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외전 4. 사미아 쿤 (3)
“아버지! 싸우자!”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품에 안고 기분 좋게 낮잠을 즐기고 있던 바이샤는 창문을 넘어 방 안으로 난입한 딸이 휘두른 주먹을 한 손으로 막아 내며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른함이 남은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갈 리 없건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막아 내는 그의 모습이 사미아를 제대로 자극했다.
“이익!”
“기습이라니, 이기려고 선택한 방법치고는 치졸하구나.”
“진짜 한 대만 맞아 달라구요!”
“나보다 약한 녀석에겐 맞아 줄래야 맞아 줄 수가 없군.”
“아, 정말!”
주먹을 휘두르는데 점점 몸이 침실에서 뒤로 밀려 나간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바이샤가 그리 이끈 것이다.
그저 방어만, 그것도 한 손으로 막아 내고 있을 뿐인데 사미아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제어 중인 바이샤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사미아가 볼을 부풀렸다.
딱 한 번만! 얼굴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바이샤의 몸 어디든 주먹을 박아 보는 것이 소원인데 그 간단한 소원 한번을 안 들어주는 아비였다.
“사미아, 아버지께 말투 공손히 해야지.”
“누나!”
잠이 덜 깬 듯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테시아를 안고 침실에서 걸어 나온 세리아나가 사미아를 가볍게 질책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 말투에 담뿍 담긴 애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제 아비를 향해 주먹을 날리는 데 집중한 사미아의 귀엔 세리아나의 목소리가 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무니, 누나 또 져?”
“글쎄? 우리 테시아는 어떻게 될 것 같니?”
“아부지 이겨! 누나 약해!”
날아오는 주먹을 막은 후 한 손으로 가볍게 밀어내자 사미아의 작은 몸이 벽으로 날아갔다.
공중에서 재빠르게 몸을 돌려 벽을 박차고 다시 주먹을 날리는 사미아의 연둣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피식 웃은 바이샤가 처음으로 두 손을 전부 사용해 사미아의 돌진을 막았다.
“어머니와 동생의 낮잠을 방해하다니.”
“아악! 또 졌어!”
“당연하지. 날 이기려면 백 년은 이르다.”
딸의 양쪽 손을 각각 잡아 들어 올린 바이샤는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 치다 축 늘어진 사미아의 몸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힘을 다 쓴 것인지 바닥에 축 늘어져 앉는 사미아 곁으로 테시아가 다가왔다.
“누나 또 졌다!”
“다음엔 이길 거야.”
“응! 다음엔 이길 거야!”
“그치? 누나가 이기지?”
“응, 누나가 이겨!”
“두고 봐요. 다음번엔 이길 거니까!”
“이길 거니까!”
투지를 불태우는 딸과 뭐가 그리 즐거운지 누나의 말을 따라 하며 눈을 반짝이는 아들을 보며 바이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자신의 딸이라면 이 정도 근성쯤은 있어야지! 말로 하지 않아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 세리아나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 친부모 찾기는 이걸로 끝?”
“그것도 다음번엔 꼭 성공할 거예요.”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어 앉아 입꼬리를 당겨 웃는 바이샤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난 사미아가 옷을 툭툭 털어 정리했다.
곁에 선 테시아도 그 모습을 따라 누나의 옷을 툭툭 쳤다.
검은 머리에 연둣빛 눈동자, 저와 꼭 닮은 얼굴을 한 동생이 제 행동을 흉내 내는 것이 귀여운지 사미아가 작게 키득거렸다.
“사미아.”
그러나 그것은 너무 이른 웃음이었다.
사미아는 제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싸늘한 것을 느끼며 움찔 몸을 떨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어머니의 부름이었으니 당장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미아.”
“어, 어머니…….”
가까스로 몸을 돌려 세리나아를 바라본 사미아는 환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하곤 심장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저리 웃을 때가 제일 무서웠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테시아가 있던 방향으로 눈을 돌려 보았지만 생존 본능 하나는 타고난 동생은 이미 아비의 품에 안겨 이쪽을 모르는 척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리 오렴.”
“……네.”
발을 질질 끌며 최대한 느리게 움직여 보지만 어머니의 넓은 방이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좁았다.
“사미아,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전에도 이 어미가 부탁하지 않았니.”
“네에…….”
“그런데 또 친부모를 찾겠다고 했다지?”
“그게…….”
“네 눈에는 내가 친어미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구나.”
“아, 아니에요!”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여 보지만 세리아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얼굴의 모든 근육을 사용해 환하게 웃고 있지만 그 눈만큼은 절대로 웃고 있지 않는 상태였다.
“세리아나, 나의 라누아. 그건 사미아가 농담 삼아…….”
“쿠드라. 지금 제가 사미아와 말하고 있잖아요.”
“……미안.”
웃으며 화를 내는 세리아나는 무적이다.
사미아가 단 한 번이라도 이겨 보길 간절히 원하는 바이샤도 이기지 못한다.
물론 평소에도 이기지는 못하지만 이때엔 정말 찍소리도 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나와 아버지를 두고 친부모를 찾겠다고 소란을 피워.”
“잘못했어요…….”
“거기다 배움터에서 또 도망쳤다고 들었다.”
“…….”
“나카는 훌륭한 선생님이야. 그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걸 감사히 여겨도 모자란데 도망을 치다니. 이번이 몇 번째인지 알고 있니? 배움터에서 네가 도망갔다며 심부름꾼을 보낼 때마다 이 어미가 고개를 들 수 없구나.”
“죄송합니다…….”
세리아나의 잔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하는 말마다 맞는 말인 데다 저지른 잘못이 있어 사미아는 숨소리마저 조심스럽게 내 가며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것은 저지른 죄가 없는 바이샤와 테시아마저도 세리아나에게 혼이 나고 있는 느낌을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이샤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이며 이 오아시스의 여왕인 세리아나는 인내가 깊은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화를 낼 만한 일도 웃음으로 참아 넘긴다.
가끔은 바이샤와 치아린이 너무 무르다 한소리를 보탤 정도로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속이 깊은 호수의 물은 어지간해선 넘치는 법이 없지만 한번 선을 넘어 넘치기 시작하면 그 끝을 짐작할 수 없는 법이다.
세리아나가 그런 호수 같은 사람이었다.
참고 참고 참다가 터져 버린 그녀의 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세, 세리아나.”
“바이샤도 그래요. 어떻게 저 작은 아이를 그렇게 바닥에 내팽개칠 수 있나요? 사미아는 이제 열두 살이에요. 다치기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그러세요.”
“어, 엄마. 나 착지 잘했는데…….”
“아이 엉덩이에 시퍼런 멍이 들었어요. 아세요?”
“미안…….”
“사미아 너도 그래. 대책 없이 덤벼드는 짓은 하지 말라고 몇 번을 일렀는데. 지금만 해도 잠들어 있는 아버지에게 주먹을 날렸잖아. 그 곁에 네 동생이 잠들어 있는 건 보이지도 않았니?”
“엄마…… 무셔워…….”
테시아가 바이샤의 품에 파고들며 울먹거렸다.
무섭다.
무서울 수밖에 없다.
말로 조근조근 사람을 때리는데 표정 하나만큼은 웃는 얼굴 그대로이니 암만 뛰어난 사막의 전사라도 이길 길이 보이지 않았다.
묵혀 두었던 잘못까지 전부 들고나와 잔소리를 이어가는 세리아나 덕분에 모두가 벌을 받고 있던 그 시각, 그들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세상에, 대체 누가 제 라누아를 저리 화나게 만드신 거죠?”
치아린이었다.
카얀과 함께 방으로 들어온 치아린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후 세리아나 곁으로 다가가 흥분한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라누아, 심호흡하세요. 그렇게 한 호흡에 말씀하시면 몸에 좋지 않아요.”
“하지만 치아린…….”
“그렇게 화를 내셔도 저기 저분들은 또 똑같은 일을 벌이실 텐데 라누아만 힘드세요. 자, 어서 숨 쉬세요, 숨.”
구원자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놀릴 건수를 잡은 것인지 환히 웃는 치아린의 얼굴이 얄미웠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미아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듯 바이샤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치아린, 또 똑같은 일을 벌이다니. 그러지 말라고 내가 이러고 있는 거잖아.”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이번엔 치아린도 진정시킬 수 없는 수준이었나보다.
치아린의 손에 이끌려 소파에 앉은 세리아나가 그녀에게까지 잔소리를 시작하는 것을 보며 바이샤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테시아가 가진 강한 생존 본능은 바이샤가 물려준 것이었다.
그것으로 몇 번씩 위기를 넘겨 왔던 바이샤는 이번에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아빠, 엄마가 엄청 화난 거 같은데…….”
“방법, 찾는 중이다.”
“아빠, 믿어요.”
배움터에 들어간 이후 하지 않던 아빠, 엄마 소리까지 해가며 제게 매달리는 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위기감이 더 강해진다.
테시아와 함께 제품으로 파고드는 사미아의 등을 도닥이던 바이샤의 눈에 바샨타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오는 카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이전부터 준비해 왔던 일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바다!”
뜬금없는 그의 외침에 방 안에 모인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한꺼번에 쏠린 시선에 기가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상대는 바이샤였다.
두 아이를 양쪽 팔로 안아 들곤 자리에서 일어난 바이샤가 호박색 눈을 반짝이며 카얀을 향해 명령했다.
“일전엔 말한 흰 모래사막을 건널 마차는 어찌 되었지?”
“말씀하신 대로 제작해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좋아, 당장 가지.”
“명을 받습니다.”
의문은 없었다.
바이샤의 결정에 순순히 고개를 숙인 카얀이 물러나고 치아린이 짧은 여행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바이샤가 명하고 아랫사람들이 따르는 모습을 하루 이틀 보아온 것은 아니지만 오늘만큼 순식간에 결정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바이샤, 바다라니요?”
“당신이 오아시스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약속했잖아. 바다를 보여 주겠다고.”
“네?”
그의 말에 기억을 더듬던 세리아나는 이곳에 와 처음으로 함께 즐겼던 소풍을 떠올릴 수 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반짝이던 오아시스의 수면과 차양 아래 앉아 그것을 바이샤와 함께 감상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스쳐 가듯 바다를 본 적 없다고 말했던 것도 같았다.
“분명 바다를 본 적이 없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약속이라뇨? 그런 약속은 한 적 없어요. 착각하신 거 아니에요?”
“했어. 나 혼자.”
“네?”
“언젠가 당신에게 바다를 보여 주겠다고 나 자신에게 약속했지.”
그런 것을 약속이라고 부르던가? 보통은 약속이라 부르지 않는 것을 뻔뻔하게 약속이라 우기며 이제부터 바다를 보러 갈 것이라 말하는 바이샤를 세리아나는 한동안 멍하니 바라만 봐야 했다.
그의 충동적인 언행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그녀의 남편은 죽을 때까지 그녀에게 이리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줄 모양이었다.
* * *
얼렁뚱땅 결정된 짧은 여행길에 오른 세리아나는 네 가족이 누워 뒹굴기에 충분한 크기의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진짜 여행을 준비하고 있기는 했던 모양인지 입자가 곱고 쉽게 무너지는 흰 모래사막 위를 달리면서도 흔들림이 없는 마차였다.
말이 아닌 낙타 여러 마리가 이끄는 마차 안에서 세리아나는 저만큼이나 들떠 가만있지를 못하는 아이들을 보며 웃고 있었다.
“어머니. 바다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해요?”
“가야 해요?”
“글쎄, 어미도 이번이 처음이라 잘 모르겠구나.”
들뜬 아이들을 진정시키는 건 포기한 지 오래다.
마차의 창문에 매달려 바이샤에게, 카얀에게, 그리고 치아린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사미아와 테시아를 보며 세리아나는 자신의 마음도 조금씩 들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미시와 바샨타는 얌전하구나.”
“쟤네 내숭 떠는 거예요.”
“내숭이야!”
세리아나의 눈치를 살피며 들썩이는 엉덩이를 애써 마차 바닥에 붙이고 있던 아미시와 바샨타도 결국 어린아이들이었다.
세리아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허락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아이와 합류해 바다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 묻는 통에 마차 밖에서 바이샤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차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 해와 달이 자리를 두 번 바꾸었고 들떠 있던 아이들은 조금씩 지쳐 수시로 아직도 멀었느냐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말로 아이들을 달래 가며 달리기를 수어 시간, 마차 안이 답답하다며 바이샤와 함께 말을 타고 움직이던 사미아가 소리를 질렀다.
“바다다!”
그 외침에 세리아나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던 테시아가 눈을 떴다.
“바다!”
아이가 젖힌 창문의 덮개 너머로 짠내 나는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차가 움직임을 멈췄다.
‘빨리, 빨리’를 외치는 테시아를 먼저 마차 밖으로 내보내고 천천히 그 뒤를 따라 내린 세리아나는 백사장 너머 시야를 가득 채우는 새파란 바다를 보며 입을 벌렸다.
수많은 강물이 모여 바다가 된다 읽었지만 책은 바다가 이렇게 넓고 아름답다는 건 알려 주지 않았다.
“어때?”
바다를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는 세리아나 곁으로 다가온 바이샤가 물었다.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자연스럽게 그 머리에 입을 맞춘 바이샤는 세리아나와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도가 철썩이는 바닷가를 뛰어노는 아이들과 차양을 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시종들.
몰래 따라와 어느새 치아린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은 아로. 그리고 두 사람처럼 서로에게 다정히 기댄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치아린과 카얀.
이들의 모습이 세리아나와 바이샤의 두 눈에 담겼다.
“너무…… 아름다워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담긴 것은 눈에 보일 듯 선명한 기쁨이었고 바다로부터 눈을 돌려 저를 바라보는 연둣빛 눈동자에 담기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우리만치 넘치는 사랑이었다.
바이샤와 세리아나는 이 아름다운 순간이 꿈처럼 흩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다시 바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서로가 마주 잡은 두 손 위로 파도에 반사된 햇빛 반짝이고 있었다.
-외전 끝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휘드리안입니다. <거울 너머의 연인>과 함께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말과 시선이 있어 세리아나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여러분들의 응원에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 응원을 바탕으로 빠르게 차기작을 준비해 여러분께 다시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마지막으로 삽화를 맡아주신 갱구 님과 출판사, 그리고 네이버 담당자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