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만나도 도망칠 곳 없는 외나무다리인지.
왜 하필 만나도 아델린과 함께인 건지.
“……‘릴리’?”
알폰소의 입에서 의아한 물음이 튀어나온 순간 샤를로트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레이디 라베루즈, 아는 분이십니까?”
“길에서 만난 여행객 친구예요. 이름은 릴리고요.”
“릴리. 그렇습니까.”
곱씹는 건조한 말투가, 샤를로트에게 향하는 눈빛이 익숙했다.
마치 경멸스러운 이방인을 보는 것 같은 눈빛.
그와 반대로 저 한 쌍은 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밀색 단발을 가진, 우유를 탄 홍차 같은 여자와 검처럼 날카로운 남자는 그림 속 한 쌍처럼 보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저 그들 앞에 나타난 타인일 뿐.
‘이럴 줄 알았으면 가명을 쓰지 않는 건데.’
앞으로도 마주칠 일 없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고, 본명을 쓰면 자신이 그 유명한 노하의 악녀라는 것을 알아볼까 싶어 일부러 가명을 썼다.
이렇게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라면 도망가는 게 오히려 어색해 보일 것이다.
‘좋게 생각하자.’
너무 의외의 만남이라 당황했을 뿐, 이건 전혀 두려운 상황이 아니었다.
알폰소가 아델린과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혼담을 진행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샤를로트는 어차피 청혼을 거절할 예정이었으니, 그녀가 바라던 그림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비록 일주일이 아직 지나지 않았지만.’
샤를로트가 청혼을 거절할 때를 대비해서 미리 라베루즈에도 말을 전하러 온 걸까?
알 수는 없으나 지금 샤를로트가 해야 할 것은 명확해 보였다.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태연히 미소 지으며 자신을 반기는 아델린에게로 다가갔다.
“아델린, 여기서 다 보네요. 덕분에 좋은 튤립을 샀어요.”
“드베인의 튤립은 정말 예쁘죠? 다시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너무 기쁘네요!”
“그러게요. 오늘 호수에 오는 줄 알았으면 그렇게 작별인사는 하지 않았을 텐데. 옆에 계신 분은 함께 오셨다던 분이신가요?”
“아, 아니, 아니에요! 저는 미혼인걸요.”
알폰소를 두고 남편이냐고 돌려 말하는 샤를로트의 물음에 아델린이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제가 함께 왔다고 말했던 건 제 아버지예요. 이분은 아버지를 찾아온 손님이신데, 아버지께서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제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아하, 그랬군요.”
혼담을 위해 찾아온 건 확실하지만, 아직 얘기를 꺼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자연스럽게 이야기도 나누었고.
살짝 빠져볼까.
샤를로트가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그런 이만-”
“제가 미혼인 걸 알면서 그런 질문을 하시다니, 짓궂은 취향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줄곧 침묵하던 알폰소가 말을 잘랐다.
아델린의 눈이 동그래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머, 두 분. 구면이셨어요?”
“아, 아니에요!”
“예. 구면입니다. 꽤 많은 관계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모르는 척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이어진 알폰소의 말에 샤를로트가 입을 딱 벌렸다.
“그, 그게 무슨!”
“내 말이 틀렸습니까? ‘릴리’.”
‘릴리’라는 글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웃음기 한 점 없는 말투와, 샤를로트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새파란 시선.
그가 지금 무슨 상태인지,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화났구나.’
하지만 대체 왜?
나를 만나서? 모르는 척을 해서? 가명을 써서?
어떤 것도 짐작이 가지 않는 와중, 샤를로트가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알폰소가 결정타를 날렸다.
“당신께 청혼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야말로 최악의 전개.
아델린과 알폰소를 무사히 결혼시키겠다는 샤를로트의 계획이 산산조각 난 순간이었다.
* * *
꽃이 떠내려오는 호수 위에서 붉은 머리칼이 길게 흩날렸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부터 알폰소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샤를로트가 여기 있을 리 없다.’
단순히 닮은 머리 색을 가진 사람에 불과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얼굴을 가린 양산이 걷히면 저도 모르게 실망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작살에라도 꽂힌 듯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기만한 자에게 으레 나오는 분노일까.
호수 위에서의 갑작스러운 만남은 그 시작만큼이나 갑작스럽게 파장에 이르렀다.
알폰소의 폭탄과도 같은 발언 이후, 샤를로트가 눈에 띄게 창백해진 표정으로 상황을 수습한 까닭이었다.
“아델린, 잠깐 자리를 피해줄 수 있을까요? 알폰소…… 에두아르트 공작님과 잠시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어머, 물론이죠.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저는 저쪽 카페에 가서 쉬고 있을게요.”
아델린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지만, 그녀는 선한 것만큼이나 배려심도 넓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불쾌하다는 기색 없이 흔쾌히 자리를 피해 주었고, 그렇게 현재.
“대체 무슨 생각인 거죠? 알폰소.”
샤를로트의 질문에, 알폰소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그 질문은 내가 해야 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당신이야말로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릴리라는 가명은 또 뭐고,”
“그건 당신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정말 관계가 없습니까? 당신이 또 내 혼담을 방해하려던 것이 아니라?”
아델린과 샤를로트의 단편적인 대화로도 상황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알폰소의 눈에 샤를로트는 자신을 최악의 형태로 거절해 놓고, 어떻게 알았는지 다음 타자가 될 아델린에게 손을 뻗으려 드베인까지 온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제 혼사에 또다시 훼방 놓기 위해서.
그렇지 않고서야 샤를로트가 ‘릴리’라는 흔해빠진 가명을 쓸 이유가 대체 어디 있겠는가?
그 지독하고 치졸한 사고방식이 전부 짐작이 가서 화가 났다.
그래놓고 뻔뻔하게 아델린과 대화를 나누며 애써 자신을 무시하려 드는 것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아니라면 말해보십시오. 왜 당신이 레이디 라베루즈에게 가명을 썼는지.”
“그건…….”
샤를로트의 말문이 턱 막혔다.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미래에 아델린을 사랑하게 될 테니, 그녀를 보고 당신의 청혼에 흔들린 마음을 다잡고 싶었노라고.
어떤 글자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결국 샤를로트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당신 아델린 양과 결혼하려던 거 아니었어요? 이렇게 면전에서 얘기해 버렸으니 아델린 양과 혼담을 진행하긴 어려워졌잖아요!”
“그걸 두고 화를 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바라던 대로 되었으니 만족스러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걸 바란 적 없어요. 당신 이러다가 결혼을 못 할 수도 있는데.”
샤를로트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태도는 기묘했다.
혼담을 줄줄이 파투 내고 다니면서 알폰소가 결혼을 하지 못할까 걱정하고.
자신은 알폰소의 청혼을 받은 적도 없다는 것처럼 당연히 그 선상에서 스스로를 제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알폰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동시에, 부아가 치밀게 했다.
“내 혼담을 번번이 망가뜨린 사람에게 이런 걱정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말했잖아요. 아델린 양한테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내가 당신에게 한 청혼은 어떻게 된 겁니까. 보석을 가져간 것도, 나를 피하는 것도 전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할 겁니까?”
“……보석이라니요? 당신, 날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또 몰랐다고 할 셈입니까? 그 다음 날부터 매일 당신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겉으로는 선물을 전하는 용건이었으나, 혹여라도 샤를로트가 그의 제안에 대해 논의하고 싶은 사안이 있다면 세르주를 통해 언제든 제게 말을 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차원에서였다.
그러나 세르주는 매일같이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녀는 피하지 말라는 알폰소의 말을 고스란히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몰랐던 샤를로트는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나는 몰랐어요.”
정말이지 조금도 몰랐다.
물론 누구의 방해였을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퀸시!’
샤를로트라고 해서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럴 줄 알고 저택의 상황을 전할 사람을 두고 오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한 건지, 소식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보석을 가져가기까지 했다니.’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낭패감에 샤를로트는 주먹을 꾹 쥐었다 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드베인으로 오지 않는 건데.
“……내가 설명할 수 있어요. 그건,”
퀸시가 방해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실례합니다, 각하!”
문이 벌컥 열리고 세르주가 뛰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