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를 본 순간 짙은 낭패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사고가 그대로 정지된 까닭에, 샤를로트는 한 박자 늦게 기둥 뒤로 몸을 숨겨야 했다.
그러고도 정신을 채 차리지 못하고 몸을 크게 휘청이고 말았지만.
‘설마 나를 발견하진 않았겠지?’
설마.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찾아내진 못했으리라.
몸을 숨긴 샤를로트가 애써 스스로를 달래는 사이, 한창 허풍을 늘어놓던 로한이 의아한 시선을 했다.
“레이디 노하, 듣고 계십니까?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닌지…….”
“……확실히, 몸이 좋지 않네요. 괜찮으시다면 잠깐 안으로 들어가 쉬고 싶은데요.”
“아, 이런. 그렇다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뇨. 저 혼자-”
“몸이 좋지 않으신데 홀로 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저를 무뢰한으로 만드시렵니까?”
샤를로트는 잠시 갈등했다.
과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로한은 샤를로트에게 거만을 떨어 가며 필요 이상의 호의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경험상 이런 것에 엮여서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샤를로트는 로한과 말다툼을 할 정신도 없을 뿐더러 당장 자리를 떠야 하는 상황이었다.
‘괜히 거절했다가 소란이라도 일면 곤란해.’
어쩔 수 없지.
샤를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만 부탁할게요.”
“얼마든지요.”
그제야 언짢은 기색을 지운 로한이 샤를로트를 부축해 왔다.
로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복도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 샤를로트는 불안한 눈으로 연회장을 한번 바라보았다.
‘잠깐 몸을 피해있다가 마차로 가면 들킬 일은 없겠지.’
자리를 피할 수 있는 건 다행이지만, 걸을 때마다 발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넘어지면서 발을 접질린 모양인지.
‘오늘은 운이 나쁜데…….’
느닷없는 알폰소의 등장에 예기치 못한 부상까지.
전부 좋으니, 부디 오늘의 불운은 여기서 끝나기를.
샤를로트는 간절히 바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그로부터 조금 뒤.
“……노하의 마차는 있는데. 정작 샤를로트 노하는 없다, 라.”
“죄송합니다, 각하.”
알폰소가 느리게 중얼거리자, 옆에 서 있던 루드빅이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 됐다. 이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니고.”
알폰소가 손을 내저으며 시선을 연회장 쪽으로 돌렸다.
샤를로트가 확인한 대로, 알폰소가 알로이스 저택의 연회에 참석한 것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 상황은 알폰소가 충동적으로 저지른 극히 드문 경우에 해당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몇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세르주가 노하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온 직후.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그간 보낸 편지는 전해지지 않았고, 가주는 출타 상태라고.
알폰소의 말에, 세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노하의 아무도 만남에 응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군. 수고했다.
알폰소의 반응은 무미건조했다.
마벨 후작저에서 날카로웠던 샤를로트의 태도를 떠올리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만나기가 상당히 까다롭군.’
얼굴을 봐야 청혼한 이유에 대해 설명이라도 할 텐데.
며칠째 이렇게 기회를 주지 않으니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게다가 이 상황에 대해, 다른 기사들은 불만을 토로하며 저마다 인상을 쓰고 있기까지 했다.
-태도가 심히 오만방자합니다. 감히 에두아르트에게 보일 만한 태도로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애초에 저들이 먼저 청혼장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런 문전박대라니요!
-물론 각하께서 거절을 하긴 했지.
-그건 그거고, 아쉬운 건 저쪽 아니야?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다니!
성격이 불같은 아르노와 루드빅은 그렇다 치고.
그 성격 좋은 세르주와 과묵한 쟝-자크까지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알폰소가 샤를로트와 결혼하겠다고 결정한 이후 기사들은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다.
알폰소가 무슨 뜻이 있겠거니,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 모두가 그 결정에 의문을 표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런 와중에 세르주가 노하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왔다고 하니.
잔뜩 곤두선 그들의 신경이 끝내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장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인상을 쓰고 있는 모두의 앞에, 루드빅이 헛기침을 하고 나섰다.
“각하, 무례를 무릅쓰고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해라.”
“이 결혼을 진전시켜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편지는 읽어보지도 않았고, 세르주는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이제 명백해지지 않았습니까?”
노하에서 던진 청혼장은 그저 조롱일 뿐이었다는 것.
“노하에서는 지금쯤 에두아르트를 비웃고 있을 겁니다. 조롱으로 던진 청혼장에 거절한 건 언제고 이제 와서 매달리느냐면서요. 저는 영광된 에두아르트의 가신으로서 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루드빅의 말이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가운데,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만큼 모두가 그에게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는 뜻이다.
방에 누가 들어오는지도 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러니 청컨대 알려주십시오, 각하. 어째서 노하와 결혼을 결심하셨는지-”
“……뭐? 노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루드빅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지금 내가 들은 게 맞아? 노하, 노하라고? 그 노하?”
또각, 또각.
가까워지는 구두 소리에 루드빅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이 순간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서 있었다.
“화, 황녀 전하.”
소피아 루실라 주느비에브.
알폰소의 하나뿐인 사촌동생이자, 현 황제의 유일한 여동생.
그리고 노하라면 치를 떠는 사람 중 하나.
소피아가 우아하게 눈썹을 치켜세우고는 말했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그러자 알폰소의 굳은 시선이 소피아에게서 루드빅에게로 옮겨갔다.
‘빌어먹을, 신이시여. 왜 하필 지금.’
루드빅이 눈을 질끈 감고 신을 원망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
때마침 소피아가 에두아르트 공작저에 방문한 것은 저녁에 있을 라베루즈 가의 연회에 알폰소와 참석하기로 했던 일 때문이었다.
소피아는 미혼이고 약혼자도 없어서 늘 비슷한 처지인 사촌오빠 알폰소의 에스코트를 받아 연회에 가곤 했으니까.
물론 그것과 별개로 소피아가 에두아르트 공작저에 놀러오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황궁은 답답해. 물론 내겐 집이고, 그리울 것 많은 곳이기도 하지만 에두아르트가 더 편하다니까. 어릴 때 여기서 살아서 그런가.
이런 말을 해 가며 에두아르트 공작저에 드나드는 것은 사실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알폰소가 노하와 결혼하겠다고 밝힌 것은 언젠가 소피아의 귀에 들어갈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상황이 나빴다.
“오빠가 노하에 매달리고 있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지?”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샤를로트 노하에게 청혼했으니까.”
알폰소가 한숨을 내쉬고는 덤덤히 수긍하자, 소피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로 노하와 결혼하겠다는 이야기를 알폰소의 입에서 들을 줄은 몰랐던지.
“뭐? 오빠가 왜?”
“에두아르트의 일이다. 네게 사정을 설명할 일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오빠한테 더 물을 수 있는 건 없겠지. 하지만 이건 보통 사안이 아니잖아. 언제까지 숨기려고 했어?”
“결혼식 날짜가 잡힐 때까지.”
“참 빨리도 알려주려고 했네. 그런데 진도가 잘 안 나가는 모양이지? 내가 볼 땐 아마 영영 진척이 없을걸.”
소피아가 이죽거리자, 알폰소가 슬쩍 미간을 좁혔다.
“내 일이니 참견은 됐다.”
“참견하려는 게 아냐. 샤를로트 노하가 알로이스의 후계자와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사교계에 파다하던데?”
이어진 소피아의 말에 서류를 집어 들던 알폰소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뭐?”
“알로이스 경이 샤를로트 노하와 잘되어가고 있다고 사방에 얘기를 해뒀더라고. 알로이스 가의 연회에서 고백이라도 하려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어. 그게 진짜일지는 모르겠지만.”
귀족들의 교제는 대부분 절차 없이 이루어진다.
절차를 거칠수록 추문만 거세질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식으로 고백하겠다는 이야기는 곧 청혼이나 다름없는 셈.
굳어든 알폰소의 표정을 본 소피아가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알로이스의 후계자 본인이 그렇게 말한 거니까, 아예 헛소문은 아니겠지. 무엇보다 노하에서 알로이스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까, 어쩌면 그쪽과 진지하게 혼담이 오가는 걸 수도 있지 않겠어?”
“…….”
“그러니까 오빠는 괜히 노하에 매달릴 거 없이 다른 혼처를-”
“세르주.”
그리고, 알폰소의 말이 칼날 떨어지듯 뚝 떨어졌다.
“예, 각하.”
“알로이스의 연회가 언제지?”
“알로이스라면…… 오늘 저녁이군요. 초대장이 왔었습니다.”
“설마 알로이스에 가려는 거야, 오빠? 오늘은 나랑 라베루즈에 가기로 했잖아!”
“둘 다 가면 되지. 마침 너도 일찍 왔고.”
알폰소가 가볍게 대꾸하곤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 해가 기울고 있었다.
신속히 이동하면 밤이 너무 깊어지기 전에는 알로이스에 도착할 수 있을 터.
“오늘은 얼굴을 볼 수 있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