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트를 가까이에서 본 첫인상은 명료했다.
‘초상화보다 미인이군.’
사감 없는 담백한 평가였다.
확실한 것은, 그 순간 알폰소가 어째서 세간이 노하의 악녀를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동경하는지 알 것 같았다는 사실이다.
샤를로트에게는 단순히 아름다운 외모와 별개로 시선을 사로잡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원인은 알 수 없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적발 때문일까.
아니면 세상 모든 것을 멸시하는 듯한 저 차가운 표정 때문일까.
‘멜리아를 상대하는 동안 내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지.’
샤를로트가 연회장에서 생긋생긋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것을 생각하면 아주 딴판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저 냉랭한 표정이 오히려 그녀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느껴지는 것은.
‘교활한 인간치고는 악의가 없기 때문인가.’
하지만 그뿐이었더라면 알폰소는 샤를로트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로 몸을 돌려,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연회장으로 돌아갔겠지.
처음부터 알폰소의 목적은 샤를로트가 그간 혼담을 훼방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샤를로트는 알폰소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상이었다.
‘교활한 인간은 필히 자멸한다.’
이기적인 사람이 혼자 자멸하고, 악의에 찬 사람은 자신 외에 꼭 한 명을 더 데리고 추락하는 반면.
교활한 사람은 주변을 전부 끌어안고 자멸한다는 점에서 특히 질이 나빴다.
그런 인간과는 아예 상종하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하여 알폰소는 샤를로트와 엮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샤를로트와 멜리아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걸 듣기 전까지는.
“저,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나요? 협박도, 아무것도요?”
“그래요. 한 번만 더 물어보면 협박을 바란다는 뜻으로 알아듣겠어요.”
“그, 그게 아니라……. 나중에 레이디 노하께서 말을 바꾸실지도 모르니까요. 제게는 중요한 문제예요. 왜 혼담을 취소하는 것만 원하신 거죠?”
그렇게 말하는 멜리아의 눈빛은 결연했다.
설령 여기서 뺨을 맞더라도 들을 건 들어야겠다는 의지가 보일 정도였으니까.
샤를로트 역시 그 시선에 담긴 결의를 느꼈던지, 조금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히 얘기해줄 수는 없지만, 사랑 때문이라고 해 두죠.”
그 말에 멜리아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사랑……이요?”
“왜요, 나는 누굴 사랑하면 안 되나요?”
“아, 아뇨! 그냥, 레이디 노하께서 사랑하는 분은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요.”
“좋은 사람이에요.”
샤를로트의 대답은 짧았으나, 음성은 전에 없이 부드러웠다.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본인이 목련 꽃잎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것을.
“많이 무르고, 천성이 다정한 사람. 나랑은 닮은 게 하나도 없는 사람…….”
향수병에 걸린 사람이 고향을 이야기하듯 샤를로트의 음성에는 애틋함이 섞여 있었다.
어쩌면 그 낯에 걸린 희미한 미소 탓에 더욱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레이디 노하께서는 그분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많이 좋아하죠.”
“그런데, 사랑하는 분이 있는데 혼담은 왜……?”
“가문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어요. 가문의 명령은 절대적이거든요.”
이제 궁금한 건 전부 해결되었느냐며, 샤를로트가 다시 차가운 낯을 했다.
찰나 애틋한 얼굴을 했던 것이 꼭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나 우습게도 그 찰나가 알폰소의 마음을 바꿔 놓았다.
하지만…….
“……미움받았을지도 모르겠군.”
알폰소의 혼잣말에, 마차로 향하던 루드빅이 고개를 갸웃했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별말 안 했다.”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돌아가면 아르노가 또 한바탕 웃겠군요.”
“그런다고 해도 별수 없지. 차인 걸 차이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고. 됐으니 네 번째 혼담 진행이나 준비시켜라.”
알폰소가 무심하게 대꾸하며 마차에 올랐다.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순서대로 진행하라고 전할까요?”
“아니, 염두에 둔 상대가 있다.”
“각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또 처음이군요. 누군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샤를로트 노하.”
대답이 끝나자마자 텅, 마차의 문이 매몰차게 닫혔다.
“아, 좋은 분…… 아니, 잠깐만요. 각하? 제가 맞게 들은 겁니까?”
“시끄럽다. 출발해.”
“노하라니, 노하라니요! 진심이십니까? 각하?! 각하!”
루드빅이 다급하게 마차의 문을 두드려 댔지만, 알폰소는 이미 눈을 감아 버린 뒤.
대답 없는 루드빅의 부르짖음만이 애처롭게 밤 아래 울려 퍼졌다.
* * *
달이 높게 뜬 시각.
저택으로 돌아온 샤를로트는 문에 몸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아 여전히 불편한 차림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것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 저택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르겠어.’
이유는 당연히 알폰소가 불쑥 건넨 청혼 때문이었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레이디 노하.”
그 말의 의미를 자각하는 순간 사고가 굳는 것 같았다.
아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처음 자신을 부르는 알폰소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높은 파도를 맞닥뜨린 것 같았다면, 이번에는 깎아지른 절벽의 끄트머리에 선 기분.
도저히 표정을 구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성을 재단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나갔다.
“……이런 농담은 불쾌하군요.”
“유감스럽게도 농담은 안 합니다. 다들 내게 소질이 없다고 하기에.”
알고 있다. 나도 같은 말을 당신에게 한 적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이야기를 나눌 이유가 없겠군요. 당신은 노하에서 보낸 청혼을 이미 거절했잖아요.”
“그랬더니 누구 손에 혼담이 줄줄이 파투 나던데. 그럴 바엔 그냥 청혼을 받아들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불쾌했다면 사과할게요. 앞으로는 방해하지 않을 거예요.”
“탓하는 게 아닙니다. 가문의 명령은 절대적이라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습니까?
이어진 알폰소의 말에, 태엽 풀린 오르골처럼 줄줄이 말을 뱉던 샤를로트의 입술이 뚝 멈추었다.
굳이 캐묻지 않아도 멜리아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정말 모든 걸 들었군요.”
“다음부터는 주위를 조금 더 살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폰소는 부정조차 없이 충고했다.
덕분에 그간 잊고 있었던 알폰소의 면모들이 샤를로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맞아, 생각보다 뻔뻔한 사람이었지.’
놀라울 만큼 정직하게 구는 모습이 워낙 익숙해서 잊고 있었는데, 이 남자는 뼛속까지 귀족이었다.
또한 언제나 우위를 점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
워낙 예의 바른 사람이라 잘 드러나진 않지만, 필요에 따라 그가 뻔뻔해지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알폰소와 더 대화를 나눈다면 말려들어가기만 할 것이다.
“무례하군요. 이야기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겠으니 그만 가 보죠. 더는 당신의 혼담을 방해할 일도 없을 거예요.”
샤를로트는 끝까지 인상을 펴지 않은 채로 도망치듯 자리를 떠 버렸다.
도망이라니.
그녀가 살아온 시간 중 등장한 것이 열 번이나 채 될까 싶은 단어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도망 외에는 달리 떠올릴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알폰소는 농담 같은 걸 하는 성격이 아니야.’
홧김에, 욱해서, 충동적으로 같은 말과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굳이 재고해 볼 것도 없이 그 청혼은 진심일 터.
샤를로트에게는 충격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알폰소가 나와 결혼해 불행해지는 것은 한 번이면 충분해.’
이번에도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기껏 목숨을 바쳐 시간을 되돌린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알폰소가 자신과의 결혼을 원한다는 사실은 아직 노하에 알려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후원에서 은밀하게 나누어진 청혼이었으므로.
‘이 사실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면 끝장이다.’
현재의 샤를로트는 도미닉을 거역할 수 없었다.
알폰소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도 못하고 죽을 수는 없었으니까.
적어도 노하 안에서만큼은, 샤를로트는 무력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어.’
그녀는 어느 방 문 앞에 멈추어 서서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머잖아 어둠이 갈리고 문이 열렸다.
“이 밤에 날 찾아오다니, 샤를로트.”
그렇게 드러난 것은 아주 친숙하고도 증오스러운 얼굴이었다.
늘 친애의 빛을 띠고 샤를로트를 보던 그녀의 이복오빠, 퀸시 노하.
알폰소의 죽음을 따져 묻던 순간에도 그는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노라면 구더기가 배 속에 들끓는 기분이 되고 말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퀸시. 잠깐 얘기 좀 해.”
샤를로트는 독배를 삼키는 기분으로 말문을 텄다.
이 독에 자신이 죽으면 분명 알폰소가 기뻐하리라.
연금술사가 건넨 약을 들이켜던 순간 했던 생각을 곱씹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