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정확히 말하자면 마벨 후작가와의 혼담이 파투 났던 날.
세르주를 비롯한 알폰소의 가장 친밀한 가신 넷은 한밤중에 촛불 하나를 두고 둘러앉았다.
그들이 그렇게 모인 이유는 물론 외로워서는 아니었다.
“각하께서 샤를로트 노하와 결혼하겠다고 하셨다.”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발단은 루드빅이 귀가한 직후, 때마침 연무장에서 땀을 빼고 들어가던 아르노가 그를 목격하고는 장난을 건 것이었다.
“뭐야, 루드빅? 표정이 왜 그래. 무슨 목 졸린 닭처럼. 연회 간다고 빼입더니 크라바트가 목을 너무 조이기라도 했냐?”
“아니…….”
“아니면 뭐, 설마 이번에도 파투가 난 건 아니겠지?”
“……파투, 났다.”
“……뭐? 뭐라고? 진짜? 아니, 왜? 진짜 마라도 꼈나?”
“이유는 각하만이 알고 계시겠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각하께서…… 노하와 결혼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아르노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싹 사라졌다.
루드빅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가문 땅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루드빅은 그런 아르노의 표정은 그를 알아왔던 십 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도,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장담했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에두아르트의 모두는 비상이 걸렸다.
덕분에 아닌 밤중에 촛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모두의 얼굴은 처참했다.
꼭 진흙이라도 잔뜩 머금은 듯한 얼굴.
아르노가 제 구불거리는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각하께서 노하와 결혼을 하시겠다니, 이게 말이 되냐?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던 거야?”
“마벨 후작저의 연회에 노하의 악녀가 참석했다고 들었습니다. 혹 각하께서 그녀와 운명적인 만남이라도 가진 게 아닙니까, 루드빅 경?”
“아니, 각하께서는 나와 계속 같이 계셨어. 그리고 샤를로트 노하, 그 여자와는 단 한 번도 말을 섞은 적이 없다. 단언할 수 있어.”
“그럼 대체 뭐가 원인이란 말입니까?”
쟝-자크의 물음에 모두가 입을 닫았다. 그리고 오랜 침묵 끝에, 세르주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각하께서 마벨 후작가와의 혼담까지 깨진 것 때문에…… 상심이 크셨던 건 아닐까?”
“…….”
“아니면 노하에게 뭔가 약점을 잡히셨다거나…….”
“…….”
“……알겠어…….”
그리고 아무도 그에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그 의견들은 암묵적으로 묵살되었다.
시무룩한 세르주를 뒤로한 채 침묵은 얼마간 더 이어졌다.
마침내 촛대에 쌓인 촛농의 높이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가 되었을 때, 쟝-자크가 입을 열었다.
“더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각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쟝!”
“쟝-자크입니다, 아르노 경.”
“그래, 쟝-자크. 너는 귀족도 아니고 이제 갓 성인이 되었으니 모르겠지만-”
“귀족이 아니고 성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더라도 확실히 아는 건 있습니다. 루드빅 경.”
쟝-자크는 침엽수림의 새벽을 연상케 하는 특유의 과묵함으로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이내 이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 각하의 명을 따르지 않을 분이 계십니까?”
“……그건 없지.”
“아무래도.”
“그렇다면 더더욱 이런 논의가 의미 없는 일이 아닙니까.”
말은 짧았지만, 쟝-자크의 말은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저는 각하의 뜻을 따를 겁니다.”
“……하긴, 쟝 말이 맞지. 각하께서 어련히 생각이 있어서 하시는 일일 텐데.”
“농담을 하는 성격도 아니시고.”
“그래도…… 난 도저히 모르겠다. 이걸 그냥 둬야 하나?”
“안 두면 네가 뭘 어쩔 건데, 루드빅? 우린 기껏해야 가신들 아니냐.”
알폰소가 이끄는 전장에 있을 때도, 에두아르트 공작저에 있을 때도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같았다.
“까라면 깔 수밖에.”
그날 촛불이 꺼지고 에두아르트의 가장 긴밀한 가신들은 암묵적인 합의를 하나 했다.
‘각하의 결정에 왈가왈부하지 말 것.’
‘그러나 노하와의 결혼이 영 부당해 보인다면 직언을 참지 않기.’
‘정말로 각하께서 노하에게 약점을 잡히셨을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은 세르주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 어쨌든.
덕분에 에두아르트는 폭풍전야 같은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서로 이렇다 할 불평은 토하지 못하고 알폰소의 눈치만 보고 있을 뿐.
하지만 이쯤 되니 세르주는 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알폰소가 아무 생각 없이 노하와의 결혼을 결심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모두가 안다.
하지만 알폰소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고, 노하는 묵묵부답.
‘어쩌면 노하가 청혼한 것은 그저 에두아르트에 대한 조롱이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이건 또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
세르주는 한숨을 내쉬며 노하 저택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그 모습을 저택 안쪽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로.
* * *
정문 너머에 오래도록 서 있던 에두아르트의 마차가 떠났다.
그제야 샤를로트는 창의 커튼을 치며 몸을 틀었다.
‘이제 됐겠지.’
조금 전 풋맨과 옥신각신했던 남자는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알폰소의 부관, 세르주 마샬.
그는 인정 많고 일머리가 빠릿빠릿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샤를로트와 썩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기실 알폰소의 가신들 모두와 그랬지만.
-……각하의 장례 말입니까? 그건 어제 자로 끝났습니다. 노하로 가서 내내 얼굴도 비치지 않던 분이 대체 무슨 염치로 그걸 물어보시는 겁니까?
얼마나 울었는지 벌겋게 된 눈으로 증오 가득한 시선을 보내던 세르주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낯선 얼굴이었다.
결혼 직후, 에두아르트의 다른 가신들이 샤를로트를 경멸하며 무시로 일관할 때도 세르주만은 늘 그녀를 웃는 낯으로 대했으니까.
-제가 부인께 예를 갖추는 건 어디까지나 각하에 대한 예우 때문이지, 당신에 대한 존중 때문이 아닙니다.
그랬던 세르주도 알폰소의 죽음 이후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샤를로트는 퀸시와 대면한 직후 분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일주일간 노하를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알폰소의 죽음으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났다는 것도, 일주일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울다 잠들기를 반복했다는 것도 하녀들의 입을 통해 알았다.
그 직후 달려왔지만 이미 장례식은 끝난 이후.
자존심 강한 샤를로트가 자신이 일주일이나 쓰러져 있었다는 것을 외부에 알렸을 리 없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 그녀가 어떻게 보였을지는 자명했다.
‘남편이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친정으로 달려가 장례식에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은 여자.’
심지어 알폰소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배후로 노하가 공공연하게 지목되는 상황이었으니.
세르주가 샤를로트를 증오 어린 눈길로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이였더라면 이런 상황에 울었을까.
그러나 샤를로트는 자신을 향한 증오와 경멸, 오해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노하의 악녀라는 이름은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하여 그녀는 가신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매장 직전인 알폰소의 시신을 얼렸다.
-당신은 미쳤습니다, 부인.
늘 친절하던 세르주마저 샤를로트에게 경멸과 비난을 숨기지 않았지만, 달리 상처는 없었다.
단지 그 순간 자신이 정말로 혼자 남았다는 것만이 시리게 다가왔을 뿐.
‘우스운 일이지.’
제게 웃어 주던 마지막 사람이 사라지자 그제야 제 발밑이 한 뼘이라는 것을 깨닫다니.
일평생 기대 온 노하와 퀸시는 제 손으로 끊어냈다.
자신을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제 모욕은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도리 없이 올곧았던 남편은 죽었다.
그나마 예를 차려 웃어 주던 사람마저도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은 기댈 곳 없는 절벽뿐.
자신이 그동안 저지른 죄악이 송곳이 되어 내장을 꿰뚫는데, 도망갈 곳도 이제 더는 없었다.
‘……그게 악녀에게 어울리는 말로겠지.’
과거를 후회하며 끔찍한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죽는 것.
그러니 알폰소는 샤를로트와 엮여서는 안 되었다.
썩은 땅에 씨앗을 심는 멍청이가 어디 있다고.
‘이제 알폰소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어.’
식을 진행하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한 달여 남짓이 남았다.
그러니 알폰소가 무슨 의도로 자신과의 결혼을 원했는지는 몰라도, 이제는 그에게도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리라.
‘어쩔 수 없이 아델린과의 혼담을 추진하겠지.’
아주 좋다.
샤를로트는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걸음을 뗐다.
마음 같아서는 알폰소와 아델린이 결혼을 발표할 때까지 저택에 틀어박혀 있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샤를로트에게는 처리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남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오늘 밤 외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이건 알폰소랑 엮일 일이 조금도 없는 건이니까.’
큰 문제는 없겠지.
샤를로트는 방을 지나다, 거울을 보곤 문득 멈추어 섰다.
거울 속 여자가 슬퍼 보여 입꼬리를 올려 주었다.
그제야 한결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