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외전 3. 평온하고 평안한 (1)
세리아나가 화가 났다.
그녀를 조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 그분도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대체 누가 무슨 잘못을 얼마나 크게 저질렀기에 그 온화하신 분이 화를 내느냐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아주 많이 잘 아는 사람은 고민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전부 쿠드라께서 잘못하신 겁니다.”
바이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하는 카얀의 모습에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요즘 들어 그의 충실한 종이 불충한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라누아께서 왜 화가 나셨는지 아는 건가?”
“모릅니다.”
“……그런데 내 잘못이라 확신한다?”
“네.”
“어째서?”
“그분이 화내실 일이 달리 뭐가 있겠습니까?”
확신이 담긴 카얀의 태도에 대답이 궁해진 것은 바이샤였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세리아나가 화가 난 건 전적으로 그의 잘못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 잘못한 거 같지는 않은데…….”
물론 순순히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아주 조금, 정말로 아주 조금만 남편의 권리를 행사하고자 했을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아주 진짜 정말로 조금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짓이라니. 결혼식까지 올렸다고 이젠 치아린이랑 똑같이 불충하게 굴기로 작정한 거냐?”
“그럴 리가요. 그저 어젯밤 보기 좋게 쫓겨나신 이유를 이제야 여쭙게 되었을 뿐입니다.”
“쫓겨나긴 누가?”
“…….”
이번엔 입까지 다물고 눈빛으로 대답한다.
평소라면 울컥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켕기는 것이 있는 바이샤가 슬쩍 카얀의 시선을 외면했다.
일의 발단은 ‘대륙회의’였다.
바이샤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냉정하게 평가했지만 대륙회의가 가지는 순기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뒤에 변질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 회의가 만들어진 목적은 나라 간의 정기적인 교류를 통한 대륙의 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들의 계속된 요청도 있었고 세리아나의 권유도 있었기에 다시 대륙회의에 참여하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2년. 어떻게 되어 먹은 순번인지 올해 대륙회의의 장소는 차이툰이었다.
중간에 사라진 나라도 하나 있었고 순번이 꼬인 것쯤이야 얼마든지 이해해 줄 수 있었다.
물론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별다른 충돌 없이 넘어갔으니 결과적으론 좋게 풀린 일이다.
문제는 이번 대륙회의에 참여하는 나라의 대표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정확히는 새로운 카디마 여왕의 수행원이 문제였다.
참가자들의 명단을 확인하던 바이샤는 새로운 카디마 여왕의 수행원 자리에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고 불쾌함을 감출 수 없었다.
감히 저를 이용해 세리아나와 단둘만의 시간을 가졌던 괘씸한 녀석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여왕이 교체되며 수행원들도 물갈이하는 것이 카디마의 전통 아니었나?”
“능력이 출중한 자에 한해 예외로 다시 등용하는 예도 종종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키륜 이 자식이 뛰어난 인재다?”
“네.”
따지고 보면 그때의 비밀스러운 만남의 자리엔 치아린과 쥬드가 있었느니 단둘만의 시간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거기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던 이유가 세리아나에게 위험을 경고하기 위함이었으니 은인이라 여기기에도 충분했다.
그러나 바이샤는 키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세리아나와 대화를 나눈 것도 불쾌하지만 그것을 위해 저를 이용한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탓에 세리아나와 함께하는 평온한 아침 식사 자리가 카디마의 미친 늙은이와의 땀내 나는 칼부림 시간으로 변하지 않았던가.
“카디마에 인재가 그리 없나?”
“외교 부분에선 따를 자가 없다고 합니다.”
카디마에 숨겨둔 세작에게서 들어온 정보를 눈으로 훑으며 얼굴을 찌푸린 바이샤가 키륜의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이를 갈았다.
“목적이 뭐지?”
“……대륙회의에 제 여왕을 수행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필요합니까?”
“내 라누아께 다른 흑심이 있는 건 아니고?”
“종종 말씀 올립니다만…… 질투도 적당히 해야 이롭습니다.”
질투라는 단어에 바이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카얀을 바라보았다.
지금 감히 제게 ‘질투’라는 단어를 썼느냐 묻는 눈빛에 카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디마 여왕의 수행원들에 관해선 라누아께 따로 말씀 올리지 마십시오.”
“왜?”
“……데옴에서 만난 백성들에게 속없이 웃어 준다 골을 내시다가 타박을 들으신 게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정기적인 사냥이 쿠드라의 일이라면 백성들을 만나 그들의 고민을 듣고 해결해 주는 ‘데옴’은 라누아의 일이었다.
신 앞에 백성의 성별은 의미가 없기에 수많은 이들이 세리아나를 찾아 고민을 건네고 답을 찾았다.
그 모습을 안전을 살핀다는 핑계로 몰래 숨어 지켜보고 있던 바이샤가 세리아나가 ‘성별, 남성’의 백성에게 환히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토라져 하루 종일 툴툴거린 것은 이미 오아시스의 모두에게 쫙 퍼진 소문이었다.
처음엔 그런 그를 달래던 세리아나였으나 사람의 인내엔 끝이 있는 법이었다.
[데옴은 제 일이잖아요.]
[시커먼 사내놈들이 당신을 보며 웃는 게 기분 나빠.]
[그럼 백성들이 저를 노려보길 바라세요?]
[그런 놈들이 있으면 눈알을 뽑아 버리겠어.]
[바이샤.]
[하나하나 눈을 맞춰 가며 웃어 줄 필요가 있나? 대충해도 돼, 대충.]
[쿠드라.]
[거기다 데옴 주기는 왜 그렇게 짧아? 일주일에 한 번이라니! 보름에 한 번, 아니 달에 한 번으로 바꿔.]
[쿠드라.]
뒤늦게 저에 대한 호칭이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린 바이샤가 고개를 돌렸을 때 발견한 것은 싸늘하게 웃고 있는 세리아나의 모습이었다.
처음 보는 그 모습에 놀라 마른침을 꿀꺽 삼켰을 때 그의 아내는 웃는 얼굴로 조곤조곤 바이샤를 야단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에 손이 달렸다면 쉴 새 없이 두드려 맞아 반쯤은 시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말로 팬다는 소리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바이샤는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화를 내는 순간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조심했다.
차라리 세리아나가 칼을 들고 덤빈다면 얌전히 목을 내어 줄 수 있었지만 말로 얻어맞는 건 정말로 할 짓이 아니었기에 조심, 또 조심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마음이 여린 세리아나는 오랜 시간 바이샤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깔끔하게 제 잘못을 잊었다.
치아린의 말을 따르자면 애초에 타고나길 뻔뻔하게 난 인물이 바로 바이샤였다.
자신의 잘못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 것은 그가 누리는 수많은 특권 중의 하나였기에 그가 세리아나를 아내로 받아들이기 전까지 그것에 대해 쓴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명단을 확인한 그날 저녁, 늘 그랬듯이 해가 지고 라누아의 방을 찾은 바이샤는 익숙한 손길로 반항하는 아로를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고 세리아나 곁에 찰싹 붙어 앉았다.
사미아에게 잘 자라는 인사부터 하고 오라는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바이샤는 결국 또 카얀의 충고를 잊은 채 입을 열어 버렸다.
“이번 대륙회의에 당신은 나오지 않는 게 좋겠어.”
“나라의 주인이 모이는 자리예요. 제가 어떻게 빠지겠어요.”
“당신은 편히 쉬고 있어. 내가 다 할 테니.”
“……지금 그거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에요?”
“괜히 당신 시간만 낭비 말고…….”
“쿠드라, 지금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냐 여쭈었는데요.”
싸늘하다.
너무나도 싸늘했다.
바이샤는 단둘만 있는 자리에선 입에 잘 올리지 않는 호칭을 듣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본인도 인정하고 주변에서도 인정하듯 학습 능력이 뛰어난 그였다.
거기다 생존 본능마저 훌륭한 사막의 전사가 바로 바이샤가 아니었던가.
그는 만지작거리고 있던 세리아나의 머리카락을 얌전히 내려놓고 슬쩍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입꼬리는 분명 웃고 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연둣빛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위기라는 것을 깨달은 바이샤가 살짝 뒤로 물러나 앉으며 세리아나의 눈치를 살폈다.
저렇게 웃는 세리아나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평소에도 이기지 못하지만 저렇게 웃는 세리아나는 무적이 된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경험한 바 있었다.
“……세리아나?”
“제가 제 일을 하는 것이 못마땅하신가요?”
“그럴 리가!”
화들짝 놀라 두 손까지 휘저어 가며 변명하는 자신의 꼴이 우스웠지만 지금은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바이샤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저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정확히는 입만 웃고 있는 아내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건가요?”
“그저…… 당신을 걱정했을 뿐이야. 당신도 이미 겪어 봤지만 그 자리엔 오만 놈들이 몰려오니…….”
“제가 못 미더우신 거로군요.”
바이샤는 정말로, 진짜, 두 번 세 번 강조하지만 세리아나를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세리아나를 귀찮게 할지도 모를 날파리 같은 놈들을 미리 치워 두고자 했을 뿐이다.
못 미덥다니! 제 여왕만큼 아름답고 강인한 이가 이 사막에 또 누가 있겠는가! 정말로, 진짜로 그녀가 못 미덥다거나 못마땅하다거나 그런 뜻은 아니었다.
“쿠드라.”
“세리아나.”
“나가세요.”
“……뭐?”
“나가시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당분간은 혼자 주무세요.”
모든 근육을 사용해 환하게 웃는 세리아나의 얼굴이 무서웠다.
헬라임도 제 첫 번째 자식의 저런 웃음을 본다면 얌전히 뒤로 물러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가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하고 물러나 제 방으로 돌아간 것은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아…….”
“그래서 제가 그 말씀 올리지 말라 하지 않았습니까.”
“후회는 내 몫이 아니야.”
“하고 계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한쪽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내는 바이샤의 안색이 어두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카얀 역시 한숨을 삼키며 이번에는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던 치아린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대체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왜 저리 매번 걸어 고생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또 불충한 생각을 하고 있지?”
“그럴 리가요.”
“하고 있다는 소리군. 차라리 치아린처럼 말을 해, 속으로 욕하지 말고.”
“욕은 안 했습니다.”
“봐, 다른 건 했다는 소리잖아.”
괜한 시비를 거는 바이샤의 장단에 맞춰 꼬박꼬박 대답하는 카얀의 시선이 방문으로 향했다.
라누아의 방에서 쫓겨난 바이샤에 대한 소문을 들은 누군가가 찾아올 시간이 된 것이다.
그런 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멀리서 작은 발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아빠!”
“오, 사미아!”
두꺼운 덮개를 거칠게 젖히고 방 안으로 달려온 작은 아이가 소파에 앉은 바이샤의 품에 몸을 던지듯 안겼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짙은 색의 피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은 아이였다.
어깨에 간신히 닿는 물결치는 검은 머리카락과 둥근 이마, 작고 예쁜 코, 붉은 입술, 그리고 반짝거리는 연둣빛 눈동자.
누가 보아도 바이샤와 세리아나의 딸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아이의 이름은 사미아 쿤, 이 오아시스의 다음 주인이 될 귀한 신분의 아이였다.
“아빠 좋은 아침!”
“그래, 좋은 아침이다.”
“아빠, 어제 엄마한테 쫓겨났다면서요?”
“……돌아가는 거 없이 본론부터 던지는 건 치아린에게 배웠구나.”
“이건 아빠한테 배운 건데?”
“…….”
제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 화조차 내지 못하고 헛웃음을 흘린 바이샤가 환하게 웃고 있는 딸을 허벅지 위에 앉혔다.
아침부터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건지 방긋방긋 웃는 사미아의 모습에 바이샤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엄마한테 출입금지 당했다면서요?”
“그런 말은 대체 누구에게…… 하아, 치아린이로군.”
이제 다섯 살, 한창 조잘거리며 말하기를 좋아할 나이였다.
바이샤는 제 허벅지 위에 앉아 땅에 닿지 않는 발을 달랑거리며 웃고 있는 딸의 얼굴을 보며 치아린에게 아이 앞에선 말을 조심하라 일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망했어.”
“……카얀.”
“……치아린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지금 당장.”
“……네.”
치아린에게 바이샤의 경고를 전하기 위해 카얀이 물러났다.
빠르게 문밖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바이샤가 한숨을 삼키며 딸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난 안 망했다.”
“아냐, 망했어.”
“치아린이 그러더냐?”
“아뇨.”
“그럼?”
“내가 봤어. 엄마가 엄청나게 화가 났던데?”
세리아나를 닮은 연둣빛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답하는 사미아의 모습에 바이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저를 닮아 눈치가 빠른 아이였으니 잘못 본 것은 아닐 것이다.
“엄마가 뭐라고 했지?”
“응? 그건 비밀이야.”
“왜?”
“엄마가 알려 주지 말라고 했어요.”
“아빠한테?”
“응, 아빠한테!”
사미아를 통해 슬쩍 세리아나의 상태를 알아보려 했던 바이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궁하면 길이 열리는 법이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바이샤의 눈이 사미아의 입을 열 열쇠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