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에두아르트 공작이 너와의 혼담을 원한다는 거지. 너는 원하지 않고.”
“그래. 그리고 그 사실이 아버지 귀에 들어가지 않게 도와줘.”
샤를로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러나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흑발의 사내, 퀸시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을 뿐.
마주 앉은 이들 모두 지독히도 냉담해 보이는 것이 꼭 거푸집에서 빼낸 것처럼 닮아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샤를로트 쪽이 조금 더 불편한 기색을 띠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퀸시에게 손을 벌리는 짓 따위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퀸시 노하.
노하의 소가주이자 도미닉의 유일한 적자.
그리고 샤를로트가 유일하게 아낀 그녀의 이복오빠.
샤를로트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 도미닉의 오른편 식탁 자리는 늘 퀸시의 것이었다.
샤를로트가 식탁의 끄트머리에서 도미닉의 바로 왼편으로 오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던 것을 생각한다면 적잖이 놀라운 일이다.
물론 그건 퀸시가 도미닉의 유일한 적자이자, 첫째 아들인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하에는 고작 나이와 신분으로 순위를 결정짓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퀸시가 늘 도미닉의 오른편을 놓치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노하의 가장 뛰어난 종자니까.’
도미닉이 정부에게서 본 아이를 몇이고 데려와도 퀸시만큼 노하와 잘 어울리는 이는 없었다.
그 명석함과 교활함, 비정함.
노하에 대한 맹목까지도.
세간에서는 샤를로트를 두고 교활하고 비정하다며 같은 수식어를 붙이지만, 샤를로트 본인은 알고 있었다.
‘내 모든 건 퀸시에게서 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퀸시 본인이 샤를로트를 지독하게 아꼈던 까닭이다.
비정을 미덕으로 삼는 가풍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결국 그렇게 많던 도미닉의 자식들 중 노하에 남은 것은 퀸시와 샤를로트 둘뿐인 것을.
퀸시는 늘 샤를로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이들과 어울리려 하지 마라, 샤를로트. 우리를 이해해줄 수 있는 건 우리뿐이야.
-노하가 아닌 이들에게 마음을 주어 봐야 우리를 경시하고 배신하려 들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달라, 샤를로트. 우리는 서로를 배신할 필요가 없지. 가족이잖니.
-오직 나만이 너를 진심으로 아낄 거다.
달콤한 주박과도 같은 말들.
‘아마 알폰소의 죽음이 아니었더라면, 여전히 그 말을 맹신하고 있었겠지.’
여전히 퀸시를 하나뿐인 피붙이이자 이해자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샤를로트 또한 알고 있다.
‘퀸시와 나는 달라.’
그들에게는 이해를 좁힐 수 없는 구간이 있었다.
그러니 퀸시가 했던 말들은 그저 기만일 뿐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만약 퀸시가 본인의 말마따나 진심으로 자신을 아꼈더라면…….
알폰소는 죽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 따지자면 아낀 건 맞겠지.’
도미닉이 샤를로트에게 알폰소와 결혼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반발해 준 것도 퀸시 하나뿐이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퀸시는 샤를로트를 위했다.
단 하나.
가문에 이득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아니나 다를까.
샤를로트와 똑 닮은 퀸시의 녹색 눈동자가 곤란한 빛을 띠었다.
“샤를로트.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니? 에두아르트 공작과의 결혼은 노하에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걸 하겠다고 한 건 너였지.”
“내켜서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오빠도 알잖아. 적당히 훼방을 놓고 손을 뗄 생각이었어.”
“그리고 그 잔꾀가 통하지 않을 상황이 되자 나한테 손을 벌렸고. 샤를.”
퀸시가 눈을 내리감으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런 어리광은 내키지 않는다고 분명 말했을 텐데……. 그새 잊은 건 아닐 테고.”
“……퀸시. 하나뿐인 동생이 원치 않는 결혼을 했으면 좋겠어?”
“결혼이 그렇게 대수로운 것도 아닌데 유난이구나. 정 혼처가 마음에 들지 않거든 재취 자리를 알아봐 주면 될 거 아니니.”
“내 남편을 죽이고 재혼하라고?”
“그게 가장 간편하지.”
그래. 여기서부터 그들은 이해관계를 좁힐 수 없다.
샤를로트가 유쾌한 농담을 들었다는 것처럼 가볍게 웃었다.
“그럼 이제 악녀라는 말도 모자라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는 말도 듣겠네.”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니. 벌레들의 삿대질 따위.”
퀸시가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네겐 내가, 그리고 노하가 있는데.”
“……그래, 그렇지.”
너는 늘 그랬지.
그 말을 믿고 그게 전부라고 믿으며 살았더니, 내 가문이 내 사랑을 죽이는 꼴도 목도해야 했었지.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언젠가 퀸시에게 처음으로 가문의 명령을 따르기 싫다고 했던 때가 떠올랐다.
-퀸시. 이번 일, 꼭 해야 해? 그 살롱에서 도난 사건이 있었던 거 오빠도 알지. 다들 내가 범인이라고 생각해. 내가 악녀라서. 여기서 발을 빼지 않으면 다들 내가 정말 그런 줄 알 텐데-
-지금 어리광을 부리는 거니, 샤를로트?
-아니, 어리광이 아니라…… 이런 악명을 굳이 더 늘려서 좋을 건 없잖아.
-왜? 아주 좋은데. 그깟 오해 좀 사고 목표를 완수할 수 있다면 해야지. 안 그러니?
샤를로트는 말하고 싶었다. 그 살롱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인간말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본다고.
그 사실에 자존심이 짓밟혀서 당장 그치들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싶었다가도, 그 오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기에 비참함만 뒤집어쓰게 된다고.
-이번 일로 널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면 뺨을 쳐. 네게 삿대질을 하는 자가 있다면 손가락을 잘라라. 그럼 되지 않니? 고작 이런 일로 우는 소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퀸시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샤를로트는 차마 대꾸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었고.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물러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네가 내 말을 이해했다니 다행이구나, 샤를로트. 그럼 이 이야기는 없던 일로-”
“퀸시. 오빠가 아버지께 드렸던 차 말이야.”
샤를로트가 퀸시의 말을 끊자, 사내의 낯이 미묘하게 굳어들었다.
“아버지가 그 차만 마시면 속이 불편하던 게 사라진다고 애용하시잖아. 알지?”
“……샤를로트.”
“오빠가 거기에 뭘 섞어놨는지 알아. 은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그만.”
퀸시가 다급히 샤를로트의 말을 잘랐다.
샤를로트에게는 늘 다정한 모습을 고수하던 퀸시의 낯은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안 거지?”
“방법이 있지.”
그것은 과거 도미닉이 죽은 후에 우연히 알게 된 비밀이었다.
-퀸시, 전에 아버지가 드시던 차 말이야. 남은 거 있으면 좀 가져가도 돼? 요즘 속이 불편해서 나도 마셔볼까 싶더라고.
-아니, 다른 약재를 줄 테니 그걸 가져가렴.
-왜? 약재는 써서 별로 내키지 않는데.
-거기에는 독이 들었거든.
-……뭐?
샤를로트가 충격을 감추지 못한 낯으로 퀸시를 바라보았지만, 퀸시는 다정하게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얼마 전에 들어온 좋은 약재가 있어. 내줄 테니 가져가.
라고 말하며.
‘아마 아버지가 죽은 이후이니 숨길 이유도 없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겠지.’
적어도 샤를로트가 시간을 되돌아갈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
샤를로트는 드물게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는 퀸시에게 빙긋 미소 지어 주었다.
“걱정하지 마, 퀸시. 오빠가 하는 행동을 방해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날 돕지 않는다면 그땐 이야기가 다르겠지.
“날 도와줄 거지? 우린 가족이잖아.”
* * *
“노하의 가주님께서는 가문의 일로 저택을 비우셨습니다. 당분간은 계시지 않을 테니 용건이 있으시거든 먼저 편지를 보내 약속을 잡고 찾아와 주십시오.”
노하의 풋맨에게서 잘 만들어진 기계장치처럼 몇 번째 같은 말이 돌아왔다.
결국 에두아르트에서 창해와 같은 인내심을 자랑한다는 알폰소의 부관, 세르주마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에두아르트에서 노하의 가주께 편지를 수차례 보냈다고 하지 않나? 도무지 답장이 오지 않아 직접 방문한 참이라고. 정 가주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다른 분이라도 만나 뵐 수 있게 해 주게!”
“죄송하지만 선약이 없으시다면 만나실 수 없습니다.”
“그럼 말이라도 전해 줄 수 없겠나? 선약을 잡아 달라고-”
“몸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쾅.
세르주의 면전에서 대문이 굳게 걸어 잠겼다.
놀랍도록 차가운, 글자 그대로의 문전박대.
황당한지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던 세르주의 입에서 억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데도 정말 노하와 결혼을 하셔야겠습니까…….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