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마신 순간부터 예정되어 있던 죽음이 이제 와서 두렵지는 않다.
제 목숨을 바쳤는데도 알폰소를 살리지 못하게 될까 두려울 뿐.
‘1년. 1년 안에 어떻게든 알폰소가 행복해져야 해.’
알폰소가 행복해지는 것이 샤를로트의 소망이었기 때문에 술식은 알폰소가 행복하다고 느끼기 전까지는 완성되지 않는다.
사실, 현재의 알폰소는 행복하지 않을 만도 했다.
그는 짊어진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황제의 사촌이라는 이름. 그리고 에두아르트 가문.’
현재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을 대 보라고 한다면 너 나 할 것 없이 에두아르트 공작의 이름을 댈 것이다.
누구나 한번 엮이고 싶어 탐을 내는 유명인사가 바로 그였다.
비단 에두아르트라는 고귀한 이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명성은 그가 근 10여 년간 울려 온 수많은 승전보들 덕분이었다.
‘전쟁 영웅이라 불린다던가.’
젊고 유능한 에두아르트 공작.
그는 어느 접전지를 가든 승전 소식과 함께 돌아왔고, 그가 성공시킨 전쟁들 덕분에 황권은 손쓸 틈 없이 견고해졌다.
심지어 그런 알폰소가 브누아에게 충성하는 모습은 황제의 권력을 더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감히 노하의 무역권을 빼앗아 갈 정도로 말이지.’
남부 해상 무역권 일부를 황실에 빼앗겼을 때 도미닉은 사흘 밤낮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에두아르트 때문이다. 그놈만 없었어도 황제가 저렇게 설쳐대진 못했을 텐데!
라고 외치며 이를 갈아대던 것이 아직 눈에 선했다.
‘그렇게 욕해놓고 필요하니 사돈 맺을 생각을 하다니.’
참 염치도 없지.
어제 만찬을 떠올린 샤를로트가 비리게 웃었다.
과거에는 도미닉을 따라 에두아르트를 욕했지만 이제는 노하의 탐욕이 우습고 역겨울 뿐이다.
바닥에 떨어져 썩어가는 목련잎을 바라보는 샤를로트의 손끝이 느리게 창틀을 두드렸다.
‘아마 아버지가 알폰소에게 청혼장을 이미 보냈겠지.’
어제 가족 만찬에서 결혼하라는 이야기를 꺼냈으니, 이미 청혼장을 보낸 이후일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도미닉은 문을 나서기 전 샤를로트에게 거듭 당부했다.
“네 역할이 중요하다, 샤를로트. 알고 있겠지?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그 말은 곧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뜻이나 다름없다.
도미닉에게서 이 말을 듣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그녀의 배다른 동기들은 전부 노하의 이름을 빼앗기고 쫓겨났으니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알폰소와 노하가 조금도 엮이게 두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겉으로는 가문의 명령에 따르는 척하고.’
물밑으로는 알폰소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도울 수밖에.
예전처럼 가문의 명령에 따라 알폰소와 결혼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과거에는 도미닉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랐지만, 이제는 노하의 탐욕이 우습고 역겨울 뿐이다.
무엇보다 노하의 탐욕이 알폰소를 불행하게 만들고 끝내 죽이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샤를로트는 도저히 가문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 그래도 가문에 한 가지 고마운 점은 있네.’
덕분에 알폰소와 결혼하게 됐고,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으니까.
그리고 또한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도.
그건 정말 간단하다.
딱 한 가지만 있으면 되니까.
‘사랑.’
알폰소를 사랑하게 된 순간들을 회상하는 샤를로트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았다.
-샤를로트, 나는 당신의 말을 신뢰합니다. 내가 당신을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당신은 거짓은 입에 담지 않더군요.
-당신이 내 부인인 이상, 나는 당신이 받는 모욕을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감정과는 연관이 없는 나의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그 순간에 얼마나 마음이 떨렸던지.
또 얼마나 충만한 기분이 들었던지.
가슴 벅찬 그 감각을 잊지 않았다. 그 순간을 명명할 수 있다면 아마도 행복이리라.
그러니 알폰소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건 얼마나 쉽고 간단한 일이겠는가?
‘나는 그가 사랑한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까.’
아델린 라베루즈.
그녀와 알폰소가 잘되게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샤를로트는 창틀을 짚고 있던 손을 떼고, 복도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실비아, 마차를 준비해줘.”
“네, 아가씨. 어디로 가시나요?”
“올리비에 백작저.”
예전에 그랬듯, 알폰소의 첫 번째 혼담을 파투 내러 갈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그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하여.
* * *
한편, 덜컹이는 마차 안.
“결혼~ 결혼~. 알폰소 오빠가 올리비에 백작가와 결혼을 한다니~.”
제멋대로 흥얼거리는 곡조에 창밖을 바라보던 알폰소가 느리게 눈꺼풀을 내렸다.
굳이 돌아보지 않더라도 그와 똑 닮은 은발을 가진 사촌동생이 신이 나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 눈에 선했던 까닭이다.
“그만하랬지, 소피아. 혼담이 제대로 진행되지도 않았다.”
“에이, 오빠. 천하의 에두아르트를 누가 걷어차? 올리비에 백작도 분명 신이 나서 사흘 전부터 엉덩이를 씰룩거리고 있었을걸?”
“제국의 가장 명예로운 기사를 그렇게 말하지 마라.”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올리비에 백작이-”
“제국의 가장 명예로운 기사는 오빠잖아? 알폰소 리누스 에두아르트! 승률이 무려 구 할이나 되는 이 시대 새로운 전쟁영웅!”
크으!
소피아가 너스레를 떨며 짝짝짝, 박수를 쳤다.
현 황제의 친동생으로 오만하기 짝이 없다는 그 소피아 황녀가 이렇게 말괄량이라는 걸 과연 누가 알까 싶지만.
소피아는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알폰소의 혼담이 아닌가!
“오빠는 모르겠지만, 알폰소 오빠는 지금 수도의 일등신랑감이라고. 우리 폐하께서 즉위 전에도 일등신랑감이 아니었다는 걸 생각해봐. 얼마나 명예로워?”
“명예로울 것도 없지만, 그 얘기를 10년 전에도 했다는 걸 혹시 잊었던가?”
“그야 오빠는 언제나 일등신랑감이었으니까.”
바꾸어 말하자면 브누아는 알폰소에게 밀려 평생 일등신랑감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젊고 유망하다 정평이 난 황제보다 그 사촌인 에두아르트 공작에게 더 시선이 가는 것을.
엄밀히 말하자면 소피아는 알폰소가 이제야 겨우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이 영 아쉽기까지 했다.
“그러게 진작 결혼 좀 하랄 때는 들은 척도 않더니.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이렇게 빨리 혼담을 진행하고. 당분간 결혼은 생각 없을 줄 알았는데.”
“……사람 마음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네 일도 아닌데 타박은.”
“아쉬워서 그러지, 아쉬워서.”
알폰소가 전쟁터를 전전하기 전, 그를 흠모하던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때 결혼했으면 훨씬 가문 좋고 아름다운 영애들 중에서 신붓감을 골라 연을 맺을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올리비에 백작가도 명망 있는 가문이긴 하지만, 에두아르트에게는 한참 못 미치잖아. 기네비어나 오르펜같이 정통성 있는 가문 아가씨들은 벌써 다 결혼해 버렸고.”
황제의 사촌이자, 에두아르트 공작인 알폰소가 한참 뒤떨어지는 혼처를 구하겠다고 하니 답답하지 않을 수가 있나.
이것만 해도 영 성에 안 차는데.
“이제 와서 혼처를 찾으니까 감히 노하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청혼장을-”
“……그만. 소피아. 그 얘기는 됐다. 그렇잖아도 어제 가신들에게 적잖이 시달렸으니까.”
노하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알폰소가 미간을 슬쩍 좁히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어제의 난리 통을 떠올리기만 해도 골치가 아파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까닭이었다.
-노하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각하! 어떻게 이리 뻔뻔하게 구는 겁니까? 감히 각하께 청혼장이라니요! 평소에는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건 다 잊었답니까?
-이건 명백히 에두아르트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이대로 거절하면 보복하려 들겠죠! 그런 방자한 짓거리를 하기 전에 싹부터 잘라야 합니다!
누가 기사들 아니랄까 봐, 저마다 검을 하나씩 차고 와서는 당장이라도 노하의 멱을 따 버릴 것처럼 굴기에 진정시키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다.
“노하에는 앞서 혼담이 오간 가문이 있어 순번을 지키겠노라고 정중히 거절해 두었으니 걱정 마라.”
이번 혼담만 무사히 진행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알폰소가 설명하자, 잔뜩 좁혀들었던 소피아의 미간이 마지못해 풀렸다.
“……오빠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래서, 올리비에 백작 영애는 만나 봤어?”
“아직. 그렇잖아도 오늘 만나 보기로 했다. 지금 참석할 백작저의 오찬 연회에서 자리를 마련해보겠다더군.”
라일라 올리비에.
올리비에 백작가의 장녀로, 알폰소의 결혼 상대가 될 사람이었다.
“잘됐으면 좋겠다. 공작저에 놀러 오면 늘 삭막하단 말이야. 같이 얘기할 수 있는 또래가 있었으면 좋겠어.”
“잘될 테니 걱정 마라.”
알폰소는 새언니가 빨리 생겼으면 좋겠다며 철없이 칭얼거리는 사촌동생을 가만히 바라보다, 희미하게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지었다.
“설마 별일이 있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