트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진실한 허상이 있다면 붉은 머리칼을 하고 있을까.
알폰소는 그녀를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미지에 대한 탐구심을 의식적으로 끊어내는 것은 그의 오랜 전장 생활이 남긴 습관 중 하나였다.
전장에서는 오로지 분명하고 확실한 것만을 더듬어야 길을 잃지 않으므로.
“……그녀는 배반하지 않을 거다. 내 판단으로는 그러하다.”
“각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 역시 수긍하겠습니다. 하지만 샤를로트 노하가 실패할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염두에 두고 있다.”
모든 계획에는 실패에 대한 대비를 동반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애초에 알폰소가 샤를로트의 그림자만 바라보고 있었더라면 굳이 루드빅에게 수색을 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글쎄. 그녀가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는군.”
“샤를로트 노하를 지나치게 과신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과신?”
루드빅의 말에 알폰소가 짧게 실소했다.
“아마 그 반대일 거다. 나는 혹여라도 내가 그녀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을까, 그 가능성이 두렵다.”
“그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신뢰입니까?”
“악에 대한 신뢰.”
알폰소는 그 말을 뱉고, 잠시 멈추었다가 이었다.
“나는 샤를로트 노하가 악한 인간이라고 믿는다. 그녀는 교활하고 교만하며, 자신이 목표한 일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인간이다.”
그뿐이랴? 즉각 거짓을 지어내면서도 미동 한 번 없고, 누군가를 속이고 이용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다.
아군으로 두는 것조차 찝찝한 종류의 인간인 셈이지만.
“그런 인간들은 실패와는 거리가 멀지. 어떤 질서도 그들을 멈출 수 없는데 해내지 못할 게 무엇이겠나.”
“……죄송하지만 각하의 말씀을 들을수록 저는 의문이 쌓여가는 기분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녀와 함께해선 안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까?”
냉정하게 보자면 그 말이 맞다.
또한, 알폰소 역시 루드빅과 같은 입장을 고수했었다.
-난 당신들 사정에는 관심 없어요. 신분을 속이든 말든 알아서 해요.
-자세히 얘기해줄 수는 없지만, 사랑 때문이라고 해 두죠.
마벨의 후원에서 샤를로트를 보기 전까지는.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녀가 멜리아에게 보인 것은 분명 관용이었다.
잔인하다고 이름난 악녀의 자비.
그것이 알폰소에게, 샤를로트라는 인간에 대한 만약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샤를로트 노하는 나와 약속했다. 범죄를 포함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기로.”
“각하, 그 말을 믿으십니까?”
“믿지 않는다. 시험해 볼 뿐이지.”
샤를로트에게는 애석하게도 알폰소의 결정은 여전했다.
그는 여전히 샤를로트가 필요했다.
그러나 샤를로트의 도움을 받기로 한 이상, 알폰소는 그녀를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알폰소가 기대한 것처럼 만약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사람일지.
“샤를로트 노하가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한 것은 엄밀히 말해 그녀가 목표에 실패할 가능성을 고려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건 샤를로트가 알폰소와 한 약속을 저버릴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는 뜻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이 샤를로트가 바라던 대로 되리라.
알폰소는 더 이상 샤를로트에게 도움을 청하려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부디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 * *
다음 날.
샤를로트를 보좌하기 위해 데솔리에에 잠시 체류하게 된 에두아르트의 기사, 쟝-자크 로랑은 제게 도착한 서신을 열어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쟝, 레이디 노하를 직접 본 평가를 최대한 자세히 서술해다오. -루드빅-]
“이게 대체 무슨…….”
평소에는 잘 쓰지도 않는 1급 전서구를 써서 보냈기에 각하께서 무슨 급한 지령이라도 내렸나 했더니.
이런 쓸데없는 데에 비둘기를 꽁지가 빠져라 날게 만들었다니…….
쟝-자크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가 임시로 모시고 있는 대상인 샤를로트 노하였다.
“쟝-자크 경? 서신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별일 아닙니다.”
쟝-자크가 서신을 와그작 구겨 품 안으로 도로 집어넣었다.
“급한 용건인 줄 알았더니, 쓰레기가 잘못 배달이 된 모양입니다.”
“그래요? 드문 일이네요. 회신할 시간이 필요한가요?”
“수신인도 잘못 적혀 있는 서신이니 회신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제 나갈 때가 돼서요.”
샤를로트는 외출복 차림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신경 쓴 외출복 차림.
“데솔리에의 티파티에 참석해야 하거든요.”
결투 신청을 받아주러 갈 시간이었다.
* * *
샤를로트가 데솔리에의 연회에 참석하기 전.
그녀는 알폰소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데솔리에의 연회에 참석하는 목적은 간단해요.”
“리살리 데솔리에와 가까워지기. 맞습니까?”
“그래요.”
알폰소의 물음에 샤를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보자면 단순히 환심을 사면 될 일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녹록지 않죠.”
부유한 가문에서 모자람 없이 자란 아가씨들은 대부분 자존심이 높기 때문이다.
그만큼 쉽게 가까워질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거리일 뿐.
“가까워 보여도 막상 정보를 캐내기는 쉽지 않죠.”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내심 지고 싶지 않아 견제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샤를로트는 노하의 일로 여러 번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경험상, 이런 유형은 대개 두 가지다.
텃세를 부리는 쪽.
그리고 경쟁하려 드는 쪽.
“텃세를 부리는 쪽이면 좋겠어요. 그러면 가볍게 눌러주기만 하면 되거든요.”
“만약 경쟁하려 들면 곤란해지는 겁니까?”
“아뇨, 딱히 곤란할 것까진 없어요.”
그것도 나름대로 어렵지 않다.
샤를로트에게 내심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리살리 데솔리에가 경쟁하려 든다면.
그곳에 있는 그 많은 영애들 중 그런 마음이 든 게 과연 리살리 한 명뿐일까?
“사람들은 흔히 비슷한 높이에서 경쟁하려 들죠. 이방인인 나보다는, 바로 주변의 영애가 경쟁 대상이 되기 마련인 거예요.”
하지만 사교계 같은 곳은 고여 있는 우물이나 다름없다.
서열이 어느 정도 정립되어 있고, 그 안에서 미묘한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샤를로트라는 돌이 던져진다면?
샤를로트의 손끝이 찻잔을 팅 소리 나게 튕겼다.
“한 명이 몸집을 부풀리면, 다른 사람들도 경쟁 심리가 돌아서 너도나도 따라 몸집을 부풀리기 마련이죠. 그 이후는 비탈을 구르는 돌과 다를 바 없어요.”
서로 이기겠다고 몸집을 부풀리고, 부풀리다 결국 서열 변동이 일면서 자연히 떨어져 나오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럼 과연 누가 그 장본인이 될까?
답은 간단하다.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몸집을 부풀린 사람이 떨어져 나오는 거죠.”
그럼 샤를로트는 튕겨 나온 조각을 줍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졸부라니, 지금 말 다 했어요?”
“먼저 내 보석이 싸구려라고 비하한 건 레이디 데솔리에 쪽이잖아요!”
“하! 당신이 날 보석걸이라고 부른 건 기억도 안 나나 보죠?”
다들 참 빠르기도 하군.
‘고작 두 번째 방문에 이렇게 난리가 나다니.’
하고, 샤를로트는 복도의 그림자 안에 서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