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그건 뭐였을까.
데보나는 자리를 피해 쿵쿵 뛰는 심장 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설마 내가 그 향수 가게 주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향수 가게는 점원이 관리하고, 데보나는 신분을 감추고 있었다.
고위 귀족으로 보이는 여자 손님이 다녀갔다는 것도 점원을 통해서 들었을 뿐.
‘몰랐을 거야. 알 수가 없어.’
어쩌면 샤를로트가 제게 말을 건넨 듯이 느낀 것은 그저 제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향수병만 잘 꾸몄어도 홍보 효과가 좋았을 거예요.
샤를로트는 그 말을 끝내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제 향수병을 자랑했으니까.
덕분에 그 향수병이 어떻게 꾸며져 있었는지는 작은 보석 하나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향수병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던 숱한 영애들까지!
‘이건 대박을 낼 수 있는 기회야!’
아무리 사업을 잘 모르는 데보나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무엇을 어떻게 팔아야 하는지 감이 확실히 왔다.
‘샤를로트 노하가 사간 향수 조향법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남은 사업 자금을 아낌없이 투자해, 샤를로트 노하의 마음에 들 향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럼 누구라도 샤를로트의 향수를 들고 싶어 할 터.
그렇게 입지를 다져 두면 이후는 일사천리다.
한번 유명해진 브랜드에는 꾸준한 수요층이 생길 테니까.
데보나는 주저 없이 곧장 왔던 길을 되돌아 가, 자클린에게로 달려갔다.
“언니, 언니! 혼담 취소해!”
“뭐, 뭐? 얘가 갑자기 무슨-”
“취소해! 나, 향수 가게를 대박 낼 수 있으니까!!!”
아하하! 데보나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2층의 복도에 요란히 울려 퍼졌다.
* * *
“그러니까, 향수…… 사업 때문에 걷어차이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각하?”
“……그래.”
알폰소의 긍정에, 질문을 던진 부관 세르주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어떻게든 웃음을 참으려고 안면 근육에 힘을 잔뜩 준 까닭이다.
기실 세르주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말을 들은 모두의 표정이 비슷했다.
결국 알폰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편하게들 웃어라.”
“아, 아닙니, 푸흡!”
“파하하학!”
“으흐, 흐, 으하하! 햐, 향수 사업 때문에 걷어차이다니! 푸하학!”
“내가 살면서 각하가 걷어차이는 걸 다 보네!”
“다, 다들 그만, 으흡, 그만 웃어라, 가, 각하 체면을, 으흐흡, 체면을 신경 써야지…….”
“……네가 제일 꼴 보기 싫으니 나가라, 루드빅 바텔레미.”
알폰소의 일갈에 루드빅이라고 불린 기사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여전히 피식피식 새는 웃음은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알폰소가 그런 가신들을 두고도 차마 나무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도 이 상황이 황당하니까…….’
어떻게 혼담이 연달아 어이없게 파투가 날 수가 있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던지, 배를 잡고 웃느라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던 곱슬머리의 기사가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으흐, 하, 배 아프네. 아무래도 각하 혼삿길에 마가 낀 거 아닙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니, 세르주. 따지고 보면 그렇잖아? 첫 번째는 밀회 장면을 딱 들켜서 파투가 나고, 두 번째는 향수 사업을 해야 하니 결혼은 안 되겠다고 걷어차이다니!”
그의 말에 남색 장발을 하나로 내려 묶은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놀랍기는 합니다. 제가 본 오뷔니의 가주는 뛰어난 협상꾼이었습니다.”
“맞아, 수완 좋은 사업가지.”
“그렇다면 더더욱 자클린 오뷔니가 에두아르트의 가치를 얕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두아르트 대신 여동생의 향수 사업을 선택한 이유 또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듣고 보니 그렇네.”
“각하께서는 오뷔니를 이해하셨습니까?”
질문이 돌아오자, 알폰소가 과묵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업가도 가끔은 인간적인 선택을 한다. 자클린 오뷔니 역시 사람이고. 나는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알폰소는 문득 자클린과 대면한 순간을 회상했다.
-……그렇게 되어서,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동생이 원치 않는 일을 너무 강요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거든요. 마침 동생이 하는 향수 사업이 잘되고 있으니, 이참에 그걸 도와줄 생각이에요.
자클린은 사려 깊은 언니의 낯을 하고 있었다.
주관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제법 기쁜 얼굴이기도 했고.
“어쨌든 본인이 원하는 길을 갔으니 잘된 셈이지. 겸사겸사 선물로 그 향수를 받아왔다.”
알폰소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향수병 하나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자, 떠들고 있던 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한 마디씩 했다.
“이야, 이게 그 각하를 걷어차게 만든 향수입니까? 비싼 몸이 오셨네요.”
“향이 생각보다 부드러운데요?”
“병의 조형이 인상적입니다. 루비와 에메랄드의 조합이 눈길을 사로잡고, 겉을 두른 수정이 다각도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 샹들리에 불빛처럼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더 아름다울 것이라 예상-”
“어? 이거 샤를로트 노하 향수 아닙니까?”
그 말에 모두의 입이 뚝 멈추었다.
대신, 모두가 말을 꺼낸 사람을 돌아보았다.
“뭐, 뭡니까? 왜 그렇게 보는 거지, 다들?”
“……루드빅 바텔레미. 너 이 향수를 아나?”
알폰소의 물음에, 루드빅이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지금 사교계에서 가장 유행하고 있는 향수인데요.”
“아무래도 바텔레미 경이 명문 귀족가의 삼남이라는 명패가 거저 있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난 쟤가 귀족처럼 보인 적이 없어서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저 역시도 그렇습니다.”
기사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을 덧붙이자 루드빅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지만, 항의할 틈은 없었다.
알폰소가 곧장 질문을 던진 까닭이었다.
“그런데 이게 왜 샤를로트 노하 향수라고 불린다는 거지?”
“그거야…… 샤를로트 노하가 써서 유행시킨 향수라서 그렇겠지요. 보통 누군가의 이름을 딸 땐 그 사람이 유행시킨 경우가 많으니까요.”
“우연도 참 신기하군요. 곧장 청혼장을 불태우긴 했어도, 어쨌든 샤를로트 노하도 각하께 청혼한 사람이 아닙니까.”
알폰소에게 청혼한 사람들끼리 이런 인연이 생기다니.
신기한 일이라며 세르주가 웃었지만, 알폰소는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샤를로트 노하라고?’
왜냐하면 그는 올리비에 백작저에 샤를로트 노하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 번씩이나 어처구니없게 파투 난 혼담.
그리고 매번 거기에 절묘하게 얽혀 있는 샤를로트 노하.
‘이걸 과연 우연이라고 할 수 있나?’
하지만 노하의 수법이라기에는 너무 부드러웠다.
그들은 무슨 문제든 알력으로 밀어붙이고, 폭력적으로 해결하기로 유명한 가문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청혼장이 왔을 때 다들 그렇게 길길이 뛰었던 것인데.
알폰소는 혼란이 떠오른 얼굴로 책상에 놓여 있던 서류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에두아르트와 혼담이 오간 차례대로 적어놓은 가문 목록.
맨 위의 두 줄-올리비에와 오뷔니-은 지워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적힌 것은 마벨 후작가의 비비안 마벨.
알폰소의 직감이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단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을 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한다면 계속 이 찝찝한 기분을 안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세르주.”
“예, 각하.”
“마벨 후작가와 비비안 마벨에 대해 최대한 알아와라. 연인이 있는지 없는지, 뭔가 물밑으로 하고 있는 일이 있는지까지 전부.”
샤를로트 노하, 그 여자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더는 호락호락 당해줄 생각은 없다.’
알폰소의 푸른 안광이 차게 빛났다.
* * *
“알아본 바로는 비비안 마벨은 연인도, 물밑으로 하고 있는 일도 딱히 없었습니다.”
“그게 제일 까다로운 유형이란 말이지.”
샤를로트가 팔 위로 담비 모피를 두르며 중얼거렸다.
거울 속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치장된 붉은 머리칼의 여자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난관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올리비에와 오뷔니는 처리하기 쉬웠어.’
라일라 올리비에는 연인이 있었고, 데보나 오뷔니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샤를로트가 혼담을 파투 낸 이후 향수 사업에 매진한 데보나가 결국 이듬해 본인의 브랜드를 급부상시키는 데에 성공한 덕택에 알 수 있는 정보였다.
하지만 비비안 마벨은?
‘연인도 야망도 없지.’
샤를로트에 의해 혼담이 깨진 이후 소식이 들려온 것도 없다.
그저 초야에 묻혀 살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애초에 좋은 집안을 두고 여태 미혼인 것도 어디까지나 비비안 본인이 외부활동을 지독하게 하지 않은 탓이니까.’
덕분에 얻을 수 있는 정보라고는 그녀가 엄청난 독서광이라는 것에, 어릴 때부터 쌍둥이처럼 친하게 지내 온 하녀가 하나 있다는 것뿐.
결국 샤를로트는 고민 끝에 결정했다.
이 혼담에 직접 끼어 보기로.
“마벨 후작가의 연회가 오늘 밤이랬지?”
“예. 마차를 준비할까요?”
“그래. 한번 가봐야겠어.”
오늘 밤, 알폰소도 마벨 후작가의 연회에 참석한다.
그 사실을 되새기자 거울 속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