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시간을 돌아왔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있었다.
‘알폰소를 보고 싶어.’
과거로 돌아오며 사라져 버린 시간 속에는 비단 알폰소의 죽음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움과 후회로 미쳐 있었던 샤를로트의 생지옥 또한 그곳에 함께 있었다.
알폰소의 죽음 이후, 그를 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 전국을 떠돌던 시간.
샤를로트는 수시로 헛것을 보고 환청을 들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맨발로 복도를 돌아다니기도 했으며, 하루는 하염없이 울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광증 속에서도 차마 뱉지 못한 말이 있었다.
‘보고 싶어요, 알폰소.’
도저히 그 말을 뱉을 염치가 없었다.
당신은 나 때문에 불행해지고, 결국 죽었는데.
내가 대체 무슨 염치가 있어서 당신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생각은 시간을 돌아온 지금에도 바뀌지 않았다.
‘따지고 보자면 알폰소와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많았지.’
하지만 샤를로트는 의도적으로 알폰소를 피해 다녔다.
그를 만나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한 번도 어려움을 느껴본 적 없었던 표정 관리를 실패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피할 수 없어.’
이번만 제대로 해낸다면 모든 게 끝날 것이다.
샤를로트의 목표는 아델린 라베루즈와 알폰소를 이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델린 라베루즈는 알폰소와 네 번째로 혼담을 나누게 될 사람.
‘그러니 비비안 마벨과 알폰소의 혼담을 깨트리기만 하면 돼.’
그 다음에는 순서를 따라서 아델린과 알폰소가 혼담을 나눌 테고, 자연스럽게 결혼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어떻게 이 세 번째 혼사를 깨트린단 말인가?
비비안에게는 이용할 수 있는 야망도, 연인도 없는데.
‘그나마 짐작이 가는 게 있긴 하지만…….’
이게 잘 먹혀야 할 텐데.
그리고 가능하다면…….
‘……알폰소를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 * *
그날 밤, 마벨 후작저.
“기분이 언짢으신 것 같습니다, 각하.”
옆에서 들려온 말에, 알폰소가 시선을 돌렸다.
평소와 달리 예복을 차려입은 에두아르트의 기사, 루드빅이 난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벌써 커프스단추를 다섯 번이나 만지셨습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군.”
그제야 한 박자 늦게 알폰소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항시 제 상태를 결벽적으로 점검하는 습관은 군 생활을 오래 하며 얻은 것 중 하나였다.
그나마 몸에 밴 귀족 예법 때문에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신경질적인 상태가 되면 한 번씩 수면 위로 드러나곤 했다.
다행히 다른 이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습관이었으나, 알폰소와 전장을 오랫동안 함께해 온 루드빅은 기민하게 알아챈 모양이었다.
“조금 전 마벨 후작 앞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으니 염려치 않으셔도 될 겁니다. 혼담 때문에 신경이 예민하실 것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시간이 정말 많지 않잖습니까.”
루드빅이 알폰소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걱정스러운 낯을 했다.
‘귀족가의 혼사가 예삿일도 아닌데. 급히 결혼을 하시려니 분명 언짢으시겠지.’
알폰소가 갑작스럽게 혼처를 찾기 시작한 이유.
그것은 다름 아닌 에두아르트의 지배력이 약화된 까닭이었다.
알폰소는 현 황제 브누아 3세의 명령으로 오랜 기간 전쟁터를 전전했다.
근 10년간 알폰소가 백 일 넘게 수도에 머물러 본 적이 없으니 오죽할까.
‘덕분에 황권은 전에 없이 강화되었지만.’
반대로 에두아르트가 가신들에게 행사하던 영향력은 약해지고 말았다.
문제가 대두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베호닉 가문에서 기사 차출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전해왔습니다, 각하. 에두아르트의 내부가 안정되기 전에 병력을 차출하는 것은 지나치게 소모적이라고…….
-베호닉의 거절에 다른 가신 가문들도 대답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베호닉은 작고한 알폰소의 어머니,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이 지참금으로 에두아르트에 들고 온 영지였다.
그러니 짧은 소속 기간만큼이나 에두아르트에 대한 충성심도 적을 수밖에.
다른 가문이 그렇게 나온다면 무력으로 밟아버리면 될 일이지만, 베호닉은 선대 에두아르트 공작부인의 친정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가문이었다.
덕분에 쉽게 손을 쓰지 못하니 베호닉은 사사건건 젊은 가주를 무시하기 일쑤.
그에 휩쓸려 다른 가신들마저 어깃장을 놓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각하께서 결혼도 하지 않으셨는데 외부의 일에 너무 눈을 돌리는 것이 가신들의 눈에 좋게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참 다양하게도 따져대는군. 군 복무를 마치기 전에는 에두아르트의 자질을 의심하더니, 마치고 오니 결혼을 안 해서 따를 수가 없다니.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각하?
-……뭘 어쩌겠나. 결혼해야지. 혼전 서약서를 신전에 제출하고, 가신들에게도 알려라.
혼전 서약서를 신전에 제출했다는 것은 3개월 안으로 결혼 서약을 하겠다는 뜻이다.
이때를 놓치면 최소 1년을 기다려야 다시 서약서를 낼 수 있다.
그러니 알폰소에게는 고작 3개월밖에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뜻.
‘다른 기사들은 귀족이 아니니 이게 얼마나 난처한 상황인지 모르는 것 같지만.’
루드빅은 명망 높은 바텔레미 가문의 삼남이었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알폰소의 심정을 가장 잘 공감해 줄 수 있는 장본인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내가 각하의 곁을 지켜드려야만……!’
충만한 사명감에 심장을 파르르 떨고 있는 루드빅에게는 안타깝게도, 알폰소가 언짢은 이유는 그것과는 영 판이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알폰소가 연회장의 홀 안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시간. 그래, 시간이 많지 않지.”
“그래도 이번에는 무사히 진행될 것 같으니 너무 염려치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순조롭지 않습니까?”
“그래. 순조롭지.”
지나치게 수상할 정도로 말이다.
알폰소의 시선 끝은 조금 전부터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있었다.
날이 제법 풀린 와중에도 흰 담비 털을 보란 듯 걸친, 붉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기 짝이 없는 여자.
샤를로트 노하.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루드빅의 말마따나 이번 혼담은 잡음 하나 없이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혼담에 대한 이야기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끝나버린 일전의 두 경우와 달리, 이제 알폰소에게 남은 것은 형식적인 절차뿐이었다.
마벨 후작은 혼담에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내가 애지중지 키운 딸일세. 잘 대해주게나. 딸아이가 집안에서만 자랐더니 예법이 많이 서툴러……. 격 없이 굴더라도 나무라지 말아주게.
물론 과하게 걱정을 내비치는 모습도 많았지만, 그건 딸 가진 부모의 입장으로 충분히 이해할 만한 범주였다.
무엇보다 마벨 후작은 일찍이 배우자를 잃고 외동딸 하나를 꽁꽁 싸고돌며 키웠으니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그런 것치고는 최대한 빨리 식을 치르고 싶어 하는 게 의아하긴 하지만.’
알폰소에게도 나쁠 게 없으니, 양가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이 속전속결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곧 연회가 무르익으면 마벨 후작이 딸과 알폰소의 결혼 소식을 발표할 터.
이미 알음알음 소문이 퍼진 까닭에 연회장에는 결혼 소식을 들으러 온 손님들이 가득했다.
그러니 분명 샤를로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
‘혼담을 망치고 싶다면 남은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샤를로트를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알폰소는 확신에 차 있었다.
분명 저 여자가 오늘 무슨 일을 칠 거라고.
‘대체 무슨 수법으로 내 혼삿길을 망칠 생각인지 두고 볼 생각이었는데.’
샤를로트는 알폰소의 예상을 보란 듯 깨트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녀가 알폰소의 혼담을 훼방 놓았다는 의심은 그저 알폰소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니, 알폰소에게 청혼장을 던진 것마저 없었던 일이라도 된 듯이.
‘내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지.’
샤를로트는 그저 삼삼오오 모여 있는 아가씨들 사이로 들어가 화기애애하게 떠들고 있을 따름이었다.
심지어 지금은 알폰소와 결혼할 예정이라 암암리에 이야기가 퍼졌을 비비안 마벨하고도 떠들고 있었다.
덕분에 알폰소는 적잖이 혼란스러워졌다.
‘정말로 내 착각이었던 건가?’
혼담이 파투 날 때마다 샤를로트의 이름이 매번 얽혀 있었던 것은 그저 우연이었나?
사실 따지고 보면 샤를로트는 딱히 한 게 없었다.
그저 올리비에 백작저에 불쑥 방문하고, 우연히 데보나 오뷔니의 향수를 썼을 뿐.
‘……어쩌면 내가 너무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노하의 악녀라는 악명 때문에 너무 샤를로트를 나쁘게만 본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샤를로트 노하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텐데.’
내가 너무 과민하게 굴었나 보군.
알폰소가 내심 민망해하며 샤를로트에게서 시선을 떼려는 순간.
“……!”
샤를로트와 비비안이 무어라 속닥거리는 듯싶더니, 돌연 자리를 뜨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