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로한은 늘 사냥터에서 본인이 얼마나 멋지게 사냥했는지 떠들어댔지만, 실상은 다람쥐 하나 제대로 쏴 본 적 없는 인간이었다.
누군가를 직접 때린 경험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휘두른 폭력의 대상이 샤를로트 노하라니!
신께 맹세컨대 그는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
“괘, 괜찮-”
“사람을 때리는 건 처음인가 보지? 로한 알로이스.”
로한이 더듬거리며 변명하려던 순간, 줄곧 침묵하던 샤를로트가 입을 열었다.
그 평온한 목소리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시니컬하고 차분했다.
아마 목소리만 듣자면 그녀가 난데없이 뺨을 맞은 사람이라고는 차마 생각지도 못할 터였다.
그러나 샤를로트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로한의 사정은 달랐다.
바뀐 말투와, 그녀의 지독히도 차가운 녹안이 꼭 목을 조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상황을 모면하려는 로한의 머릿속에서 가장 그럴싸한 변명이 튀어나왔다.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건 당신 잘못이야! 당신이 나, 나를 유혹해 놓고……! 나를 농락했잖아!”
“……농락?”
“얘, 얘기 들었어! 디트리히 경한테도 부축해달라며 유혹해 놓고는 걷어차서 망신을 줬다지? 이, 이 간악한-”
“간악한 악녀라는 얘기는 그만둬. 이제 좀 질리니까.”
샤를로트가 천천히 장갑을 벗으며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디트리히. 네 말을 들으니까 생각나네.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구두에 장난질을 쳐놨던 놈 말이지.”
그때 디트리히는 의도적으로 부축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다정한 척 붙어 있으면서 샤를로트와 자신이 특별한 관계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그리고 샤를로트에게 거절당하자 모멸감에 얼굴이 온통 새빨개져서는 고함을 쳤던가.
-날 가지고 농락하다니!
라고, 꼭 눈앞의 로한처럼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인간은 이렇게 다 비슷한지.
짧게 조소한 샤를로트가 입을 열었다.
“사람을 때리는 데에도 요령이 있어. 무턱대고 손을 휘두르는 건 난전판에서나 하는 짓이지.”
뭐, 네가 알 리가 없겠다마는.
샤를로트는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더니, 천천히 로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제 손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손바닥을 쓸 거라면 장갑은 벗어야 해. 금속은 빼는 게 좋아. 특히 반지 같은 건 광대에 잘못 맞으면 보통 아픈 게 아니거든.”
이렇게 말이지.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그 다음 순간.
철썩!
번쩍이는 통증과 함께 로한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이, 이게 무슨-”
“방금 손이 조금만 높았으면 약지의 반지가 광대에 맞았을 거야.”
철썩!
“레이디 노하!”
철썩!
“이 미친-”
퍽!
“아악!”
샤를로트에게 달려들려던 로한이 걷어차인 정강이를 움켜쥐고 나동그라졌다.
‘무, 무슨 힘이 이렇게 세?!’
로한이 아무 저항 없이 따귀를 세 대나 얻어맞은 게 아니었다.
그는 샤를로트의 손목을 움켜쥐기도 했고, 밀쳐내려고도 했다.
정강이를 붙들고 나동그라진 이후에도 그는 몇 번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요령 좋게 날아드는 발길질이 번번이 그를 무릎 꿇게 만들었다.
“제, 제발, 잘못,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레이디 노하……. 이, 이제 그만…….”
엉망이 된 로한이 바닥을 기자, 샤를로트의 구두 끝이 그의 뺨을 툭툭 쳤다.
“로한 알로이스. 내 뺨을 때릴 때는 기세 좋더니, 얼마나 맞았다고 이래?”
“시, 실수였습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실수. 실수라.”
제 뺨을 때리고, 자신을 가지고 농락했다며 악녀라고 하던 게 정말 실수일까.
왜 이런 놈들이 하는 이야기는 늘 비슷한지.
샤를로트는 시니컬한 눈으로 로한을 내려다보며 디트리히의 일을 떠올렸다.
만나 주지 않으면 자살한다기에 친절히 입에다 총구를 쑤셔 넣어 주었더니 울면서 벌벌 기었던 한심한 몰골.
-화, 홧김에 저지른 겁니다. 시, 실수입니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그때 샤를로트는 그의 ‘실수’를 너그러이 받아들여 주었다.
반쯤 피떡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굳이 방아쇠를 당길 것까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 디트리히는 샤를로트가 자신을 유혹하고는 걷어찼다는 이야기를 사방에 퍼트리고 다녔다.
‘아마 로한 알로이스도 그렇겠지.’
귀찮은데 그냥 죽여버릴까.
어차피 길지 않은 목숨, 무슨 일이 더 벌어지든 상관없지 않나.
이자의 죽음은 알폰소와 연관이 없으니 더더욱 상관없을 것 같았다.
오늘 그녀는 어떤 행운도 불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기분이 나빴고, 샤를로트의 품에는 언제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침이 들어 있었다.
어떻게 할까.
샤를로트의 침묵이 길어지고, 그녀가 품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로한의 목에 독침이 박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그만두십시오. 레이디 노하.”
벌컥 문이 열리고,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가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으므로.
알폰소 리누스 에두아르트.
그 차갑게 굳은, 익숙하기까지 한 낯에 샤를로트의 미간이 반사적으로 찌푸려졌다.
‘이럴 줄 알고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던 건데.’
그러나 샤를로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바닥을 기던 로한이 반색하며 외쳤다.
“에, 에두아르트 공작 각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제가-”
“네가 레이디 노하께 폭력을 휘두른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니 입 닫아라.”
로한은 알폰소가 가여운 자신을 구원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모양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알폰소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날카롭기까지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알폰소는 이 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누가 뺨을 맞았는지 깨달은 순간 경멸 섞인 충격을 받았으니까.
“밖에서 조금 들은 정도로도 상황은 얼추 알겠더군. 고백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상대의 뺨을 올려붙이는 정신 나간 발상을 하는 이가 정말 있을 줄이야. 수치라는 걸 배우지 못한 모양이지?”
“가, 각하. 저는…… 그러니까, 저는…….”
엉거주춤 일어난 로한이 더듬거리며 변명거리를 찾았다.
전부 저 간악한 악녀가 순진한 자신을 유혹해서 생긴 일인데.
알폰소는 오직 제 ‘실수’에 대해서만 무섭게 꾸짖고 있었다.
꾸짖는 사람이 다른 이였더라면 억울하다며 목소리라도 높였을 텐데, 상대는 알폰소였다.
황제의 사촌이자 오른팔, 그리고 그 지고한 에두아르트의 주인.
아직 작위조차 없는 로한 따위가 감히 가타부타 말을 붙일 수가 없는 상대.
그 기세에 눌린 로한이 이렇다 할 변명거리를 찾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알폰소가 미간을 좁히며 경고했다.
“알로이스 노부인이 이 일을 알게 되는 것은 너도 원치 않을 터. 오늘 일에 대해 허튼소리가 들려오거든 내가 이 사건의 목격자로서 침묵하지 않을 것만 알아두도록.”
그 말만 머리에 새기고 당장 꺼지라는 말까지는 굳이 필요치 않았다.
로한은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어물거리던 낯 그대로 시뻘게지더니,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으니까.
그렇게 알폰소와 샤를로트, 둘만 남은 휴게실.
침묵을 깬 것은 알폰소 쪽이었다.
“샤를로트 노하. 그간 날 피하더니, 저런 이를 상대하느라 그랬던 겁니까?”
그렇게 묻는 알폰소의 표정은 조금 언짢은 것 같기도, 혹은 답답한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샤를로트에게는 익숙한 표정이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처럼 그립고 익숙한 표정.
‘이래서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발뿐만이 아니다. 시선조차 떨어트릴 수가 없다.
언제나 이성이 앞섰던 그녀였으나 알폰소의 일에서라면 늘 이성을 잃고 말아서.
샤를로트는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때 얘기를 들었더라면 아시겠지만, 가문의 명령은 절대적이라서요.”
“그럼 내 청혼을 피하라는 것도 가문의 명령이었습니까?”
청혼.
그 얘기가 나오자 샤를로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폈다.
“그건…… 내 의지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요.”
“알고 있습니다. 그게 당신 뺨이나 올려붙이는 저 얼간이는 아닐 테고.”
알폰소의 말은 평소 그답지 않게 거칠었다.
‘얼간이라니.’
그가 저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샤를로트가 저도 모르게 놀라 눈을 깜빡이는 사이, 부은 뺨에 무언가 닿았다.
알폰소가 품에서 곱게 접힌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뺨을 감싼 것이다.
한층 가까워진 거리에서 시선이 맞닿았다.
“샤를로트 노하. 나는 오늘 당신에게 마저 청혼하러 왔습니다.”
“……내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는데도요?”
“알기 때문에 청혼하려 하는 겁니다.”
샤를로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알폰소가 낯선 표정을 했다.
희미하게 미소 지은 것이다.
“나와 1년간, 계약결혼을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