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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 19화 (20/122)

들려온 호명에 알폰소가 미간을 슬쩍 좁히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표정에 떠오른 것은 불쾌함이라기보다는 의아함이었다.

“……‘알폰소’?”

그제야 샤를로트는 자신이 그를 지나치게 격의 없이 불렀음을 깨달았다.

알폰소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튀어나온 실수였다.

“……실수예요.”

“실수치곤 자연스럽던데.”

“나는 누호프의 시구를 읊을 때도 자연스러웠죠.”

그 태연한 변명에 알폰소가 눈을 가늘게 떴다.

샤를로트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지 판별하겠다는 듯.

하지만 샤를로트는 거짓말이라면 이골이 난 사람이고, 무엇보다 그녀는 실수를 덮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알고 있기도 했다.

바로 뻔뻔해지는 것.

“왜 그렇게 보는 거죠? 설마 이름 좀 불렸다고 화낼 생각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이렇게 된 거 당신도 이름으로 불러요. 샤를로트라고.”

“알겠습니다, 샤를로트.”

당황할 줄 알고 한 말이었는데.

예상외로 알폰소는 선뜻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덕분에 당황하게 된 건 간만에 이름을 불린 샤를로트의 심장밖에는 없었다.

“부른 용건은 그게 전부입니까?”

아차.

샤를로트는 그제야 제 실수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대체 알폰소가 겪고 있는 문제가 뭔지 조금이라도 알아내야 하는데.’

엉겁결에 부르기만 하고 용건은 생각도 해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용건이 없다고 하면 알폰소가 갈 텐데.

‘어떻게 하지?’

샤를로트의 내면은 잼과 피클 병을 잔뜩 넣어 둔 선반을 넘어뜨리기라도 한 아이처럼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늘 그렇듯 미동조차 없었지만.

제대로 된 답을 내기도 전에 우왕좌왕할 시간은 사라져 버렸다.

이 이상 시간을 끌면 알폰소에게 또 추궁당할지도 모른다.

샤를로트는 머릿속을 거치지 않고 되는 대로 내뱉었다.

“무…… 물어볼 게 있었어요.”

“대답해드릴 수 있는 부분이라면 얼마든지 질문하십시오. 뭡니까?”

“그게, 그러니까…….”

샤를로트가 뜸을 들이며 알폰소를 빤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질문할 말을 찾고자 바라본 것이었으나, 그 잠깐 사이 그 시선은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홀린 듯이 바라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알폰소를 붙잡은 것이 정말로 그가 처한 문제를 더 알아내기 위함인지, 아니면 알폰소를 더 보고 싶다는 제 욕심 때문인지 헷갈릴 정도로.

‘어쩌면 후자일지도 몰라.’

문제고 뭐고, 그냥 아예 얽혀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제 욕심이 또다시 알폰소를 죽이는 결과를 낳을까 봐 두려우면서도.

샤를로트는 알폰소를 눈앞에 둘 때마다 인내를 잃었다.

아니, 이성을 잃었다고 하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른다.

애써 표정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웃거나 이상할 정도로 울게 될 것만 같으니까.

미친 사람처럼 그의 손을 붙잡고 보고 싶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지니까.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은 샤를로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가, 그녀가 여유를 잃을 때면 불쑥 수면 위로 튀어나왔다.

그래, 꼭 지금처럼.

“……샤를로트?”

시선이 길어지자 알폰소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주한 샤를로트의 표정이 기묘해진 까닭이었다.

‘또 이 표정을 짓는군.’

그리움과 슬픔, 비탄과 환희가 뒤섞인 표정.

일전 마벨의 후원에서 샤를로트와 처음 대면한 순간에도 보였던 표정이다.

샤를로트 본인은 자신이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그녀가 얼마나 사연 많아 보이는 낯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아마 모르는 거겠지.’

그때 샤를로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그녀 본인이 알았더라면.

-여전히 기억을 되짚고 있는 겁니까?

-……네, 아무리 봐도 초면 같아서요.

이런 거짓말은 꿈도 꾸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누가 보면 내가 헤어진 연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군.’

대체 뭘 숨기고 있기에 이러는 건지.

사실 아까부터 내심 의아했다.

-대체 이건 누구 의견이죠? 당신 의견일 리는 없을 테고. 당신 가신들인가요?

샤를로트의 이 말.

‘이건 상대를 잘 알아야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녀는 너무 당연하게 알폰소는 그럴 리 없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거기다 불쑥 튀어나온 ‘알폰소’라는 부름.

저 시선까지.

초면이나 다름없는 샤를로트는 기묘하게 알폰소를 대하는 것이 익숙하다는 듯 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알폰소는 샤를로트와 접점이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굴고 있으니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체 무슨 질문을 하려는 걸까.

알폰소가 저도 모르게 질문을 재촉하려는 순간.

샤를로트에게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요?”

상대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작은 중얼거림.

알폰소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그리고 질문을 다시 듣기 위해 샤를로트에게 다가갔지만, 질문을 다시 들을 수는 없었다.

그 다음 순간.

“샤를, 여기 있었구나.”

벌컥 문이 열리고 불청객이 찾아왔으므로.

* * *

숫돌 쪼개는 듯한 걸음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사위가 어두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고 발소리만 울리는 가운데.

알폰소는 복도를 지나며 조금 전의 일을 회상했다.

샤를로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휴게실의 문이 벌컥 열렸던 순간.

“……퀸시?”

방으로 들어온 불청객은 퀸시였다.

그는 샤를로트가 로한을 상대하는 동안 알로이스의 노부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부인과의 대화가 얼추 끝나자 샤를로트를 찾아온 것이다.

알폰소에게는 아주 불행한 시기에 딱 맞추어서.

문이 열리는 순간 알폰소와 샤를로트 사이에 흐르던 묘한 기류는 비눗방울 터지듯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샤를로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지워 버린 까닭이었다.

그녀가 놀란 얼굴을 하며 퀸시에게 다가갔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퀸시? 알로이스 노부인과 같이 있던 게 아니었어?”

“얘기가 끝나서 널 찾으러 왔지. 분명 로한 알로이스와 함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네가 보이지 않기에 한참 찾았다만…….”

퀸시의 시선이 느리게 알폰소를 향해 돌아갔다.

“……에두아르트 공작께서 제 동생과 함께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샤를로트를 볼 때는 봄의 가장 상냥한 날씨를 닮아 있던 그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는 어찌나 차가워지는지.

‘이렇게 보니 남매가 똑 닮았군.’

샤를로트와 퀸시 모두 똑같은 녹안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입꼬리를 올리고도 무표정하게 보이는 재주가 있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알폰소에게, 퀸시가 눈을 휘어 웃으며 말했다.

“노하의 청혼을 재고의 여지 없이 곧장 거절하셨기에 혹 저희에게 나쁜 감정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염려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기쁘군요.”

해석하자면 ‘노하의 청혼을 걷어차 놓고 샤를로트랑 단둘이 있을 염치가 있냐?’ 정도.

“어디까지나 앞선 혼담이 있어 부득이하게 거절의 말을 전했을 뿐, 악감정이 있을 리 있나.”

“공작께서 그럴 분이 아니시라는 건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렇듯 매몰차게 청혼을 거절해 두시고 이제 와서 생각이 바뀌셨을 리도 없고. 안 그렇습니까?”

“……글쎄.”

알폰소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가 돌아왔다.

굳이 여기서 퀸시와 더 대치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알폰소는 조금 전 퀸시에게 다가가던 샤를로트의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웠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니 여기 계속 서 있는 건 그녀에게도 좋지 못한 일일 터.

“경이 매사에 쉽게 단정 짓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라지. 내 생각이 바뀌었을지는 모를 일이 아닌가.”

“그건-”

“예기치 않은 만남이었으니 나는 이만 돌아가지. 남매 사이가 좋아 보이는데, 외부인이 오래 끼어 있는 것도 예의는 아닐 터. 다음에 뵙겠습니다, 레이디 노하.”

퀸시가 뭔가 말을 덧붙이려 했지만, 알폰소는 가볍게 묵살하고 자리를 떴다.

돌아가는 걸음 내내 그는 샤를로트를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퀸시가 들어오기 전 샤를로트가 조용히 읊조렸던 그 한 마디를 곱씹었다.

귀를 의심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으나, 알폰소는 그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

-당신도 날…… 싫어하나요?

그 목소리에 어린 주저와 떨림마저도 생생했다.

목소리 끝에서 빗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상상한 낙수가 과연 빗물인지 눈물인지조차 흐릿했으나 감상은 그러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청혼을 받았을 때는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으면서.

한참이나 주저해서 뱉은 질문이 겨우 자신을 싫어하느냐는 내용이라니.

알폰소는 걸음을 멈추고 어둠 위로 기억 속의 얼굴을 덧그려 보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며 아스라이 미소 지었던 여자의 얼굴.

잔인하고 냉랭하다 이름난 악녀가 사랑을 말하던 순간.

-자세히 얘기해줄 수는 없지만, 사랑 때문이라고 해 두죠.

-좋은 사람이에요. 많이 무르고, 천성이 다정한 사람. 나랑은 닮은 게 하나도 없는 사람…….

대체 그 얼굴을 뭐라고 형용해야 할까?

행복하고도 슬퍼 보이는, 가장 비극적인 행운을 거머쥔 것 같은 자의 표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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