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트의 표정이 조금 멍청해졌다.
“……계약결혼이라니요?”
“들은 그대로입니다. 1년만 결혼을 유지하고, 이후에는 이혼하는 겁니다. 물론 부부 관계는 일절 없이.”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이 결혼을 원치 않지만 가문의 알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휘둘리던 게 아니었습니까?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겪을 게 아닙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죠.”
“맞습니다. 하지만 내 말에 틀린 곳이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알폰소의 말에 샤를로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것이 무언의 긍정이라는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알았다.
“나는 당신에게 가문에서 벗어날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제국법상 여자는 결혼 이후 성을 바꾸게 된다.
태어난 가문이 아니라, 남편의 가문으로 입지를 옮기는 것이다.
그러니 샤를로트는 결혼 이후 노하의 알력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을 터.
“또한 에두아르트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1년 후 이혼하면 당신은 적지 않은 위자료를 가지고 갈 수 있을 테고, 그땐 원하는 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알폰소의 제안은 타당했으며 일견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샤를로트가 정말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중이라 알폰소와의 결혼을 원치 않는 상황이었더라면 말이다.
머리가 아파지는 기분에 샤를로트는 한 걸음 물러나, 이마를 짚었다.
“당신 말만 들으면 내가 길에 굴러다니는 수표 뭉치라도 주운 것 같군요. 1년만 아내 행세를 해 주면 돈과 자유를 주겠다니.”
청혼을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곤란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제안까지 숨겨놨을 줄이야.
“대체 이건 누구 의견이죠? 당신 의견일 리는 없을 테고. 당신 가신들인가요?”
이렇게 계산적인 제안을 생각해 낼 사람이라면 분명 루드빅 바텔레미겠지.
부관인 세르주는 이렇게 계산적으로 굴기에는 사람이 무르니까…….
“내 의견입니다.”
“그럴 줄…… 잠깐, 뭐라고요?”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당신에게 계약결혼을 제안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오직 당신만이 압니다.”
“아무에게도 상의하지 않았다고요? 이런 문제를?”
“청혼의 당사자도 모르는 이야기를 타인과 공유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알폰소는 계약 결혼에 대해 샤를로트에게 제일 먼저 얘기하기 위해 여태 침묵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맙소사.
이런 고지식한 인간 같으니!
“언제부터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당신이 마벨의 후원에서 멜리아와 대화하는 것을 봤을 때부터.”
“……생각한 즉시 청혼했다는 얘기군요.”
“맞습니다.”
알폰소는 고저 없이 긍정했다.
그 표정은 지극히 무감정해서, 일견 공허해 보이기까지 했다.
샤를로트는 그런 알폰소가 낯설다고 생각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가?’
분명 적지 않은 시간 알폰소를 보며 그에 대해서라면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알폰소는 그와 다른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낯설기만 했다.
자신을 전처럼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보지 않아서일까.
웃는 것도, 무감정해 보이는 것도.
조금은 피로해 보이는 것까지도 모두 낯설어, 샤를로트는 가만히 알폰소의 낯을 바라보았다.
알폰소의 얼굴은 객관적으로도 미형이었다.
색소가 옅고 이목구비의 선이 뚜렷한 낯은 대리석으로 깎은 조각상을 연상시키곤 했다.
그 창백한 피부 아래 엷게 도는 혈색만이 그 흰 피부 밑으로 붉은 피가 지나고 있음을 짐작케 할 뿐.
무기질적인 인간이라는 말이 지독하게도 어울리는 외모였다.
특히 지금처럼 눈을 내리뜰 때면 옅은 은색의 속눈썹이 벽안 위로 드리우는데, 그것이 꼭 눈발 날리는 얼음호수처럼 보인다는 것은 샤를로트 혼자만의 은밀한 감상이었다.
과거와 바뀌지 않는 감상이 하나 있다면.
‘참 딱딱한 얼굴이란 말이지.’
고지식한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이다.
이렇게 딱딱한 생김인데,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도 알폰소 특유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 탓일까.
고지식하고, 올곧고, 선한 인간상.
샤를로트의 오랜 시선이 무언의 추궁이라고 생각했던지, 알폰소가 시선을 사선으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당신을 좋게 평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 참 면전에서 하기 좋은 이야기군요.”
샤를로트의 대꾸에 알폰소의 뺨에 조금 더 색이 물들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실제로 당신은 내 혼담을 번번이 방해하지 않았습니까? 원인이 무엇이든 결과는 같잖습니까.”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나는 좋은 인간이 아니니까.”
“좋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나쁜 인간에 가깝지 않습니까? 교활하고, 뻔뻔하고.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데에 주저가 없고, 도덕적 관념도 희박해 보이는데.”
“방금 나한테 청혼한 사람 맞죠, 당신?”
“청혼과 평가는 별개입니다.”
고지식한 대답에 샤를로트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 말만 듣자면 나는 상종할 가치조차 없어 보이는데요.”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생각이 바뀌었지만.”
“이유가 뭐죠?”
샤를로트의 물음에 알폰소는 잠시 침묵했다.
마치 말을 고르듯.
그리고는 대답했다.
“당신이라면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문제요?”
“예.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제게는 중요한 것이 걸린 문제입니다.”
“문제가 뭔지는 지금 알려줄 수 없나요?”
“가문의 대외비라 불가합니다. 당신이 승낙하면 그때 알려드리겠습니다.”
알폰소의 말에 샤를로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결혼 말고도 다른 문제가 있다고?’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그리고 알폰소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 샤를로트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아델린 라베루즈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모르는 알폰소의 문제가 있었다니?
샤를로트는 최대한 머릿속을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짚이는 게 없었다. 분명 알폰소는 샤를로트와 결혼한 이후 별다른 문제가 없이 지냈는데?
‘아니, 애초에 결혼 초기에는 얼굴 맞댄 일도 별로 없었으니까…….’
내가 모르는 게 있을 수도 있나?
그래도 문제가 있었다면 분명 기억할 텐데…….
-샤를로트. 혹 내가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면 어떻겠습니까.
-도움이요? 누굴 죽이고 싶기라도 한가 보죠? 아니지, 죽인 후 처리가 필요한 건가요?
-……못 들은 셈 치겠습니다.
……설마 이건가.
그때 와락 얼굴을 구기고 돌아간 알폰소가 아직도 또렷이 기억에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잘 좀 들어볼걸.
하지만 후회해 봐야 죽은 사람과 지난 시간은 대답이 없는 법이다.
대신 산 사람이 말을 이었다.
“당신도 이 결혼을 원치 않는다면 1년간 나를 돕는 것으로 자유를 찾아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말은 바로 해요. 나와 그 이상 엮이고 싶지 않은 거겠죠.”
알폰소의 문제가 뭐가 됐든, 그의 의중은 명확해졌다.
‘다른 상황이라면 결코 나와 상종하려 들지 않았겠지.’
하지만 알폰소에게는 샤를로트의 도움이 필요한 문제가 있다.
그리고 샤를로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그녀와의 결혼이 1년도 채 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가문의 압력에 시달리는 샤를로트’에게 꽤 괜찮은 탈출구를 제시해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을 터.
‘쉽게 말해 이해관계가 되어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섰으리라는 건데.’
알폰소의 생각은 투명했고, 또 그만큼 합리적이었다.
샤를로트에게는 거절할 이유가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그녀가 정말로 ‘가문의 압력에 시달리는 샤를로트’였더라면 말이다.
하지만 여기 서 있는 샤를로트는 ‘알폰소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는 샤를로트’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상황만 보자면 알폰소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할 것 같은데, 정작 그 ‘문제’가 뭔지 모르니 선뜻 결혼을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알폰소가 제안한 건 고작 1년에 불과한 기간이었지만, 샤를로트는 그것만으로도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노하와 연루된 1년이, 자신과 결혼해 보내는 그 1년이 알폰소를 또다시 죽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불안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알폰소에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는 걸 안 이상 그녀는 행동해야 했다.
‘뭐라도 물어봐야 해. 물어서…… 문제가 뭔지 알아내야 하는데.’
하지만 대체 뭘 물어봐야 하지?
그 문제가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 여지가 있는지에 대해?
그녀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침묵하던 알폰소가 덧붙여 말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울 수 없다면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제안일 뿐이니.”
알폰소는 그 말과 함께 생각해 볼 시간을 일주일 주겠다고 했다.
모든 기간이 짧게 느껴지는 것은 샤를로트의 마음이 불안해진 탓일까.
‘제안’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알폰소가 자리를 뜨려고 하는 찰나.
다급해진 샤를로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갔다.
“잠깐만요, 알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