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105화 (105/110)

#105. 남겨지고 잊힌 자들

한때 라젠이라고 불렸던 거대한 왕국은 모래 왕국의 주인에게 굴복한 후 그 이름을 잃고 ‘가타한’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차이툰의 고대어로 ‘가치 없는’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게 된 땅은 앞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조각나 본래의 이름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전까지는 하나로 묶어 그저 ‘가타한’일 뿐이었다.

잊힌 왕국의 수도였지만 이제는 그 어떤 이름으로도 불릴 수 없는 가타한의 중앙에는 수많은 이름 없는 백성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선 나라를 잃은 이들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절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라가 사라지고 왕을 잃었지만 그들에겐 기회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저 왕족과 귀족이 사라진 자리를 다른 높으신 분들이 차지했다 여기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정복자들은 이름 없는 백성들이 알고 있는 지배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을 보여 주었다.

우선은 곡식을 풀어 굶주린 이들을 배부르게 만들어 주었고 재물을 풀어 그들에게 깨끗한 옷과 따뜻한 잠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 땅의 옛 지배자였던 왕족과 귀족들의 창고를 털어 행한 일이었지만 백성들이 헬라임의 이름과 함께 쿠드라와 라누아의 이름을 환호하며 외치기엔 충분한 정책이었다.

단순히 그 정도에서 끝났어도 됐을 일이었지만 모래 왕국의 두 지배자는 이름을 잃은 백성들에게 또 다른 기회를 내주었다.

‘전사’가 되는 일이었다.

희망하는 자에 한해 그 능력을 평가하고 기준치를 넘어선 이들에게 ‘수습전사’의 지역을 내어 준 것이다.

그리고 수습전사로 공을 세우거나 전사의 이름을 달기에 부끄럽지 않은 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면 전사의 자격으로 모래 왕국의 여러 부족 중 하나에 소속될 수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이들은 부족이 아닌 ‘차이툰의 전사’가 되어 왕과 여왕을 섬길 수 있는 자격 또한 내어 주었다.

차이툰의 전사는 실력이 뛰어나다는 증명이기도 했거니와 그 대우부터가 일반 부족에 소속된 전사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기에 수습전사들이 차이툰의 전사 자격을 목표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타샨, 여기에 있었군.”

“파라간 님.”

깔끔하게 치워져 왕성의 옛터를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공터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던 이타샨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검을 내려놓았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였지만 놀라지 않은 것으로 보아 파라간의 방문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열심이로군.”

“쿠드라께서 원하실 때 언제든지 쓸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니까요.”

몸에 걸친 차이툰의 복식이 이제는 익숙한지 흘러내린 땀을 닦아 내며 웃는 이타샨을 바라보며 파라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타샨의 이름을 얻은 지 벌써 3년, 파라간이 가타한에서 머무르기 시작한 지 2년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매일 만나지는 못해도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며 지내 온 기간이 있는 만큼 이타샨은 오늘의 만남이 단순한 일이 아닐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오아시스에서 연락이 왔다.”

“네.”

“쿠드라께서 그대를 찾으신다.”

“……드디어!”

환희로 밝아지는 이타샨의 얼굴을 보며 파라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 새로운 이름을 내리실 것이다. 그리고 앞으론 차이툰의 전사라 불리게 되겠지.”

“아아!”

“삼일 뒤 출발이다. 미리 준비해 두도록.”

“저, 그…… 그럼 가족들은…….”

“그대의 가족들 역시 오아시스에 발을 들여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쿠드라!”

가타한의 백성들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 드디어 오르게 된 이타샨이 오아시스가 있는 쪽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파라간은 그런 그를 말 없이 내려다보며 자신에게 덧붙여진 명령을 떠올렸다.

‘오아시스로 돌아오라니…….’

그가 가타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파라간 자신이 그렇게 원했기 때문이었다.

아비와 누이에게 복수를 마친 그는 세리아나의 명을 직접 받는 영광스러운 자리까지 올랐으나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가타한으로 향하길 청했다.

그가 무슨 마음으로 가타한 행을 선택했는지 알고 있는 세리아나의 허락을 받아 이곳에 온 지 2년. 파라간은 이타샨과 함께 돌아오라는 세리아나의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함께 움직이게 될 거다.”

“파라간 님도 돌아가십니까?”

“그래.”

“그곳에 아내분이 남아 있다 하셨지요? 오랜만에 만나게 되겠군요.”

“…….”

‘아내’라는 말에 파라간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이타샨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새 이름을 얻으며 더욱 기민해진 ‘촉’이 이 자리에서 빨리 물러나라 경고했기 때문이다.

다급하게 자리를 벗어나는 이타샨을 보며 파라간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떠나간 것은 알았으나 그것보다도 다리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는 불쾌함을 누르는 것이 더욱 급했기 때문이다.

“하누를 보겠군.”

파라간은 하누를 오아시스에 두고 홀로 가타한으로 왔다.

이곳으로 떠나라는 명을 받았다는 말에 하누가 자연스럽게 따르려 했지만 그가 거부했다.

하누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그녀가 혹시라도 웃게 될까, 혹여 그녀를 동정하는 이가 나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최대한 빨리 다시 돌아와야겠어.”

자신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하누는 만족한다.

제게 쏟아지는 비난을 감수하고 눈물을 삼키며 오로지 파라간만을 위해 살 수 있게 된 자신의 처지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파라간은 다시 여왕에게 간청해 하루라도 빨리 이곳 가타한으로 돌아올 것이다.

물론 핑계도 있었다.

가타한을 다스리기 위해 사막의 가장 큰 부족인 바라와 라옴이 돌아가며 제 전사들을 이끌고 1년의 3분의 1 정도를 머무르고 있었다.

강력한 힘을 가진 부족들이었기에 남아 있는 귀족 잔당을 처리하거나 반역의 마음을 품는 이들을 억제하는 것은 수월했다.

그러나 고작 3분의 1이다.

가타한을 맡아 고정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이는 반드시 필요했고 파라간은 그 역할을 다시 한번 청할 생각이었다.

“사미아 님께 필요한 것들을 조금 챙겨야겠군.”

빈손으로 달려가 청할 수는 없으니 약간의 뇌물은 필요할 것이다.

파라간은 자신이 섬기는 여왕과 왕이 그들의 어린 자식에게 무척이나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가진 두 분에게 줄 선물을 챙기는 것보다 그 어린 자식의 선물을 챙기는 편이 좋을 것이다.

파라간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편, 파라간에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자리를 피한 이타샨은 정돈된 길을 걷고 있었다.

왕성과 귀족들의 저택은 모두 무너져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지만 잘 정돈된 길은 남아 있었다.

오아시스는 대체 어떤 곳일까를 상상하며 걸음을 옮기던 그가 어느 한순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가 섬기는 여왕의 것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의 머리칼을 본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본 것이라 결론지었다.

라젠의 왕족은 모두 죽었다.

왕은 검은 사막에 버려졌고 왕비는 도둑질한 죄를 물어 목이 잘렸다.

다음 왕위를 이어받아야 했을 왕세자는 사막의 왕과 여왕이 이 땅을 떠나던 날 죽은 병사들과 함께 산 채로 태워졌다.

“그리고 왕녀는…… 어떻게 되었지?”

왕비와 마찬가지로 도둑질한 죄를 물어 양쪽 귀가 잘린 루미어스 왕녀가 어찌 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른 귀족들과 함께 처형당했나? 아니면 노역장에 보내졌던가? 지은 죄가 있으니 분명 둘 중 하나일 터인데 딱히 그것과 관련해 무슨 소식을 듣거나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느 쪽이든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리 없어.”

인형처럼 귀여움만 받던 왕녀가 왕성에서 내쳐져 살아남을 리 없었다.

차라리 다른 귀족들과 함께 목이 잘리는 편이 그녀에겐 좋았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타샨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털어 버리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아시스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예전엔 척박한 땅이라 외면받았지만 이젠 그들이 섬기는 왕과 여왕이 있는 장소였다.

그들로 인해 목숨을 구원받은 이타샨의 가족들은 오아시스로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분명 기껍게 받아들일 것이다.

가벼운 걸음으로 다시 걷기 시작한 이타샨이 멀리 사라질 때쯤 어두운 골목길에서 한 사람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낡은 천으로 얼굴을 감싼 왜소한 체격의 사람이었다.

도망을 치고 있는 것인지 제 정체를 감추기 위해 눈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감싼 이는 멀어져 가는 이타샨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터번 후작, 진짜로 전사가 되었구나…….”

낡은 천 사이로 드러난 푸른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타샨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 그렇게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이가 어두운 골목에 몸을 숨기고 낡은 천을 풀어냈다.

어깨 위에 간신히 닿는 푸석한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뒷골목에 몸을 숨긴 이는 바로 루미어스였다.

자이로가 산 채로 불타 죽은 후 외곽의 노역장으로 보내진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험한 세계에 던져졌다.

제 아비와 오라비에게 휘둘렸을 뿐 제 뜻대로 나서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것이 루미어스의 목숨을 구했다.

외곽에서의 생활은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한 발악에 불과했다.

귀가 잘린 터라 소리가 잘 모이지 않아 의사소통의 불편을 겪으며 온종일 크고 작은 돌을 날라야 했다.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견디지 못한 몇몇 귀족 영식과 영애들은 죽어 나갔다.

차라리 제 부모처럼 단번에 목이 잘려 죽었다면 나았을까? 루미어스는 그들의 시체를 보며 하루하루 이를 악물며 버텨 냈다.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찾아오는 근육통이 익숙해질 때쯤 그녀에게 다른 기회가 왔다.

노역장의 죄인 중 글을 알고 있는 죄인 몇을 뽑아 차이툰의 성전을 옮기는 작업을 하도록 지시가 내려온 것이다.

왕족의 상징이자 차이툰 여왕의 증표처럼 여겨지는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감추고 살아가고 있던 루미어스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행운이었다.

만약 그녀가 머리카락을 보란 듯이 내놓고 다녔다면 누릴 수 없는 행운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누구인지 몰랐을 리 없어. 그리 허술한 자들이 아니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감시가 붙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목표였고 주변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막노동에서 벗어난 그녀는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처음엔 단순히 노역장으로 돌아가기 싫어 필사적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제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글씨는 단정하고 아름다웠기에 그녀가 필사한 책만을 골라 가져가는 이들이 점차 늘어갔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왕성에 있었을 땐 그저 아비의 소유물이었고 오라비가 물려받을 재산에 불과했었다.

그때엔 그것을 당연하다 여겼었다.

그러나 왕성에서 끌려 나와 세상에 던져진 이후 그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대우가 점차 나아져서 노역장의 죄인이 아닌 일급을 받아 일하는 필사가가 되는 데까지 3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색을 가리기 위해 염색을 시작한 지는 1년, 오늘은 심부름 겸 자신의 염색약을 사기 위해 이곳에 들른 참이었다.

그러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고 저도 모르게 숨어 버렸다.

터번 후작이 이타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은 가타한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루미어스의 불편한 귀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유명한 소문 중 하나는 조만간 그가 진짜 차이툰의 전사가 되어 오아시스로 향하리라는 것이었다.

루미어스는 차이툰의 복식이 어색하지 않은 터번 후작, 아니, 이타샨의 모습을 떠올리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다시 낡은 천을 둘러 귀와 제 머리카락을 꼼꼼히 숨긴 루미어스가 골목길을 벗어났다.

아까와는 다르게 얼굴을 드러낸 상태였지만 왕족의 특징을 감춘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루미어스의 짙은 색 그림자가 꿈틀거리다 곧 다른 이들과 같은 색을 되찾았다.

그리고 조금 전 그녀가 몸을 숨겼던 장소에 온몸을 검게 감싼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시커먼 것을 몸에 두른 것과는 다르게 눈 아래를 가린 베일은 붉은색이었다.

라누아의 그림자라 불리는 그녀는 3년 전부터 루미어스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그녀의 주인이 특별히 내린 명령이었다.

그림자는 루미어스의 곁에 몰래 숨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위험을 제거했다.

양쪽 귀가 잘렸다고는 해도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루미어스가 험한 곳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림자 덕분이었다.

그림자의 주인은 배다른 자매를 부탁하며 그녀를 홀로 두어도 괜찮다고 판단될 때 돌아오라고 명했다.

판단은 오로지 그림자의 몫이며 그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겠다는 말이 따라왔다.

그림자는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고 생각했다.

홀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저 망국의 왕녀는 이제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결론지은 그림자가 어두운 뒷골목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림자가 사라진 그 자리를 저 멀리 사막에서 불어온 것이 분명한 바람 한 가닥이 대신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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