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었다. 별일.
“이제 그만하자. 더 숨기지 않을게. 나는…… 에두아르트 공작과 결혼해야 해. 아버지께서 그걸 원하셔.”
“하지만 나는 당신을 놓을 수 없단 말입니다! 라일라 올리비에, 당신을 미친 듯이 원하고 있다고요!”
“이러지 마! 나도 정말 힘들어…… 으흑!”
엄밀히 말하자면 별일이라기보다는 세기의 사랑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알폰소는 건물의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망했군.’
평소 이런 표현은 잘 쓰지 않지만, 지금은 그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알폰소가 이 세기의 사랑을 마주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조금 전, 알폰소와 소피아는 올리비에 백작저에 도착했다.
“이미 연회가 얼추 무르익은 것 같네? 예상은 했지만.”
“백작이 늦게 참석해 달라고 요청하더군.”
“의도가 빤하네. 얼마나 과시를 하고 싶었으면 오빠한테 따로 요청까지 해? 체면 안 살게.”
연회가 무르익을 즈음 등장하는 것은 곧 주목을 받겠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올리비에 백작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에두아르트 공작을 내보여 그와의 친분을 과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알폰소 역시 이러한 올리비에 백작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
“나는 구혼하려는 입장이니 감내하라는 거겠지.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사람들의 이목을 받는 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니 들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군.’
연회장의 분위기가 묘하게 어수선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알폰소를 보고도 그리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또 다른 유명인사가 한번 휩쓸고 간 현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놀라기보다는 차라리 당황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연회장의 분위기를 소피아 역시 느꼈던지, 그녀는 적잖이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왜 이래? 다들 힐끔거리기나 하고……. 내가 못 올 자리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서 그렇겠지. 얼굴 구기지 마라. 백작께 실례다.”
“기껏 손님을 늦게 등장시키기까지 해 놓고 이런 취급 받게 하는 게 더 실례지. 난 가서 음료라도 좀 가져올게. 이러단 정말 얼굴 구기게 생겼으니까.”
소피아는 일부러 산뜻하게 미소 짓고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다.
연회의 주최자인 올리비에 백작이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조금 뒤의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노기사는 적잖이 경황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각하! 갑작스럽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
“괜찮습니다, 백작. 표정을 보니 상당히 급한 일이었던 모양인데. 그렇게 시급한 일이었습니까?”
알폰소의 물음은 부드러웠으나 그 내용에는 뼈가 있었다.
에두아르트와의 친분을 과시하겠다며 일부러 늦게 등장시키기까지 해 놓고, 그것마저 내팽개칠 만큼 시급한 일이 있었느냐는 물음이었으니까.
“면목이 없습니다. 그, 주방에 쥐가 들어와서는 불이 날 뻔했지 뭡니까. 하마터면 각하께서 오시기도 전에 연회를 망칠 뻔했습니다. 지금은 잘 처리했으니 걱정 마십시오.”
“잘 처리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오늘 뵙지 못했다면 무척 아쉬웠을 겁니다.”
백작이 한 말의 진위까지 알 수는 없으나, 어차피 알폰소는 그 이유 따위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의 목적은 처음부터 혼사를 진행시키는 것 하나뿐이었으므로.
굳이 말을 더 에두를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따님은 자리에 보이지 않으시는 것 같군요. 이번 기회에 소개받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아, 물론이지요. 라일라는 꽃구경을 하고 싶다고 하여 후원으로 내보냈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각하께서 딸아이를 데려와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본격적으로 혼담이 오가기 전 라일라와 알폰소가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다.
이런 노골적인 제안을 거절할 이유 또한 없었다.
하여 알폰소는 기꺼이 그러마 대답하고 후원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주한 게 이 장면이란 말이지.’
라일라와 에단은 울먹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서로를 부둥켜안기까지 했다.
“라일라 아가씨!”
“에단! 역시 난 너뿐이야!”
그리고 알폰소는 난감해졌다.
백작에게 라일라를 데려오겠다고 했으니 혼자 돌아갈 수도 없다.
‘적당히 상황이 진정되면 모르는 척 나타나 볼까 했는데.’
저 세기의 사랑은 도저히 식을 줄을 몰랐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알폰소라는 장애물이 그렇잖아도 뜨거운 그들의 사랑에 장작을 던져 넣어 준 덕분이리라.
알폰소는 가끔 그의 기사 중 하나인 루드빅이 난감한 일을 떠안을 때마다 뙤약볕 아래 잡초처럼 늘어져서 비관적인 말들을 중얼거리던 것을 떠올렸다.
-집어치워…… 집어치우자고……. 이 빌어 처먹을 자식들아…….
대체 뭐가 그렇게 답답해서 그러나 했더니.
알폰소는 이제야 루드빅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이런 내막을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아니, 그게 과연 좋은 일일까?
연인이 있는 상대와 결혼하는 일이?
‘잠깐 미친 생각을 했군. 아무리 결혼이 시급하다고는 해도.’
알폰소가 이대로 라일라와 결혼했더라면, 라일라는 분명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했을 것이다.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떳떳해지지 못하거나.
그렇게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어 제 이기심을 채우는 게 정말 마땅한 행위인가?
생각만으로도 부끄러운 일이다.
알폰소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이 혼담은 안 되겠다.’
백작에게는 잘 이야기하여 혼담은 없던 일로 하자.
그렇게 마음먹으며 몸을 돌리려던 순간.
등 뒤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올리비에 백작이 불쑥 나타났다.
“각하, 여기 계셨군요. 통 오시질 않아 무슨 일인가 하고 나와봤습니다만. 왜 여기에 서서…… 아니, 라일라? 에단?”
“아, 아버지?!”
“백작님!”
세기의 커플을 발견한 올리비에 백작의 낯빛이 순식간에 노여움으로 달아올랐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게냐! 너희 둘이 왜 여기 같이,”
“제가, 제가 다 설명할게요. 아버지. 이건, 그러니까-”
“백작님! 아가씨와 저는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교제를 허락해주십시오!”
“뭐, 뭐야?! 길거리 고아를 거두어 키워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어억!”
“아, 아버지!!!”
어느 혹독한 전쟁터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기로 유명했던 노기사는 딸의 밀회 장면에서는 차마 평정을 유지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그는 치솟는 혈압을 이기지 못하고 뒷목을 잡고 쓰러졌고, 때마침 갑작스러운 소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까닭에 이 사실을 숨길 겨를도 없이 연회는 파장이 났다.
알폰소 역시 올리비에 백작의 안부를 묻고 자리를 뜨려는데, 뒤늦게 소란을 들은 소피아가 치맛자락을 한 움큼 휘어잡고는 달려와 법석을 떨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백작은 괜찮대?”
“충격으로 잠시 쓰러졌을 뿐 의사의 소견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는군.”
“세상에……. 오늘 정말 무슨 날이라도 되나? 오빠, 그 얘기 아직 못 들었지?”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까 연회장 분위기가 이상했잖아? 돌아다녀 보니 왜 그랬는지 얘기가 좀 들리더라고.”
소피아는 짐짓 엄중한 낯을 하더니, 한껏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오기 직전에, 불청객이 정말로 왔었대!”
“……뭐? 누가?”
“노하의 악녀! 샤를로트 노하 그 뻔뻔한 여자가 왔었다고!”
* * *
“올리비에 백작이 쓰러졌다고? 그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는데.”
모든 사건의 원흉, 샤를로트가 허공에 가볍게 향수를 칙 뿌리며 중얼거렸다.
향이 붕 떠오른 공중을 휘휘 내젓는 권태로운 손길은 자못 우아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백작은 살아 있고?”
“건강에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 충격으로 인해 잠깐 정신을 잃은 듯싶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혹여 백작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알폰소가 죄책감을 피하지 못했을 테니 다행이었다.
비록 샤를로트는 백작을 썩 좋게 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녀는 올리비에 백작저를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당장 여기서 나가시오! 초대장도 없이 함부로 내 저택에 드나들 수는 없소!
-처우가 박하군요. 초대받지 못한 쥐새끼도 올리비에의 주방을 쉽게 드나드는데, 사람은 그깟 초대장 하나가 없다고 이렇게 문전박대하다니.
-뭐, 뭐요? 무슨 그런 억지 모함을……!
-모함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오는 길에 주방 창문 너머로 쥐를 잡느라 요란인 꼴을 얼핏 봐서 하는 말이었는데요. 곧 불이 나게 생겼더군요. 가 보지 않으면 후회할 거예요.
올리비에 백작은 다소 혼란스러워 보였다.
다른 사람의 말이었더라면 코웃음을 치고 넘어갈 일이었으나,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샤를로트였으니까.
없는 쥐를 잡아서 풀고, 멀쩡한 주방에 불을 지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노하의 악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