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회장에서 영애들이 두셋씩 짝을 지어 돌아다니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휴게실을 가든 산책을 하든, 하녀를 데리고 혼자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사교적으로 보이니 당연하다.
그러니 얼핏 보자면 그리 수상할 만한 장면은 분명 아니었지만…….
“……루드빅.”
“예, 각하.”
“잠깐 자리를 지키고 있어라. 다녀올 곳이 생겼다.”
알폰소는 도저히 그 장면을 무시할 수 없었다.
* * *
“이 정도면 근처에 사람이 없겠군요.”
마벨 후작저의 후원 안쪽,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한 샤를로트가 몸을 빙글 틀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가볍게 휘어졌다 차르르 떨어지는 드레스가 우아했다.
다른 이였더라면 샤를로트 노하가 누구인지, 그 악명조차 잊고 기품에 감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샤를로트의 앞에 선 여자, 비비안 마벨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가슴 앞으로 꾹 쥔 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곳까지 날 데려왔으면 이제 그만 목적을 밝혀요. 내게 그런 말을 한 의도가 뭐죠?”
“……장소가 바뀌었다고 너무 적대하는 게 아닌가. 우리 조금 전까지 사이좋게 이야기 나누지 않았나요? 비비안 마벨. 난 우리가 제법 즐거운 대화를 했다고 생각했는데요.”
“상대가 당신만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즐거운 대화였겠죠, 레이디 노하.”
“아, 내가 그 유명한 노하의 악녀라서 충분히 즐길 수가 없었다는 뜻인가요?”
샤를로트의 반문에 비비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은 긍정이기도 했고, 부정이기도 했다.
샤를로트의 말마따나 오늘 그녀는 연회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그 유명한 노하의 악녀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조금 긴장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유쾌했지.’
샤를로트의 화술은 뛰어났다. 그녀는 자신을 경계하는 이들 사이에 끼어서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심지어는 즐거운 분위기를 주도하기도 했다.
샤를로트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점점 우호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시시각각 느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레이디 노하께서는 정말 유쾌하시네요. 화술을 본받고 싶을 정도예요.
-과찬이세요. 그리 뛰어날 것도 없는데. 어쩌면 제가 평소 가까이한 시집들이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시집이라니, 레이디 노하의 추천 목록이 궁금한데요.
-대단할 것도 없지만 궁금하다니 알려드리지 못할 이유가 없죠.
샤를로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유명한 시집 서너 권을 읊었다.
-그리고 ‘계절의 수사학’. 이것도 좋아해요.
-들어본 적이 없는 제목인데, 혹시 신인의 작품인가요?
-아, 맞아요. 유명하지 않죠. 하지만 분명 여러분도 좋아하실 거예요.
그래, 분명 그때까지는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이 이후가 문제였다.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지던 도중, 샤를로트가 떨어트린 손수건을 주워 들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때.
-네 비밀을 모두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면 따라 나와.
오직 바로 곁에 앉아 있던 비비안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
만약 그 말을 한 게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아마 무시했을 것이다.
무슨 소리냐며 오히려 잡아뗐겠지.
하지만.
‘상대가 샤를로트 노하라니.’
샤를로트와 노하가 저질러 온 패악에 대해서는 이미 숱하게 들어 왔었다.
샤를로트의 패악에 대적하려 했다가 두 뺨이 퉁퉁 붓고 머리가 엉망이 되도록 얻어맞은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러고도 결국 꼬리를 내리고 백기를 흔들었다고.
‘설마 그 비밀을 알아차렸을 리 없어.’
적당히 잡아떼고 돌아가면 될 일이야.
비비안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곤, 도로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당신과 대적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레이디 노하. 당신이 뭘 알고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오해-”
“오해?”
가볍게 웃은 샤를로트가 시니컬하게 말을 이었다.
“뭐가 오해라는 건가요? 당신이 진짜 비비안이 아니라는 게? 당신의 하녀 행세를 하고 있는 게 진짜 비비안이라는 것도?”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내가 비비안 마벨이 아닐 리가 없잖아요. 내 하녀는-”
“멜리아 루헨. 어릴 때부터 레이디 마벨과 쌍둥이처럼 자랐다는 하녀. 아까 봤어요. 당신과 체형도, 인상착의도 거의 같더군요.”
둘 모두 갈색 머리칼에, 한 명이 조금 더 오렌지빛을 띤다는 것 말고는 차이가 없었다.
샤를로트의 말이 이어질수록 상대방의 낯빛은 점차 눈에 띄게 질려 갔다.
“설마 그거 하나 때문에 날 비비안이 아니라고 몰아가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당연히 확인해봤죠.”
계절의 수사학.
그것은 사실 시집의 제목이 아니었다.
“당신은 본인이 비비안이라고 주장하면서, 비비안이 5년 전 살롱에서 발표한 시의 제목도 모르나 보군요.”
“……!”
“나는 기억해요. 그 자리에 있었거든요. 첫 시구가 어떻게 되는지도 기억하죠. 당신은 말할 수 있나요?”
“나, 나는…….”
“저무는 겨울, 목련의 기도 위로 날리는 눈발. 얼어붙은 백색 포말이 나비의 먹이로 화하는 시간.”
노래하듯 시구를 낭송한 샤를로트가 슬쩍 눈썹을 들어올렸다.
“이 뒤에 이어지는 시구를 읊을 수 있겠어요?”
“그, 그건…….”
“비비안 본인도 아닌 당신이 이 시를 기억할 턱이 없겠죠, 멜리아. 안 그래요?”
“어, 어떻, 어떻게…….”
비비안, 아니, 멜리아는 완전히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어떻게든 잡아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꼼짝없이 걸릴 줄이야.
‘……생각하는 게 뻔하네.’
비비안은 여태 외부 활동이 손에 꼽게 적었으니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겠지.
샤를로트는 그런 멜리아를 감흥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아니면 알아볼 사람도 없었을 테지만…….’
사실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샤를로트 또한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그녀가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그들의 정체가 아니었으니까.
샤를로트가 비비안 마벨을 조사해 보았을 때.
-비비안의 하녀 이름이 멜리아 루헨이라고? 그 대문호?
그녀는 3년 뒤 혜성처럼 문학계에 명성을 떨치게 될 이름을 발견했다.
그리고 비비안이 5년 전 살롱에서 발표한 시와 자신이 기억하는 멜리아 루헨의 글이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몹시 유사하다는 것도.
‘그래서 비비안의 시를 혹시 멜리아가 써 준 건 아닐까 싶어서 던져 봤는데.’
설마 멜리아와 비비안이 서로 신분을 바꾸고 있었을 줄이야.
비비안이 미래의 대문호, 멜리아 루헨이었던 것이다.
상상 이상의 월척이었다.
“그렇잖아도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조사한 바로 비비안 마벨은 사교활동이 손에 꼽을 정도로 내성적인 사람인데, 정작 내가 만난 비비안은 활달하고 사교적이라니.”
“…….”
“진짜 비비안은 아마도 이 결혼이 썩 내키지 않았을 거예요. 공작부인이라니, 평생 집에 틀어박혀 책이나 읽어온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무리겠죠.”
그러니 본인에게는 족쇄나 다름없는 신분을 자매처럼 지낸 하녀에게 넘겨주고, 본인은 평민으로 글이나 쓰며 살고 싶었으리라.
“내 짐작이 맞나요?”
“……그래요.”
결국 멜리아가 눈물을 흘리며 시인했다.
“아가씨는…… 귀족의 삶을 원치 않으셨어요. 반대로 저는 그분의 삶을 동경했고요. 마벨 후작님도 저를 딸처럼 아끼셔서…….”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기극을 벌이려고 했던 거군요. 들키기라도 하면 당신은 물론이거니와 가담자인 마벨 후작까지도 엄벌을 피하지 못할 텐데요. 게다가 상대가 에두아르트 공작이니…….”
샤를로트가 무심하게 중얼거리자, 멜리아가 소스라치게 놀라 덥석 샤를로트의 손을 붙잡았다.
“무, 무엇이든 들어드릴 테니 제발, 비밀로 해 주세요. 다 제 잘못이에요. 후작님과 아가씨께는 잘못이 없어요…….”
“잘못이 왜 없어요? 당신 혼자 사기를 친 것도 아니면서.”
“저, 정말이에요! 제발 한 번만 눈감아주세요. 뭔가 원하는 게 있으시잖아요. 그러니까 절 여기로 데려오신 게 아닌가요?”
멜리아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매달렸다.
정말 끝장이라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샤를로트 노하라니.’
분명 이 약점을 잡고 끔찍한 요구를 해 올 것이다.
알고 있지만, 이대로 꼼짝없이 마벨 가의 사기극이 밝혀지게 둘 수는 없었다.
“무엇이든, 무엇이든 할게요. 만족하실 때까지 절 때리셔도 돼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살려달라고 빌자, 무심한 듯 냉랭하던 샤를로트의 입술이 열렸다.
“내가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원하는 건 하나예요.”
대체 무슨 요구를 할까?
마벨 가의 모든 재산을 넘기라고? 아니면 노하에서 저지른 범죄 혐의라도 뒤집어쓰라고 하는 걸까?
뭐가 됐든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샤를로트의 요구가 그녀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에두아르트 공작과의 혼담을 취소해요. 그거면 됐어요.”
“……그거 하나면 된다고요? 하, 하지만 이건,”
이건 마벨 가를 멸문시킬 수도 있는 정말 큰 약점인데.
없는 약점도 만들어 사람을 짓밟는다던 노하의 악녀가 정말로 원하는 게 저것 하나뿐이라고?
‘물론 파혼이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가문의 존속마저 위험해진 상황에서 파혼 하나로 위기를 넘길 수 있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였다.
멜리아가 울던 것도 멈추고 샤를로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토록 잔악하다 소문이 파다한 노하의 악녀는 그런 멜리아를 차디찬 눈으로 바라볼 뿐.
“난 당신들 사정에는 관심 없어요. 신분을 속이든 말든 알아서 해요.”
눈물에 번진 밤하늘 위로 붉은 머리칼이 가볍게 흩날렸다.
웃음기 없는 여자의 멸시가 그 어떤 미소보다도 다정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