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토록 고독해 보이는 것도 놀랍다.
알폰소는 그 표정을 본 순간 샤를로트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샤를로트에게 말한 대로, 그에겐 그녀의 교활함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그녀는 나를 기필코 떠날 테니까.’
샤를로트가 얼핏 보여준, 그 깊이를 감히 헤아리는 것조차 오만으로 여겨질 것만 같던 사랑.
그 사랑의 열렬함과 샤를로트의 영악함을 믿었다.
그녀라면 분명 알폰소의 제안을 톡톡히 이용해 먹고 떠날 것이다.
‘사실 1년은 결혼 기간으로는 짧지만.’
처음부터 노하와 에두아르트라는 말도 안 되는 조합이었으니, 고작 사계절 한 번 거쳐 이혼한다 한들 아무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으리라.
그리고 알폰소는 다시 자연스럽게 혼자가 될 터.
그게 알폰소가 바라던 그림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타당한 그림이었고.
-아무도 곁에 두지 마라, 알폰소. 너는 그래야 해.
복도의 침묵이 길어졌다.
상념이 꼬리를 물더니 해묵은 기억까지 튀어나오는군.
알폰소는 순식간에 불쾌해졌다.
그는 생각을 그다운 방식으로 잘라내고 걸음을 옮겼다.
달빛이 드는 곳에 이르렀을 즈음 멀리서 찰랑이는 긴 은발이 보였다.
“아, 알폰소 오빠! 루드빅이 이리로 갔을 거라더니 정말 여기 있네?”
“……소피아?”
“레이디 노하는 만나 봤어? 어때? 뭐래? 알로이스 경이랑은-”
“네가 말했던 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헛소문이더군. 다음부터는 소문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진위부터 제대로 파악해라.”
“뭐? 정말? 어쩐지, 알로이스 경 표정이 심상치가 않더라.”
로한 알로이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알폰소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로한 알로이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고?”
“아, 오빠는 못 봤겠구나? 아까 알로이스 경이 벌컥 화를 내서 연회 분위기가 영 어수선해졌거든.”
소피아가 전한 것은 이러했다.
로한이 영 어정쩡한 걸음으로 연회장에 들어오자, 그와 평소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그를 붙잡았던 것이다.
-레이디 노하는 어디 가고 자네 혼자 돌아오나? 사이가 상당히 좋아 보이던데.
라는, 적당한 안부치레로.
그리고 그 별것 아닌 말에 로한이 벌컥 화를 내며 씩씩댔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들 레이디 노하에게 알로이스 경이 거하게 걷어차였겠구나 생각했지. 그게 맞아?”
“뭐, 걷어차이긴 했지.”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말이다.
방문을 열었을 때 바닥을 구르던 로한의 모습은 정말 걷어차였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을 몰골이었다.
문제는 그걸 밖에서 떠벌리는 게 그에게 썩 좋을 리 없다는 점이었지만.
‘제 명을 제가 재촉하는군.’
알폰소는 자신이 등지고 나온 이들을 떠올렸다.
닮은 것이라고는 녹안밖에 없는 주제에, 그 한 가지만으로 그들이 같은 뿌리를 두고 있음을 여실히 표방하던 이들.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은 꼭 꼬리는 없고 양쪽에 머리만 둘 달린 뱀을 보는 듯 느껴졌다.
그러니 그들에게 집어삼켜지면 흔적도 찾지 못할 터.
로한이 그 사실을 조금이라도 눈치챘더라면 좀 더 현명하게 대처했을 테지만.
그것도 제 명이겠거니.
알폰소는 상념을 거두었다. 그 옆의 소피아가 줄곧 눈을 반짝이는 것이 보인 까닭이었다.
경험상 그녀가 저렇게 눈을 빛낼 때는 오직 하나뿐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라.”
“오빠 진짜 레이디 노하와 결혼할 거야?”
“그녀가 청혼을 받아들인다면.”
“안 받아들이면? 그때는 다른 사람 알아보는 거지?”
“그래. 본인이 원치 않는다는데 강요할 수는 없으니.”
“그래? 정말이지?”
그 말을 들은 소피아의 눈이 기묘하게 빛났지만, 알폰소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대답했다.
“그렇게 물어도 아마 받아들일 거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안을 했으니까.”
“오빠한테는 시간이 얼마 없잖아. 언제까지 기다릴 건데?”
“오래 기다릴 생각 없다. 어차피 곧 건국제니까. 그 전에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거다.”
알폰소는 그렇게 말했다가, 문득 덧붙였다.
“……누군가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 * *
덜컹이는 마차 안.
“그래서, 에두아르트 공작이 왜 너랑 있었던 건지 이제는 말해주지 그러니. 샤를로트.”
퀸시가 정적을 깨자, 차창 너머를 바라보던 샤를로트의 미간이 슬쩍 좁혀들었다.
“아까도 말했잖아. 우연이었다니까. 얘기를 나눈 것도 청혼에 대한 것 말곤 없어.”
“여전히 너와 결혼을 원했고?”
“그래.”
엄밀히 말하자면 내용이 조금 더 있기는 했다.
그냥 청혼이 아니라, 계약결혼에 대한 얘기였으니까.
샤를로트의 말이 거짓은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 퀸시의 시선이 잠시 샤를로트에게 머물렀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는 금세 시선을 거두고는 바른 자세로 앉아 우아하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자도 특이하군. 결혼을 원하는 이유는 아니?”
“……나도 그게 궁금해.”
대체 알폰소가 가진 ‘문제’라는 게 뭔지.
그것만 알면 나와 결혼하지 않더라도 도울 수 있을 텐데.
“뭐, 꼭 매사에 이유를 알아야만 하는 건 아니지.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하는 말이지만 나는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다. 에두아르트라니, 샤를 너와는 어울리지 않아.”
“그래. 나와는…… 어울리지 않지.”
샤를로트의 목소리 끝이 떨려 나왔지만, 퀸시는 마차의 덜컹임 탓으로 이해한 모양인지 별다른 내색이 없었다.
그는 단지 제 장갑 위로 손등의 뼈를 따라 엄지를 움직일 뿐.
“만찬 자리에서는 네가 결혼하겠다고 해서 더 말릴 수는 없었지만, 나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네 결정이 마음에 든다.”
시선을 떨어트리고 있던 샤를로트가 눈동자만 슬쩍 들어 올려 퀸시를 응시했다.
“언제는 에두아르트 공작과의 결혼은 노하에 필요한 일이라더니?”
“그때 일을 아직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거니?”
퀸시가 가볍게 픽 웃으며 느슨하게 턱을 괴었다.
“필요한 일은 맞지. 너도 부정하진 못할 거다. 노하의 입지는 점점 약해져 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도 회생을 꾀할 수 있겠지.”
“말은 좋네.”
“결혼하지 마, 샤를로트.”
퀸시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마차 안의 암막에도 온기가 걷혔다.
“기억하니? 내가 예전에 했던 말. 오직 우리만이 노하라는 것. 그리고-”
“노하는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 그거라면 물론 기억해.”
샤를로트가 말을 받으며 시선을 떨어트렸다.
기억하지 못할 리 있나.
자신은 오직 그 말 하나로 살아왔는데.
-이름이 샤를로트라고? 출신보다 귀한 이름이구나. 싫지 않아. 이름에는 지어준 자의 욕심이 담기기 마련이거든. 네 이름을 지어준 이는 귀한 삶을 바랐던 모양이야.
-샤를, 널 귀하게 만들어주마. 오직 너와 나만이 노하의 이름을 쓰고, 오직 우리만이 노하의 존재 의미가 될 거다.
그것은 노하의 저택에 그들의 배다른 동기들이 여럿 있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샤를로트가 퀸시에게 무한한 신뢰를 가지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여전히 많은 동기들 중 나만을 선택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퀸시는 그 말을 지켰다.
그 많던 동기들 중 노하에 남은 것은 퀸시와 샤를로트뿐이었으니까.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되도록 네가 노하에 오래 머무르길 바란다.”
너는 노하가 가장 잘 어울려.
그 말을 들으며 샤를로트는 차게 웃었다.
‘그래.’
오물에겐 진창이 가장 잘 어울리는 법이지.
대화는 그즈음에서 끝이 났다.
마차가 노하의 저택에 도착한 탓이었다.
퀸시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는 샤를로트에게, 퀸시가 말을 건네 왔다.
“그러고 보니, 샤를. 내일이면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건 알고 있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그래. 돌아오시면 분명 에두아르트 공작과의 혼담에 대해 물을 텐데. 잠시 자리를 피해 있는 건 어때?”
샤를로트는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그 말에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깊은 밤이라 등불조차 없는 검은 정원.
조금 전 연회장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뇌리에 메아리쳤다.
-생각해 볼 시간을 일주일 드리겠습니다. 재촉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터라.
-그러니 날 더는 피하지 마십시오. 얼굴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알폰소의 말마따나 그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일주일이 그가 줄 수 있는 최대의 기한일 터.
“……그래. 잠시 떠나 있어야겠어. 며칠 정도만.”
다녀오면 이 어수선한 마음도 정리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알폰소의 얼굴을 마주 보고 청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터.
‘미련이 더는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알폰소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마다 미련이 구름 떼처럼 쌓여갔다.
욕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허울뿐인 희망이 자꾸만 그릇된 선택을 충동질했다.
그녀에겐 그럴 자격이 없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