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다.’
분명 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가슴 안쪽이 벅찬데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저 한여름에 눈발을 마주한 것처럼 바라보게 될 뿐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야.’
꿈이 아니다.
그 사실이 지나치게 생경했다.
시선이 길어지자 알폰소의 낯이 샤를로트가 기억하던 것과 비슷해졌다.
미간을 찌푸린 것이다.
“여전히 기억을 되짚고 있는 겁니까?”
“……네, 아무리 봐도 초면 같아서요.”
“은발이 흔한 머리 색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적발 또한 흔한 머리 색은 아니죠. 용건이 없다면 이만-”
“청혼장을 보란 듯 던지고 내 혼담을 파투 내고 다니면서, 정작 장본인은 무시하는 겁니까?”
알폰소의 미간이 조금 더 좁혀들었다.
“날 알잖습니까.”
“분명 모른다고 말했을 텐데요.”
“당신이 비비안, 아니, 멜리아와 나눈 이야기를 전부 들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샤를로트의 입매가 일자로 굳어졌다.
“……전부요?”
“처음부터 전부. 그러니 더는 발뺌할 생각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이런.
샤를로트가 짧게 혀를 찼다.
“그걸 전부 보면서 침묵을 지킬 수 있었다니 대단하네요.”
“물론 놀랐습니다. 마벨 후작이 날 속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놀라지 않을 수 있나.
알폰소 역시 비비안의 정체를 알고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그것보다 놀라운 것은 눈앞의 여자가 얼마나 교활한 인간인지에 대해서였다.
“저무는 겨울, 목련의 기도 위로 날리는 눈발. 얼어붙은 백색 포말이 나비의 먹이로 화하는 시간.”
알폰소의 나직한 목소리가 시구를 낭송했다.
조금 전 샤를로트가 멜리아의 앞에서 낭송했던 것과 같은 시구였다.
하지만 그건 샤를로트의 말처럼, ‘계절의 수사학’의 첫 시구는 아니었다.
“이건 누호프의 시구입니다. 당신도 알고 있었겠지만.”
“……하녀는 속여도 공작을 속이는 건 아무래도 역부족이겠죠.”
“거짓을 말하는 데 능숙하던데. 당신의 교활함에 감탄했습니다.”
“그건 칭찬인가요?”
“비꼬는 것처럼 들렸습니까?”
“그랬다면 묻지 않았겠죠.”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이 비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물어보았다.
“칭찬이라면 칭찬입니다. 당신이 그 시구를 읊지 않았더라면 그 하녀는 분명 잡아떼려 했을 테니까.”
알폰소가 본 것은 단편적인 상황뿐이었으나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샤를로트가 얼마나 상황을 주무르는 데 통달해 있는지.
그녀는 다른 부분들에서도 멜리아를 궁지로 몰아갔지만, 결정적인 것은 샤를로트가 읊은 그 시구 한 줄이었다.
그 시구를 듣는 순간 아무것도 모르는 멜리아는 분명 더는 발뺌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을 테니까.
“나는 올리비에 백작가, 그리고 오뷔니 또한 당신의 행각일 거라 확신합니다.”
“아니라고 말해도 믿지 않겠죠?”
“당신이 내가 오기 바로 직전에 초대도 받지 않은 올리비에 백작저를 다녀가고. 무명 향수 가게의 향수를 굳이 사서 하필 이 시기에 유행시킨 것을 정말 우연이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그래요, 내가 했어요.”
결국 이번에 시인해야 하는 것은 샤를로트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낯에 낭패감은 없었다.
오히려 몇 마디 대화를 나누자 샤를로트의 태도는 보다 자연스러워진 상태였다.
기억 속 알폰소와 눈앞의 남자 사이의 차이가 점점 도드라진 덕분이었다.
‘이 사람은…… 정말 나를 몰라.’
그는 샤를로트 때문에 불행해지지 않았고, 그녀를 끔찍하게 싫어하지도 않았다.
백지나 다름없는 사람.
정말 다행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전부 끝났으니까.’
그녀가 여태 혼담을 방해해 온 일을 알폰소가 알았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지 않나.
이런 상황에서 알폰소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더는 혼담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겠지.’
혹은 방해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라거나.
그러면 샤를로트는 그러겠다고 하고 유유히 빠져주기만 하면 된다.
아니나 다를까.
“몰랐다면 모를까, 당신이 여태 내 혼담을 방해해 온 것을 알고도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지십시오.”
이어진 알폰소의 말에 샤를로트는 속으로 픽 웃고 말았다.
참 예상하기 쉬운 사람이라니까.
“그렇게 할게요. 내가 뭘 하면 되죠?”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당신도, 당신의 가문도 원하던 일일 테니.”
알폰소는 그렇게 말하고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레이디 노하.”
샤를로트의 야심찬 계획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 * *
“각하, 여기 계셨습니까!”
후원에 홀로 서 있던 알폰소가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틀었다.
시선을 돌리자 긴박한 얼굴로 달려오는 루드빅의 모습이 보였다.
“급한 소식이 생겼습니다. 각하께서 자리를 지키라고 하셨는데, 워낙 시급한 사안이라 어쩔 수 없이-”
“마벨 후작 측에서 혼담을 취소하는 거라면 이미 알고 있다.”
알폰소의 말에 루드빅의 눈이 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혹시 마벨 후작과 미리 이야기를 나누셨던 겁니까?”
“그건 아니다만, 우연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알고 계셨다면 다행이지만…… 대체 결혼 발표 직전에 혼담을 취소하는 게 어디 있답니까? 결혼을 서두른 건 마벨 후작 본인이면서 갑자기 이렇게 발을 빼다니요!”
“들은 바로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너무 열 내지 마라.”
“각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뭐라고 더 하겠습니까마는, 이쯤 되니 아르노의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군요.”
아르노는 알폰소의 혼담이 깨졌다는 소식에 가장 격렬하게 웃어댔던 곱슬머리 기사의 이름이었다.
그가 한 말이라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마가 꼈다는 소리 말인가?”
“……예. 삿된 발언이지만, 정말 뭔가 있는 것 아닙니까? 벌써 세 번이나 혼담이 깨지다니요.”
뭐가 있긴 했다.
마가 아니라 사람이 낀 경우였지만.
“네 번째 혼담은 제발 무사히 진행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사할 거다.”
알폰소가 무심하게 대꾸하며, 조금 전까지 이 자리에 있던 이를 허공 위로 덧그렸다.
붉은 머리칼에 차가운 표정이 인상적이던.
제 혼담을 죄 망쳐 놓은 주제에 청혼을 받자 대놓고 인상을 와락 구겼던 여자.
샤를로트 노하.
“……나도 네 번씩이나 청혼을 거절당할 생각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