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을 쓴 노기사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백작. 내 말이 거짓말 같다면 무시하면 될 일이죠.”
샤를로트는 친절하게 권고했지만, 결국 올리비에 백작은 샤를로트를 무시하지 못했다.
“에단! 샤를로트 양을 배웅해 드려라. 반드시 대문 밖까지 정중히 배웅하도록!”
그는 가장 충성스러운 기사를 불러 샤를로트를 내쫓도록 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샤를로트가 바란 것이었다.
그녀는 에단의 배웅을 빙자한 감시를 받으며 마차로 향하는 길에 슬쩍 이야기를 흘렸다.
“이렇게 곧장 돌아가야 한다니 아쉽네요. 오늘 에두아르트 공작이 이 집 아가씨에게 청혼하러 온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파다하기에, 직접 보러 온 건데.”
“……이 집 아가씨라면.”
“레이디 라일라 말이에요. 좋은 아가씨잖아요? 축복해주고 싶어서요. 그런데…… 몰랐던 눈치네요?”
“모, 몰랐습니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혼담이 제대로 오간 것도 아니고, 얼추 이야기를 맞추어 놓기만 한 거니까.
당연히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하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하지만 한갓 고아 출신 평민 기사인 에단이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샤를로트는 태연히 거짓말을 하곤 마차에 오르며 부드럽게 미소 지어 주었다.
“그래요? 아가씨께 결혼 축하한다고 전해줘요.”
라고,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는 기사에게 친절한 말도 한 마디.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과거에도 두 사람이 야반도주를 해서 올리비에가 발칵 뒤집혔다는 이야기는 유명했으니까.’
그 충격으로 혼절한 올리비에 백작이 사경을 헤맸다던가.
-곧이곧대로 말했더라면 화를 내긴 했어도 허락해 주었을 텐데……. 어떻게 말 한 마디 없이…….
본인이 거두어 키운 충성스러운 기사와 외동딸이 도망간 것이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올리비에 백작은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몇 번씩이나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이제 알려졌으니 알아서들 하겠지.’
어쨌든 덕분에 샤를로트가 라일라에게 망신을 주어 혼담을 망칠 일은 없어졌으니 서로에게 잘된 일이리라.
‘예전엔 무조건 판을 들어 엎고 다녔지.’
어떤 방식으로든 혼담만 파투 내면 되는 일이니, 이렇게 뒷공작을 하기보다 다시는 얼굴도 못 들 만큼 짓밟아 혼담은 꺼내지도 못하게 하는 편이 손쉬웠다.
그래,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알폰소에게 이런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샤를로트. 정 내 혼담을 어그러뜨리고 싶었다면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꼭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잔인한 방법을 써야 했습니까?
-그 방법이 쉽고 확실하니까요. 내가 그들의 사정을 봐주어야 할 이유가 뭐죠?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걸 말해주어야만 아는 겁니까?
-아뇨, 말해도 잘 모르겠군요. 그 영애들이 영리했다면 내게 당하지 않았겠죠. 내가 그 바보짓까지 책임져 줘야 하나요?
샤를로트의 날카로운 대답에, 알폰소는 착잡함과 경멸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
‘미움 받겠구나.’
당신도 나를 그렇게 보겠구나.
올리비에 백작의 연회장에 들어갔을 때 자신에게 향하던 그 익숙한 시선들처럼.
마치 상종 못 할 인간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입맛이 쓰다고 느꼈을까.
확실히 기억나진 않는다. 샤를로트는 제 감정을 곱씹는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뒤로 알폰소가 그 일에 대해 더는 묻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만 샤를로트가 혼담을 망친 상대들에게 어떻게든 보상을 하고 책임을 져 주려 뛰어다녔을 뿐.
아델린 라베루즈, 그 여자와도 그렇게 인연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때는 조금 후회했지.’
다른 방법을 썼더라면 알폰소가 아델린과 보석 사업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여전히 샤를로트는 알폰소가 하고 싶었던 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알폰소를 행복하게 해줘야 하니까.’
혹시라도 자신이 파투 낸 혼담들 때문에 죄책감이라도 가지게 된다면 곤란하다.
샤를로트는 알폰소가 제 악행에 책임을 지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알폰소가 얼마나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도.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알폰소를 위해, 다들 좋은 일만 일어나 줘야겠어.
“올리비에 가문에 익명으로 좋은 약재와 포도주를 보내. 백작이 쾌차해야 그 딸도 결혼할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더 명령하실 것이 있으신가요?”
하녀의 말에 샤를로트가 들고 있던 향수병을 탁 내려놓았다.
“이 향수 말이야, 향은 좋은데 어디 내놓기에는 병이 예쁘지 않아서 아쉽네. 좀 꾸며서 가져와봐. 보석을 아낌없이 사용해서.”
“네, 언제까지 해오면 될까요?”
“내일모레. 오뷔니 가문의 무도회에 참석할 때 가져갈 거니까.”
알폰소의 두 번째 혼담을 깨트리러 갈 차례였다.
* * *
오뷔니 저택의 무도회장.
무도회장의 홀이 잘 보이는 2층의 난간에 선 두 여인이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얼굴 펴거라, 데보나 오뷔니. 누가 보면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겠구나.”
“……언니는 아무것도 몰라.”
“내가 왜 아무것도 몰라? 에두아르트 공작과 네 혼담을 진행시키고 있는 게 나인데.”
오뷔니 가의 가주, 자클린 오뷔니가 공작새 깃털로 만든 부채를 살랑이며 말했다.
평소에는 사이가 좋은 자매였으나 오늘만큼은 냉랭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저 에두아르트 공작과의 혼담 때문에.
“언니, 난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다니까.”
“결혼이 어디 네 뜻대로 되는 일이라던? 이보다 더 좋은 혼처는 없어.”
“그건 알아. 하지만-”
“데보나! 에두아르트가 어디 우리 형편에 넘볼 수 있는 가문인 줄 아니? 게다가 그 에두아르트 공작이야! 대체 왜 이걸 마다하는 거니? 이 언니가 에두아르트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받고, 널 좋은 가문에 보낼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알아?”
“물론 에두아르트는 정말 대단한 가문이지. 하지만…….”
데보나가 차마 말을 하지 못하자, 자클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뭐? 설마 너, 이렇게 주저하는 이유가 그 향수 가겐지 뭔지 하는 그 나부랭이 때문이니?”
“나, 나부랭이라고 하지 마! 나는 진심이야! 손님도 점점 늘고 있어. 얼마 전에는 고위 귀족으로 보이는 손님도 있었다고. 조금만 더 하면 분명 성장할 수 있을 거야, 언니. 제발 한 번만 믿어줘!”
데보나가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자클린은 한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데보나. 언니가 이미 1년이라는 기한을 줬잖니. 그리고 넌 그 안에 약속대로 가게를 키우지 못했고.”
“하지만 아직 한 달이 남았어!”
“그래, 그리고 한 달이 지나면 네 결혼식이 되겠지. 아니면 설마, 한 달 안에 가게를 급성장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니?”
자클린의 말에 데보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속이 상하지만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데보나의 조향 실력은 수준급이었으나, 사람들은 유명한 브랜드의 향수를 쓰고 싶어 했다.
게다가 향수를 만들 줄만 알 뿐 사업에는 영 문외한이었던 데보나는 홍보에 감을 잘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매출이 영 지지부진할 수밖에.
애써 눈물을 참는 여동생이 못내 안쓰러웠던 자클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데보나. 향수를 만드는 게 좋다면 결혼하고 나서 취미로 하면 되잖니.”
“나는 취미로 하고 싶은 게 아니야. 내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 거라고.”
“그것도 결혼하고 나서 얼마든지-”
“결혼하고 나서 언제? 아이를 낳은 다음에? 아니면 아이가 자라고 난 다음에? 에두아르트씩이나 되는 가문에서 공작부인이 가문의 일은 뒤로 미루고 사업을 하겠다는 걸 받아들여 줄까?”
“그건-”
이번에는 자클린의 말문이 막혔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언니도 알잖아. 알면서도 결혼하라고 하는 건 언니의 욕심이야!”
“데, 데보나! 얘, 어딜 가니!”
“따라오지 마!”
데보나는 자클린을 뿌리치고 땅만 보며 달렸다.
섣불리 고개를 들면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서였다.
그렇게 애써 울음을 참으며 인파를 지나치던 와중, 데보나의 예민한 코끝에 익숙한 향기가 걸렸다.
‘……어? 이건.’
우리 가게의 향수인데?
데보나가 운영하는 가게의 모든 향수는 데보나가 만들기 때문에 몰라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분명 이 향은 그 고위 귀족처럼 보이던 여자 손님이 사간 향수인데.
데보나가 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사람이 잔뜩 몰려든 곳이 보였다.
“향이 정말 좋은데요? 이런 향수가 여태 알려지지 않았다고요?”
“4번가 골목에 있는 작은 가게예요. 꽤 독특한 향수를 팔더군요. 조향사가 누군지는 몰라도 솜씨가 아주 좋아요.”
그리고 그 가운데에 서 있는 붉은 머리칼의 여자.
‘샤를로트 노하!’
그렇다면 샤를로트가 그 손님이었다는 뜻인가?
노하의 악녀라는 악명이 널리 퍼진 만큼, 샤를로트가 쓴 물건들은 단숨에 입소문을 타곤 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샤를로트는 악명만큼이나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는 데다, 사교계의 사람이라면 몰라볼 수가 없는 유명인사였으니까.
“영애들도 관심이 있다면 가보지 그래요?”
“그래야겠어요. 4번가 골목이라고 했죠?”
“병도 너무 예쁘네요!”
“아, 병은 내가 따로 꾸몄어요. 수수한 게 아쉬워서. 가게 주인을 만나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샤를로트가 군중 속 데보나와 눈을 마주쳤다.
마치 그녀에게 직접 말하듯.
“향수병만 잘 꾸몄어도 홍보 효과가 좋았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