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외전 3. 평온하고 평안한 (2)
“사미아.”
“응?”
“아침 식사는?”
“먹었어! 맛있었어!”
“그럼 이르지만 아빠랑 같이 간식…… 먹을까?”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딸의 이름을 부른 바이샤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항아리를 가져와 그 안에서 꿀에 절인 대추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사미아의 눈앞에서 좌우로 느리게 흔들었다.
바이샤는 딸에게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확인하고 제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달콤한 간식을 좋아하는 사미아였지만 최근 그녀는 그것들을 제 양껏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딸의 이가 썩을까 세리아나가 달콤한 간식의 양을 제한한 것이다.
세리아나의 눈을 피해 몰래 먹을 수도 있었지만 엄마를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미아는 자신이 가진 모든 인내를 동원해 엄마의 명을 따르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빠라는 사람이 엄마가 금지한, 특히 사미아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꿀에 절인 대추로 유혹하기 시작했다.
눈에 안 보인다면 모를까, 꿀이 뚝뚝 떨어지는 반들반들한 대추를 보고 있으려니 눈동자가 떨리고 입안에 침이 절로 고였다.
“어, 엄마가 안 된다고 그랬는데…….”
“밥도 먹었고 어차피 곧 간식 시간이니 괜찮다.”
“하, 하지만…… 엄마가…….”
“우리 둘만 아는 비밀로 하면 되지.”
“……진짜?”
“난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
그거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이미 눈앞에 흔들리는 유혹에 홀랑 넘어가 버린 사미아였다.
아이는 아비의 손을 덥썩 잡아 작은 입으로 대추를 삼켰다.
혀끝에서부터 시작된 달콤함이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두 뺨에 손을 올린 사미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바이샤는 입을 오물거리며 온몸으로 행복해하고 있는 딸을 보며 입꼬리를 당겨 소리 없이 웃었다.
제 손의 음식을 받아먹으며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세리아나와 완전히 닮은꼴이라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맛있니?”
“응!”
바이샤가 내민 손바닥에 대추 씨를 퉤 하고 뱉은 사미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다시 작은 항아리를 곁눈질하며 어떤 기대를 내비치는 모습을 확인한 바이샤는 자신의 완벽한 승리를 자축했다.
곁에 카얀이 남아 있었다면 어린 딸을 상대로 유치하게 뭐 하는 짓이냐 눈빛으로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
“사미아, 내 사랑하는 딸.”
“응?”
“뭐든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단다. 그게 공정한 거래야.”
자신에게 유리한 거래밖에는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정을 알 리 없는 사미아는 또다시 눈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달콤한 간식의 유혹을 이겨낼 수 없었다.
“내가 말했다고 하면 안 돼요.”
“말 안 하지.”
“진짜루?”
“진짜.”
“정말이지?”
“정말.”
사미아의 마음이 바뀔까 아이의 입에 꿀에 절인 대추를 쏙 넣어 준 바이샤가 웃는 얼굴로 아이를 달랬다.
달콤한 과육을 씹으며 다시 행복한 얼굴이 된 사미아는 다시 제 아비가 펼친 손에 대추 씨를 뱉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 말해 봐, 엄마가 뭐라고 했지?”
“내가 아직도 믿음직스럽지 못한가…… 라고 했어요. 그리고 또…….”
“또?”
“이래서는 평생 아빠한테 짐이 될 것 같다고도 했어요. 언제쯤 제대로 한 사람 몫을 하게 될까? 라고도 했고…….”
“그만 됐다.”
손을 쫙 펼친 채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가며 말하는 모양이 열 손가락을 전부 다 접을 때까지 말할 기세였다.
바이샤는 사랑스러운 딸의 입에 꿀에 절인 대추를 한 개 더 물려 주며 아이의 입을 막았다.
세리아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물론 이 사막에 처음 왔을 땐 모든 것이 서툴렀던 그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지금 그녀는 어떠한가. 느리지만 차근히, 누구보다 강인하게 변화했다.
사막에서 태어난 이들보다 더 사막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 이 모래땅의 풍요로운 오아시스를 가장 완벽하게 다스리고 있는 이가 바로 세리아나였다.
그런데 아직까지 자신이 부족하다 여기고 있을 줄이야. 물론 그 불안의 씨앗을 던져 준 것이 자신임은 알고 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세리아나에겐 분명 그리 들렸을 것이다.
제 얄팍한 질투심을 감추려 그리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제 마음을 고백해야 했었다.
“엄마는 오아시스에 산책을 간다구 했어요.”
“그래?”
“응.”
“그렇군.”
잠깐 생각에 잠겼던 바이샤가 제 허벅지 위에 앉은 사미아를 제 옆자리에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일어나려는 딸의 품에 간식이 담긴 작은 항아리를 안겨 준 그가 창문을 넘었다.
멀쩡한 문을 놔두고 창문으로 넘어 다니는 버릇은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할 것이라 투덜거리던 치아린의 목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바이샤가 사라진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이제는 제 것이 된 작은 항아리의 뚜껑을 연 사미아가 무척이나 만족한 모습으로 웃음 지었다.
이것까지 노리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것이다.
“엄마가 화났다는 말도 했구, 비밀이라는 말도 했구…….”
냠, 하는 소리를 내며 꿀에 절인 대추 하나를 입안에 던져 넣은 사미아는 이곳에 오기 전 만난 치아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갔다.
“엄마가 오아시스에 있다는 말까지 전했으니까 내 임무는 끝!”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든가 짐이라든가 등등의 말은 세리아나가 한 말은 아니었지만 치아린이 꼭 바이샤 앞에서 해야 한다고 알려 준 말들이었다.
듣지도 않은 것을 들은 것처럼 전하는 것은 나쁜 일이었지만 부모님의 화해를 위해선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했기에 정말로 ‘어쩔 수 없이’ 사미아는 그 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맹세컨대 치아린이 주기로 약속한 달콤한 간식에 넘어가서 한 일은 절대로 아니었다.
“엄마도 아빠도 내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정말.”
소파에서 내려와 의기양양한 포즈로 그렇게 중얼거린 사미아가 아비가 제 품에 안겨 준 작은 항아리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조만간 아이의 부모는 화해할 것이고 그러면 이 항아리의 소유권은 이 사막에서 제일 강한 사람에게 넘어갈 것이다.
“엄마한테 들키기 전에 숨겨야 해!”
사미아는 사막에서 두 번째로 강한 제 아비가 어미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아 주기를 헬라임께 기도하며 저만의 비밀 장소로 달려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딸이 저를 사막의 이인자라 칭하는 것을 알 리 없는 바이샤는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듐마저 물리곤 오아시스로 향했다.
제 눈에는 여전히 여리기만 한 아내가 제 잘못이 아닌 일로 자책하는 것을 오래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리아나.”
사미아의 말처럼 오아시스엔 세리아나가 홀로 서 있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함인지 치아린도 없이 홀로 모래톱을 걷고 있는 세리아나는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바이샤? 어떻게 여기에?”
“미안.”
“……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뛰듯이 빠르게 걸어와 세리아나를 끌어안은 바이샤는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추며 무작정 잘못했다 사과했다.
오아시스로 향할 때만 해도 세리아나의 화를 달랠 만한 여러 가지 달콤한 말들을 떠올리던 바이샤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계획은 세리아나를 발견한 순간 사라졌다.
사죄에 무슨 달콤함이 필요하단 말인가? 필요한 것은 진심뿐이었다.
“바이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속 좁게 굴어서 미안해.”
“……아!”
앞뒤 없는 사과에 잠시 당황했던 세리아나는 곧 그의 사과가 어젯밤에 있었던 작은 다툼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이샤가 저를 믿지 못해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혼자만 말을 뱉는 것이 얄미워 아주 조금 골탕을 먹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거기다 조금 알아봐야 할 것도 있었고…….
“당신이 못 미덥다거나 부끄러워 그런 게 아니야. 오히려 자랑하고 싶지. 그런데 가끔은 아무도 보지 못하게 꼭꼭 숨겨두고 싶은 마음이 커져.”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는 말씀이시죠? 왜요?”
“……카디마 여왕의 수행원 중에 키륜이 있더군.”
“세상에, 바이샤!”
바이샤의 가슴을 살짝 밀어 그 품에서 벗어난 세리아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필이면 키륜이라는 이름에 반응한 이유가 너무 선명히 그려진 탓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키륜과의 인연이 스친 것이 몇 년 전의 일인데 아직도 그 이름에 반응할 줄이야! 세리아나의 웃음이 길어질수록 바이샤의 얼굴이 뚱하게 변해 갔다.
세리아나의 웃는 얼굴은 보기 좋지만 하필이면 저의 못난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만 웃어.”
“나의 쿠드라께서 이리도 귀여우신 걸 누가 또 알까요.”
“당신만 알면 되지.”
“후훗.”
바이샤가 두 팔을 벌리자 못 이기는 척 그 품에 다시 안긴 세리아나가 그의 턱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사내든 여인이든 남들이 제게 어떤 관심을 가지든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그래.”
“제 마음속에 담은 분은 당신뿐이라 다른 이가 들어올 자리 같은 건 없는걸요.”
“그래도…….”
제 허리를 감싸 안은 바이샤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세리나아가 미소 지었다.
이 독점욕이 싫지 않았다.
질투는 기쁘기까지 하다.
제 눈에 담긴 유일한 사람이 자신임을 알면서도 안달 내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아 웃음이 절로 흘렀다.
“제겐 바이샤뿐이에요.”
“나도 그래.”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그러니 믿어 주세요. 네?”
“믿어. 믿지만…… 후우, 아니야. 어제는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러도록 노력하지.”
“그건 노력 안 하셔도 되는데?”
“……뭐?”
“이상하죠? 당신이 가끔 그렇게 질투해 주시면 저는 조금 기쁘더라고요.”
자신을 놀리는 것인가 싶어 세리아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바이샤는 그녀가 진심으로 그리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들었다 놓았다 아주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모습에 화는커녕 웃음만 흘러나왔다.
웃고 있는 세리아나의 이마와 볼, 입술에 수차례 입을 맞춘 바이샤가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화는 풀린 건가?”
“화요?”
“사미아가……. 아니, 내가 당한 모양이군.”
미소 띤 얼굴로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자신이 저의 사랑스러운 딸에게 속아 넘어갔음을 알아차린 바이샤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미아 혼자 한 짓은 아닐 테고…… 분명 치아린의 입김이 들어간 거짓말일 것이다.
‘놀려 먹을 기회다 싶었겠군.’
뭐든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한다.
조금 많이, 아주 유치한 생각이었지만 바이샤는 딸을 상대로 소소한 복수를 계획했다.
모든 몸으로 익히는 것이 최고였으니 이번에도 그는 딸에게 아주 귀한 가르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치아린도.
“일단 항아리부터 회수해야겠군.”
“네?”
“혼잣말이야.”
일단은 조금 전 아이의 품에 곱게 안겨 준 작은 항아리를 회수하는 일부터 시작할 것이다.
제 거짓말이 탄로 날 것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테니 분명 그것을 저만의 비밀 장소에 숨겼겠지. 그러나 아이가 찾은 비밀 장소라고 해 봐야 전부 바이샤의 손바닥 안이었다.
이 오아시스 안에 바이샤가 모르는 장소 같은 건 없었으니까.
세리아나가 이 생각을 알았다면 아이를 상대로 무슨 유치한 짓이냐며 진심으로 화를 낼 것이다.
그러니 아내가 모르도록 해야 한다.
기왕이면 사미아도 세리아나에게 자신이 한 짓을 고자질할 수 없도록 이중 삼중의 장치도 마련해야지.
바이샤는 어린 딸과 한바탕 놀아 볼 생각에 오랜만에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이샤? 왜 그런 얼굴이에요?”
“어떤 얼굴?”
“음…… 악당의 얼굴? 누굴 괴롭힐 생각에 들떠 있는 것 같은?”
“역시 내 라누아께선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으시군.”
“네?”
“그런데 화가 난 게 아니라면 어젯밤엔 왜 그런 거야?”
보란 듯이 말을 돌리는 바이샤의 모습에 세리아나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뻔뻔한 모습도 사랑스러운 것을 보면 제 사랑은 중증이라 고칠 약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혼자 알아볼 게 있어서요.”
“내가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나?”
“당신을 놀라게 해 주고 싶었거든요.”
뻔히 말을 돌리는 것이 보였음에도 모르는 척 바이샤의 물음에 답하며 세리아나가 몸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그의 품에 안긴 채 몸을 살짝 비튼 것이라 그녀의 허리에 감긴 바이샤의 손은 그대로 머무른 상태였다.
“바이샤.”
“응?”
“손요.”
세리아나의 요청에 순순히 한쪽 손을 내어 준 바이샤는 그다음에 이어진 그녀의 행동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여기요.”
“세리아나?”
“우리에게 또 하나의 선물이 찾아왔어요.”
바이샤의 손을 끌어 제 아랫배 위에 올린 세리아나가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다.
몸의 이상을 느끼고 혹시나 해 바이샤 몰래 치료사를 불러들여 어젯밤 확인한 사실이었다.
사미아를 낳고 오래도록 소식이 없어 둘째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선물처럼 새로운 생명이 다시 그녀의 안에 자리를 잡았다.
“세상에! 세리아나!”
크게 웃음을 터트린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기대한 적 없는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그의 품에 안겨 세리아나 역시 활짝 미소 짓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도 평온하고 평안한 오아시스에서 있었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