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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 16화 (17/122)

알폰소는 예정대로 라베루즈에 갔다가 소피아와 함께 곧장 알로이스로 왔다.

일정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라면, 기껏 알로이스까지 왔는데도 샤를로트를 찾을 수 없었다는 점 정도일까.

‘이 정도까지 찾아봤는데도 없다면 단순히 엇갈린 게 아니겠지.’

명백하게 샤를로트 쪽에서 알폰소를 피하고 있는 거다.

알폰소가 연회장에 들어올 즈음 소란이 일었으니 피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알폰소 역시 조금은 짜증이 치밀었다.

‘미움받은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피할 일인가?’

이야기 한 번 나눠볼 생각도 없이 피하기만 하다니.

덕분에 이쪽은 네 번씩이나 혼담이 애를 먹고 있는데 말이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오늘 세르주의 보고로 대충 이해했다.

‘가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 샤를로트 노하 본인은 결혼을 원치 않는다고 했지.’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가주에게 자신이 청혼한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게 하고, 본인은 요리조리 피해 다니고 있는 것이다.

노하든 알폰소든, 어느 쪽이 되었든 나가떨어지라고.

‘그렇게 결혼을 기피하는 이유는 역시 사랑한다던 사람 때문인가.’

알폰소는 루드빅에게 마저 연회장을 찾아보라고 하고, 본인은 연회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운이 좋다면 휴게실에 숨어 있는 샤를로트를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복도의 융단을 밟는 구둣발은 막힘없이 호쾌했으나, 정작 알폰소의 심정은 무언가 막힌 듯 답답하기만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머릿속에 자꾸만 소피아의 말이 떠돌아다니는 탓이다.

-알로이스 경이 샤를로트 노하와 잘되어가고 있다고 사방에 얘기를 해뒀더라고. 알로이스 가의 연회에서 고백이라도 하려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어.

-무엇보다 노하에서 알로이스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까, 어쩌면 그쪽과 진지하게 혼담이 오가는 걸 수도 있지 않겠어?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에 대해 말하던 샤를로트의 얼굴도.

‘만약 샤를로트 노하가 사랑하는 사람이 알로이스의 후계자라면.’

어쩌면 내가 지금 그녀를 찾는 것이 그녀를 훼방하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그냥 소피아의 말대로 노하와의 결혼을 단념하는 게 나았을까.

‘머리가 아프군.’

차라리 전쟁터에 있을 때가 편했던 것 같다.

그때는 총사령관으로서 오로지 최대한 아군을 많이 살아남게 만드는 것만 신경 쓰면 됐으니까.

하지만 총사령관의 직위를 벗고 에두아르트 공작으로 돌아오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수많은 이해관계들이다.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과 희생해야만 하는 것들, 타성으로 살아가는 순간들.

-알폰소. 짐이 믿을 건 너뿐이다. 딱 10년만 해다오. 네가 승전보를 울릴 때마다 황권은 강건해질 거다.

-이제 전쟁터에서 돌아오셨으니 각하께서 원하는 대로 사셔도 좋을 텐데요. 가끔 보면 각하께서는 가진 권리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 같으십니다.

황권은 강건해졌으나 정작 에두아르트는 약해졌다.

그 책임은 가주인 알폰소에게 있으니, 전쟁터를 벗어난다 해서 짐을 내려놓을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리라.

‘결혼을 해서…… 가문의 문제를 해결하면 그땐 짐을 내려놓을 자격이 될지 모르겠군.’

이제는 피로한 건지 답답한 건지 분간도 잘 가지 않는다.

알폰소는 무의식적으로 제 커프스단추와 넥타이 위치를 바로잡았다.

어느새 걸음은 막다른 길을 마주하고 있었다.

‘서편 복도는 이만하면 전부 돌았는데, 동편으로 갔어야 했나.’

알폰소가 복도 끝까지 다다르기 직전 걸음을 돌리려던 순간.

“-노하, 이 더러운 년이!”

어디선가 큰 소리와 함께 둔탁한 파열음이 울렸다.

* * *

‘오늘은 운이 썩 좋지 못한 날이군.’

샤를로트는 제 뺨을 만져 보며 생각했다.

아니, 어쨌든 알폰소와 만난다는 최악의 상황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샤를로트는 종종 운이란 그저 여느 종업원의 호주머니 사정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기분 좋은 손님이 있다면 접시를 깨고도 호주머니를 비울 일이 없겠지만, 기분 나쁜 손님이 있다면 잘못 없이도 죄를 빌며 제 주머니를 탈탈 털어야 하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지 않나.

운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기분이 좋으면 치맛자락을 밟는 일이 생기더라도 크게 넘어져 다치지 않았으니 운이 좋았다는 말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면 제 눈앞에 보석이 떨어져도 그 보석의 흠집을 탓하며 투덜거리게 되기 마련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은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나빴다고 해야 할까.

느닷없는 알폰소의 등장에 예기치 못한 부상.

‘그리고 허풍쟁이에게 고백을 받고 뺨을 맞는 일이라.’

샤를로트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모욕감에 얼굴이 벌게진 로한이 샤를로트와 제 손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이,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조금 전 샤를로트를 부축해 휴게실로 왔을 때.

로한은 확신하고 있었다.

‘역시, 샤를로트 노하도 날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샤를로트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다고.

그녀가 알로이스 가문의 연회에 등장한 이후, 로한은 줄곧 샤를로트에게 푹 빠져 있었다.

비록 그녀와 만난 것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로한은 샤를로트와의 분홍빛 미래를 꿈꾸었다.

하여 그는 사교 클럽에 나갈 때마다 샤를로트의 이야기를 해 왔다.

특히, 그녀와 자신의 관계가 얼마나 특별한지에 대해서.

“레이디 노하가 내게 얼마나 상냥한지, 자네가 보면 놀랄 걸세. 그녀가 날 볼 때마다 낯을 붉히며 부채를 든다니까? 착각이 아니야!”

“쯧쯔. 로한 자네 영 정신을 못 차리나 본데, 샤를로트 노하는 독사야. 독사! 그 여자가 낯을 붉힌다는 건 위험 신호라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디트리히 가의 장남이 그 여자에게 어떻게 당했는지 자네, 들어본 적이 없나?”

“디트리히 경? 그자라면 레이디 노하에게 만나 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자살 소동을 벌인 자가 아닌가?”

“그래, 그랬지. 하지만 디트리히 경이 괜히 그랬겠나?”

로한의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는 다소 뻔한 내용이었다.

“그 여자가 디트리히 경 앞에서 낯을 붉히고 내숭을 떨다 못해, 마차에서 내리다 구두 굽을 부러뜨리기까지 했다더군. 디트리히 경에게 부축을 해달라며 유혹한 게지! 그래놓고는 디트리히 경이 고백하자 뻥 걷어차고 보란 듯 다른 남자와 단둘이 뱃놀이를 갔다더군. 디트리히 경의 배신감이 어땠겠는가!”

“아니, 그런 사정이…….”

“디트리히 경은 사관학교를 마치고 장교가 된 엘리트일세. 그런 남자가 어디 만날 여자가 없어서 그런 소동을 벌였겠는가? 다 노하의 악녀, 그 여자의 흉계에 당한 거지.”

로한의 친구는 그에게도 조심하라며 경고를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그 경고는 로한의 머릿속에도 깊게 남아 있었다.

허풍에 찬 거만한 로한에게는 썩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나는 멍청한 디트리히 경하곤 달라.’

샤를로트 노하는 내게 진심일 거야.

이미 사교 클럽에서 샤를로트와 잘되어가고 있다고, 두고 보라며 큰소리를 치고 온 참이었다.

오늘은 꼭 이 마음을 고백하리라 결심하기도 했는데.

‘샤를로트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다니.’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렇게 말한 건 분명 자신을 유혹하려 한 게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렇듯 자연스럽게 단둘이 되기까지 했으니!

‘이건 기회다.’

로한은 음험한 속내를 숨기고 샤를로트에게 다가갔다.

“레이디 노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발을 조금 접질린 것 빼곤 괜찮아요. 심하진 않으니 제 하녀를 불러주시겠어요? 부축해주신 건 고맙지만 이만 돌아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크흠, 하녀의 부축보다는 신사의 에스코트가 낫지 않겠습니까?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뇨, 저는-”

“사양하실 것 없습니다. 대신.”

로한은 그렇게 말하고는 큼큼, 몇 번 더 목을 가다듬고는 한껏 멋들어지게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그 보답으로 저와 교제해 주시겠습니까? 결혼을 전제로.”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저는 돌아가겠어요.”

“하하, 저희 사이에 그렇게 숨기실 것 없습니다. 레이디 노하께서 절 좋아하신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절 여기로 데려온 게 아닙니까?”

“대체 무슨……. 전 처음부터 혼자 가겠다고 했죠. 부축해주겠다고 한 건 당신이고.”

“그게 그 뜻 아닙니까? 우리가 분명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착각이겠죠. 당신의 일방적인.”

그제야 샤를로트의 표정이 로한의 시야에 들어왔다.

살짝 미간을 좁히고서 경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표정.

그 얼굴을 본 순간, 여태껏 해 온 분홍빛 망상들이 와장창 깨지며 친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왕왕 울렸다.

-디트리히 경은 그 악녀의 유혹에 당한 피해자일세!

-자네도 조심하게, 로한. 샤를로트 노하가 어떤 흉계를 꾸밀지 모르는 거 아닌가.

그 다음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당황해 손목을 잡은 것 같기도 하고, 샤를로트가 놓아달라고 하자 작은 실랑이가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기억나는 것은 오직.

짝!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려 보니, 붉어진 뺨을 한 샤를로트가 있다는 사실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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