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109화 (109/110)

#109. 외전 4. 사미아 쿤 (2)

“사미아는 선택해야 해.”

“무슨…… 아……!”

사미아는 올해로 열두 살이 되었다.

쿠드라와 라누아의 첫 번째 자식은 아홉 살이 되는 해 신을 섬길 다른 이의 두 번째 자식을 선택하고 열두 살이 되는 해 두 번째 우기가 오기 전까지 어미와 아비가 가진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것은 다른 이의 첫 번째 자식이 부모의 모든 것을 물려받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가 지닌 것은 절대로 하나가 되어선 안 되니까.”

쿠드라와 라누아가 나누어 가진 힘은 절대 하나가 되어선 안 된다.

서로를 보좌함과 동시에 서로를 경계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미아는 쿠드라와 라누아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했다.

“사미아는 당신이 걸어온 길을 원하는걸요.”

“그러면서 당신이 가진 온화함을 탐하지.”

“욕심이 많은 건 나쁜 게 아니에요.”

“그러는 당신은 욕심이 없잖아.”

“바이샤 당신이 잘 몰라서 그래요. 제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데요.”

제 욕심의 크기를 보여 주려는 듯 바이샤의 목에 팔을 감은 세리아나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 웃음에 답하듯 세리아나의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준 바이샤가 입을 맞추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어무니! 아부지!”

만약 치아린의 손을 잡고 들어온 둘째가 아니었다면 낮부터 진한 부부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테시아, 낮잠을 잘 시간이잖니.”

황급히 바이샤의 품에서 벗어난 세리아나가 짧은 다리로 빠르게 걸어와 두 팔을 벌리는 아들을 안아 들었다.

세리아나가 빠져나간 허전한 품을 내려다보고 있던 바이샤는 좋은 분위기를 망친 아들을 노려볼 수 없어 괜히 치아린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테시아 님이 어머니의 품이 그리우시다는데 제가 무슨 힘이 있나요.”

얄밉게 웃으며 말하는 치아린의 모습에 혀를 짧게 찬 바이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아들을 안고 선 세리아나를 다시 제 품에 당겨 안았다.

아들과 아내를 동시에 품에 안으며 만족한 듯 미소 지은 바이샤가 방긋 웃는 테시아와 눈을 맞추었다.

“네 누나가 또 친부모님을 찾으러 도망을 쳤다는구나.”

“어무니 아부지 여기 있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손위 형제가 있는 둘째가 그러하듯 테시아는 무엇이든 빠르게 익혔다.

걸음도 빨랐고 말도 빨랐다.

고작 세 살에 어설프게나마 어머니,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만 보아도 사미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누나는 한참 있다가 돌아올 것 같으니 테시아는 엄마랑 낮잠 잘까?”

“응! 어무니랑 낮잠! 아부지도!”

“다른 사내놈이랑 침대를 나누는 건 취미가 없는 일인데.”

“……테시아를 두고 그런 농담을 하면 각방이라고 일주일 전에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요?”

“미안, 잘못했어.”

“…….”

“진짜야. 테시아, 이리 오렴. 아버지랑 같이 자자.”

“응!”

눈을 흘기는 세리아나를 못 본 척 그 품에서 테시아를 빼앗아 안은 바이샤가 서둘러 가림막 너머 침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치아린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 있는 세리아나 곁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답니다, 라누아.”

“어떤 점이?”

“이젠 미안하다는 말씀이 입에 붙은 분처럼 굴잖아요. 아니, 어떻게 저렇게 재깍 미안하다는 말이 나와요? 제가 아는 쿠드라가 맞기는 한가요?”

오만하고 콧대 높던 바이샤가 사과라니. 물론 상대가 세리아나이니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모습에 치아린은 여전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과거 세리아나를 알기 전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에게 바이샤가 이렇듯 쉽게 사과를 하는 날이 온다고 말하면 미친년이라 욕을 먹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치아린의 그런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세리아나가 치아린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우리 사랑스러운 따님은 이번엔 어디서 친부모를 찾을 예정이시래?”

“이번엔 가타한까지 가 보실 생각이신가 봐요. 대책 없는 모습이 딱 쿠드라의 어린 시절이에요.”

“세상에…… 우리 사미아는 용감하기도 하지.”

“……사미아 님의 그런 성격에 라누아의 그런 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거…… 아시죠?”

바이샤에겐 모르는 척 욕을 날려도 차마 제 주인에겐 그럴 수 없었는지 애써 둘러가며 세리아나를 타박한 치아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 아름답고 상냥한 주인에게서 바이샤의 느낌이 묻어난다 생각하면 불경한 일일까?

“해가 지기 전까진 돌아올 수 있게 해 줄래?”

“노력하겠습니다.”

“정말로 오아시스를 벗어나려 하는 것 같으면 꼭 말려 줘야 해, 알지?”

“제가 말린다고 듣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치아린, 부탁해. 응?”

“하아…….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웃는 얼굴로 명령이 아닌 부탁을 하시니 어찌 제가 거절할까요.

치아린은 제 아름다운 주인이 아들과 남편이 기다리는 침실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후 조용히 물러나 방을 빠져나갔다.

아이들의 위치는 카얀이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진짜 오아시스를 빠져나가려 하기 전에 그와 합류해 그것을 막을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한편 배움터를 뛰쳐나온 사미아와 아미시, 바샨타는 말과 낙타를 가둬 놓은 우리 앞에 모여 열띤 토론을 진행하고 있었다.

사미아는 기동성을 위해 말을 타고 가야 한다 주장했고 아미시는 먼 길이니 낙타를 타고 움직이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바샨타는 말이고 낙타고 우리의 몫은 없으니 소모적인 논쟁은 그만두라 두 사람을 말리고 있었다.

“바샨타는 왜 그렇게 부정적이야! 우리 몫이 없으면 몰래 훔쳐서 타면 되잖아!”

“쿠드라와 라누아의 첫 번째 자식이신 분이 도둑질을 하겠다는 소리야?”

“그게 어째서 도둑질이야. 오아시스의 모든 것은 쿠드라와 라누아의 것이고 그 말은 곧 그것들이 전부 사미아 님의 것이 될 거라는 소리잖아! 바샨타는 그것도 몰라?”

“예정이잖아, 예정! 더군다나 사미아 님은 아직 어느 길로 갈지 선택도 안 했다고!”

“이제 곧 할 거야!”

“그러니까 그 선택부터 먼저 하시라고!”

우리를 지키고 있는 전사들이 키득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이내 바샨타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으로 소모적인 논쟁이 끝났다.

씩씩거리며 노려보는 그의 모습에 평소라면 불경하다고 외치며 더 난리를 피웠을 사미아가 어쩐지 조용했다.

마땅히 따라와야 할 외침이 들려오지 않자 아미시와 바샨타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미아 님 왜 그러세요?”

“사미아 님? 혹시 제가 반말을 해서 그럽니까? 아니, 제가 그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래요, 불경한 바샨타가 불경한 말을 입에 담은 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많이 거슬리셨어요? 제가 한 대 때릴까요?”

두 아이가 사미아의 양쪽에 바짝 붙어서서 달래듯 말을 붙여 보았지만 사미아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으로 대화를 주고받던 바샨타와 아미시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복잡할 땐 오아시스죠.”

“저희가 모실게요, 사미아 님.”

그러곤 대답도 듣지 않고 양쪽에서 팔짱을 낀 채 사미아의 몸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마치 죄인을 포박해 이송하는 모습으로 오아시스에 도착한 세 아이는 말이 없었다.

이 나이대의 아이들이라면 참기 힘든 침묵이었지만 아미시와 바샨타는 참을성 있게 사미아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내가 쿠드라가 되어도 되는 걸까?”

“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어?”

사미아의 입이 드디어 열리고 아미시와 바샨타는 당황했다.

입만 열면 사막 최고의 전사가 되겠다거나 누구보다 강한 쿠드라가 되겠다고 외치던 사미아였다.

그런 그녀가 이런 약한 소리를 하다니…….

“선택의 날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러세요?”

“쿠드라는 사막의 가장 강한 전사잖아.”

“그렇죠.”

“아미시, 내가 제일 앞에서 싸우는 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네.”

“아버지한테 한 번도 못 이겼는데?”

“지금 그분을 이기면 사미아 님이 사람입니까? 괴물이지?”

“바샨타, 닥쳐.”

“넵.”

입을 다문 바샨타가 히죽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뭔가 심각한 고민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또래의 아이 중 가장 월등한 전투 감각을 가진 이의 이름을 물으면 배움터의 모두가 입을 모아 사미아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칭찬이 박한 나카 역시 그 아비에 그 딸이라며 타고난 전투 센스를 칭찬하곤 했다.

부족한 것은 힘. 그러나 아직 어린 사미아였다.

힘을 키울 시간은 충분했으니 그것은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지금 사미아가 사서 하고 있는 걱정은 정말로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소리였다.

“사미아 님이 쿠드라가 되지 않는다면 누가 그분의 뒤를 이을 수 있겠어요.”

“아버지처럼 강해진 모습이 상상이 안 된단 말이야.”

“사미아 님이 라누아처럼 우아하게 자리에 앉아 데옴을 진행하는 모습이 더 안 그려지는데.”

“바샨타, 닥치라고 좀.”

사미아가 바샨타를 있는 힘껏 노려보자 아미시가 일어나 그의 엉덩이를 걷어찬다.

늘 있는 일인지 자연스럽게 이어진 연계 행동에 바샨타가 모르는 척 달아나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분명한 그의 모습에 ‘기왕 마음 쓰는 거 좀 얌전한 방법을 택하면 안 되는 걸까?’ 속으로 중얼거린 아미시가 다시 사미아 곁으로 다가갔다.

“우기가 다가오는데 실력이 느는 것 같지 않아 걱정되시는 거죠?”

“응.”

“조급해져서 어제 대련 시간에 성급히 움직이셨고요?”

“……응.”

“쿠드라께서 바닥에 패대기치신 게 자존심 상하세요?”

“……패대기는 아니다 뭐. 착지…… 잘했거든?”

“엉덩이에 멍든 거 제가 봤는데요?”

“……지금 나 위로하던 중 아니었어?”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리는 사미아의 곁에 엉덩이를 당겨 바짝 붙어 앉은 아미시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미아 님께선 쿠드라를 아주 많이 닮으셨어요.”

“…….”

“언제나 자신만만하시고 유쾌하시고 강하신걸요.”

“닮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흠…… 사미아 님. 그거 아세요?”

“응?”

“시간은 사미아 님 편이에요.”

무릎을 세우고 앉아 얼굴을 살짝 비스듬히 비튼 아미시가 웃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미아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아미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것이다.

“불충한 말이지만 쿠드라와 사미아 님의 남은 시간은 다른걸요.”

“와, 그거 진짜 불충한 말이다.”

”그러게요. 저처럼 착한 아이가 이런 불충한 말을 입에 담다니. 이게 다 바샨타랑 붙어 다녀서 그래요.“

“어?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아 그런데 남은 시간이 달라도 사미아 님이 쿠드라를 이기는 건 좀 힘들 것 같기도 하고?”

“뭐래?”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난 사미아의 얼굴엔 어느새 자신만만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얼핏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웃음이 바이샤의 것을 닮았다고 하면 두 부녀는 입을 모아 난 저렇게 재수 없게 웃지 않는다며 화를 낼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 모습을 보여 주지.”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튀는 건지 설명 좀 해 주실래요? 저 지금 사미아 님을 위로하는 중이었는데?”

“좋은 도발이었어, 아미시!”

“아니, 잠깐만요, 사미아 님! 도발이 아니야! 멈춰요!”

수풀 사이에 숨겨진 길을 따라 모습을 감춘 사미아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아미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위로에 약간의 응원을 더한다는 게 그것이 과하게 주입된 모양이었다.

뒤끝이 없는 건 사미아의 최대 장점이었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성숙한 고뇌를 저런 식으로 날려 버리다니.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던 기회를 걷어차 버린 느낌에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사미아 님께서 또 네 예상을 엎어 버린 모양이구나.”

“아, 어머니!”

언제 온 것인지 치아린이 아미시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모래톱에 앉아 있는 아이의 손을 붙잡아 부드럽게 일으켜 세운 치아린은 웃는 얼굴로 아미시의 옷에 묻은 모래를 털어 주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섬기는 분들은 절대로 우리의 예상대로 움직이질 않으신단다.”

“언제나요?”

“응, 언제나. 그러니 우리의 머리로 그분들의 다음 행동을 예상하고 판단해선 안 돼. 늘 말하지만 우리는…….”

“우리는 판단하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는다. 그저 따르고 섬길 뿐이다. 맞죠?”

“그래.”

아미시의 볼을 살짝 쓰다듬은 치아린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바샨타와 함께 걸어오고 있는 카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헬라임의 품에 안기기 전에 누릴 수 없을 거라 믿었던 축복이 여기에 있었다.

치아린은 자신에게 이런 행복을 내려 준 세리아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지금쯤 사미아 님이 라누아의 방에 도착하셨겠구나.”

“그리고 쿠드라께 덤벼들어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셨겠죠.”

“테시아 님의 낮잠 시간이 이렇게 끝나네.”

“……왜 거기서 주무시고 계셔요?”

“부전자전이라 라누아를 너무 좋아하시니 어쩌겠니.”

“쿠드라께선 질투 안 하셨어요?”

“하셨다가 쫓겨나시려고?”

“사미아 님께선 사막에서 가장 강한 분이 되고 싶어 쿠드라가 되고 싶다 하신 건데…… 지금이라도 진로를 바꾸셔야 할까요?”

“그러다 라누아께 승부를 겨루자며 덤벼들면 큰일이잖니? 고난은 쿠드라께 미뤄 두렴.”

신이 맺어 준 모녀는 온화한 얼굴로 여상한 말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오아시스를 벗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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