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결혼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 21화 (22/122)

샤를로트는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곧장 떠났다.

그녀가 향한 곳은 수도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의 드베인 시.

“샤를로트가 드베인으로 갔다, 라. 나쁘지 않지. 거긴 샤를로트가 좋아하는 호수가 있거든.”

그 애는 어릴 때부터 강이나 호수를 좋아했어.

퀸시가 솔정의 보고를 들으며 유쾌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이나 말투만 보자면 아끼는 동생의 여행 소식에 무운을 비는 여느 오빠와 다를 바 없이 보였다.

“읍, 흐읍! 흡!”

만약, 그의 앞에 묶여 발버둥 치는 남자가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입이 틀어막힌 채 바닥을 기면서 울부짖는 남자와, 차분하다 못해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 퀸시의 단정한 낯은 사뭇 이질적이었다.

한쪽은 생사를 오가고 있는데 한쪽은 티타임이라도 즐기는 듯한 표정이라니.

“그 호수 근처에 꽃나무가 많아. 봄이면 호수 위로 다양한 꽃잎이 잔뜩 떨어지지. 장관이야. 샤를로트가 그 풍경을 상당히 좋아하고.”

내가 데려가줄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안 그래, 로한 알로이스?”

말이 끝나자마자 퀸시의 미끈한 구둣발이 바닥을 기던 남자, 로한의 낯을 거세게 걷어찼다.

퍽!

정확히 꽂힌 타격음에 퀸시가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아쉽단 말이지. 이번 봄에도 샤를로트와 그 풍경을 보러 갈 수 있나 했더니.”

감히 샤를의 뺨을 때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 놈이 있었다니.

섬뜩하게 중얼거린 퀸시가 턱짓하자, 그의 수하들이 로한의 입을 틀어막은 재갈을 풀어 주었다.

로한은 입이 풀리자마자 울먹이며 항변하기 시작했다.

“나, 나는, 흐읍, 나는 억울해……! 그, 그년이 먼저 날 유혹했다고! 손은 실수였어! 그년 말만 믿고 이러는 거라면 뭔가 오해가-”

“뭐라 지껄이나 궁금해서 풀어줬더니 더 들을 가치도 없군.”

퍽!

다시 한번 구둣발이 로한을 가격했다.

“로한 알로이스. 너야말로 뭔가 오해하는 게 있는데, 샤를은 너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끄으…… 그, 그럼 왜…….”

“왜냐니.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군. 내가 그 애 오빠니까. 당연한 일 아닌가?”

동생이 말하지 않은 일도 처리할 줄 알아야지.

로한을 차갑게 응시하는 퀸시의 녹안이, 허공 위로 과거 자신이 보았던 기억을 덧그렸다.

뺨에 손수건을 대고 있던 샤를로트와 그 옆의 알폰소.

-당신도 날…… 싫어하나요?

방문 너머로 어렴풋이 들려온 목소리.

“……샤를로트는 마음이 약해. 어릴 때부터 그랬지. 귀찮은 일이 생기게 둘 바엔 죽이는 게 편한데, 그 애는 한 번도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인 적이 없거든.”

그러니 별수 있나. 마음 약한 동생을 대신해 오빠가 나서줄 수밖에.

툭툭, 구둣발로 로한의 뺨을 친 퀸시가 이내 몸을 틀었다.

“그만 처리해라.”

“어떻게 할까요?”

“디트리히 때와 똑같이 처리해. 대가를 내놓고 침묵을 지킬 건지, 대가 없이 침묵할 건지 선택하게는 해 줘야지.”

대가 없는 침묵은 죽음뿐이다.

그렇다면 대가 있는 침묵은?

로한의 머릿속에 문득 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디트리히 경이 괴한들에게 당해 손을 잃었다는 얘기 들었나? 괴한들이 누구였는지만 흐릿하고 나머지는 기억이 또렷하다더군. 그나저나 손을 잃었으니 출세는 물 건너간 셈이구먼.

설마.

로한이 공포를 덜컥 집어먹은 순간, 각종 날붙이를 든 퀸시의 수하들이 서서히 다가왔다.

그 너머에서 퀸시가 싱긋 웃는 것이 보였다.

“알로이스 노부인께는 내가 인사를 따로 전하지.”

“으, 으…… 으아악!”

로한의 비명이 방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퀸시는 그 비명을 즐겁게 들으며 지하실을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하의 솔정이 퀸시를 보곤 꾸벅 고개를 숙였다.

“소가주님.”

“아, 실비아. 여기 있는 걸 보니 맡긴 일은 끝냈나 보지?”

“예. 에두아르트 건은 명령하신 대로 처리해 두었습니다. 노하의 행각임을 모르지 않을 겁니다.”

“그래, 수고했다.”

퀸시가 빙긋 미소 지어 주곤 계단을 올랐다.

독주로 유명한 압생트의 빛깔을 닮은 녹안을 제외하면 오로지 검고 희기만 한 무채의 낯 위로 빛이 갈라졌다.

지독히도 정적인 표정으로, 퀸시는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인간 하나를 떠올렸다.

‘알폰소 리누스 에두아르트.’

그가 어젯밤 샤를로트에게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결혼하지 마, 샤를로트.

샤를로트는 모르고 있겠지만, 지금 이 상황은 퀸시가 기다려 온 상황이었다.

‘샤를은 성정이 무르니까.’

아버지의 명령에는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나선 샤를로트가 결국 명령을 완수하지 못하고 제게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

퀸시가 그린 아주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샤를이 설마 아버지에게 뭘 먹이고 있는지 알아챘을 줄은 몰랐지만.’

오히려 잘되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퀸시와 샤를로트 사이의 유대감이니까.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그들 남매가 더욱 끈끈해질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알폰소 본인이 샤를로트와의 결혼을 원하는 상황은 그의 계획에 없었다.

만약 그들이 단순히 정략결혼에 불과한 관계라면 굳이 방해할 이유가 없었겠지만.

-당신도 날…… 싫어하나요?

샤를로트의 그런 목소리는 처음 들어 보았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살까 봐 겁을 내는 목소리라니?

‘말도 안 되지.’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퀸시는 확신했다.

알폰소 리누스 에두아르트, 저자가 샤를로트를 바꿀 거라고.

그리고 그는 아직 그것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샤를로트가 이 일을 알게 되면 분명 미움을 받겠군.’

어쩔 수 없지.

퀸시는 무심히 생각하고는 생각을 떨쳐냈다.

죄책감이라고는 일말도 없는, 그다운 태도였다.

* * *

그 다음 날, 에두아르트 공작저.

알폰소가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입을 열었다.

“요약해보지. 건국제를 앞두고 폐하께 진상하기로 했던 보석의 행방이 묘연하다. 그리고 정황상 그것은 노하의 행각으로 보인다. 내가 이해한 게 맞나?”

“예, 각하. 바로 전날에 노하에서 찾아와 정확히 같은 보석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알고 그랬을지는 모르겠지만-”

“에둘러 말할 필요 없다, 루드빅. 이걸 두고 몰랐을 거라고 한다면 그놈이 천치일 테니까.”

“……예.”

“그리고, 세르주. 너는 오늘도 노하에서 문전박대를 당했고.”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물을 맞을 기세였습니다…….”

알폰소가 관자놀이를 다시 한번 짓누르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침묵 속.

건너편의 소파에 앉아 있던 소피아가 허탈하게 입을 열었다.

“아주 가관이네…….”

모두의 마음을 관통하는 한마디였다.

* * *

솔직하게 말하자면, 알폰소는 이번에야말로 혼담이 무사히 진행될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알폰소의 제안은 나무랄 데 없었고 일견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적어도 상대가 ‘가문의 압력에 시달리는 샤를로트’였더라면 말이다.

알폰소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샤를로트에게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거절할 수야 있겠지.’

정 사랑하는 사람에게 떳떳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원치 않는다는 말을 했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강요하지 않겠다고 분명 말했다.

피하지 말라는 말도 했고, 일주일의 시간도 주었다.

‘그런데도 거절이 이런 방식이어야 하나?’

왜 이렇게까지 교만한가. 내게 시간이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정말로 내가 당신 치마폭 하나만 바라보는 것이 즐거워 이러는 건가?

알폰소는 인내가 얇아지는 것을 느꼈다.

기실 샤를로트의 일에서 그는 늘 이러했다.

충동적이지 않은 자가 충동적이게 되고, 인내를 소일거리 취급하던 이가 인내를 잃었다.

그는 샤를로트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한 이래 처음으로 주변의 부정적인 의견에 동의하고 말았다.

“각하, 외람되오나 한 번만 재고를 부탁드립니다. 노하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는데도 저희가 더 굽혀야 한다면 그건 에두아르트의 명예에도 누가 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만. 알아들었다.”

“간곡한 청입니다. 노하는,”

“알아들었다고 했다, 루드빅 바텔레미. 내가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라.”

바늘을 한 움큼 삼킨 것처럼 목이 따가웠다.

이 불쾌한 기분의 원인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단순히 그의 가신들처럼 샤를로트의 방종에 혀를 차는 것인가?

아니면 그녀와의 결혼이 순조로울 거라 멋대로 오판한 제 어리석음이 뼈아픈 건가?

‘후자일 듯싶군.’

다소 교만한 평가일지도 모르지만, 알폰소의 판단은 여태 늘 ‘옳았다’.

그의 기이하리만치 높은 승률이 그 ‘옳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터를 떠나자마자 그의 판단은 순식간에 신뢰감을 잃어버렸다.

인간관계가 전술과 같을 리 없으니 당연한 일이건만, 스스로를 너무 자신했던 모양인지.

알폰소는 따가운 목으로 말했다.

“라베루즈와 혼담을 진행하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