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외전 1. 친애하는…… (2)
야안에게 쫓겨난 치아린은 힘이 빠진 걸음으로 궁을 빠져나와 오아시스로 향했다.
제 방으로 돌아가 얌전히 앉아 있기엔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아니, 머리보단 마음이 더 불편했다.
모래땅으로 돌아와 오아시스로 말을 몰며 오로지 라누아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떠한가? 제가 지키고 서 있어야 할 자리조차 지키지 못하고 쫓겨났다.
“하아……. 대체 무슨 일이람.”
오아시스의 모래톱에 털썩 주저앉은 치아린은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잔잔한 오아시스의 수면을 바라보았다.
사랑스럽고 상냥한 그녀의 주인이 저를 밀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불안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분명 커다란 잘못을 한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의 상냥하고 아름다운 주인이 저를 내칠리 없다.
치아린은 두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단순하게 휴가를 마저 즐기라는 배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흐르기 시작한 생각은 급류를 탄 것처럼 치아린을 이리저리 흔들며 빠르게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그녀를 이끌고 있었다.
“치아린.”
“……카얀? 왜 여기에 있어요?”
한숨을 내쉬던 치아린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이샤의 곁을 지키고 있어야 할 카얀이 이 시간에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단순히 바이샤의 명을 받아 움직였다거나 자신을 찾아왔다고 보기엔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카얀, 설마 당신도?”
“…….”
“아니죠?”
“……오늘까진 그냥…… 쉬라고 하시더군.”
그의 대답에 힘이 빠진 듯 치아린이 모래톱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은 카얀은 그를 잘 아는 이들만 알아볼 수 있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오아시스 너머의 바위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분이 동시에 우리를 내치실 줄은 몰랐어요.”
“……그냥 휴가를 주신 거야.”
말을 하는 카얀도 듣는 치아린도 지금 이 상황이 그리 단순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차라리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이라면 벌이라도 청하련만…… 카얀까지 쫓겨난 것을 보면 그것은 아닌 듯했다.
“우리가 동시에 두 분께 죄를 지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없어.”
그래도 혹시나 싶어 카얀에게 질문했지만 단호한 대답만이 돌아왔을 뿐이다.
그리고 우습게도 치아린은 그의 그런 대답에 자신을 흔들던 불안을 어느 정도 떨쳐 낼 수 있었다.
고개를 흔들어 남은 불안을 마저 털어 버린 치아린이 카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리아나가 명령한 이상 오늘은 그녀를 섬기려 라누아의 방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금이라도 시간이 빨리 흘러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길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바위산이 무너졌다면서요?”
“응. 바위산만 무너졌지.”
“다른 피해는 하나도 없었다죠?”
“수로 근처로는 자갈 하나 튀지 않았더군.”
“정말로 헬라임께서 하신 일일까요?”
“글쎄…….”
어느새 두 사람의 시선은 바위산에 닿아 있었다.
아눌라가 세리아나를 납치해 금역인 바위산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비밀이 아니었다.
그리고 바위산이 무너져 죄인을 덮쳤다는 것 역시 오아시스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사건을 두고 모두가 입을 모아 헬라임의 분노가 바위산을 무너트렸다고 말했다.
단순한 산사태로 보기엔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바위산이 무너질 때 그 누구도 땅의 울림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바위산 중턱에 낀 뽀얀 먼지구름을 발견했을 뿐이다.
거기다 어떠한 징조도 없이 무너진 바위산은 그 바로 아래 자리를 잡고 길을 낸 수로 쪽으론 작은 모래알맹이 하나 흘려보내지 않았다.
바위가 덮친 것은 오로지 ‘사람’뿐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무너진 바위산 아래 깔린 이들이었다.
세리아나가 얻은 상처는 전부 아눌라가 준 것이었고 바이샤의 상처는 고작 이마가 찢어진 것이 전부였다.
몸의 반쪽이 으스러져 불구가 된 아눌라와는 완벽하게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라누아께서 얻은 상처와 같았다면서요?”
“위치만 같았지. 상태는 더 심했고.”
두 손이 묶인 채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오아시스를 벗어나는 아눌라를 차이툰의 모든 백성이 지켜보았다.
천인공노할 죄를 저지른 그녀와 그 아비를 향해 모두가 돌을 던졌지만 죄인들을 이끄는 파라간은 그것을 막지 않았다.
“아쉬워?”
“라누아께서 결정하신 일에 무슨 불만을 품겠어요. 그냥 그 자리에 제가 없었다는 게 억울한 거죠.”
“미안해.”
“……아뇨. 당신이 미안해할 일은 아니에요. 내겐 라누아께서 명하신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오아시스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치아린은 당장이라도 모래땅으로 돌아올 것처럼 화를 냈었다.
그리고 그것을 말린 게 카얀이었다.
단순한 서신으로는 그녀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아 직접 말을 몰아 이름을 잃은 땅에 도착한 그가 말리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물론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 땅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치아린은 자신이 얌전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 확신했다.
어리광을 피우듯 그의 어깨에 얼굴을 비빈 치아린이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들어 카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보다 조금은 밝아진 얼굴이 보기가 좋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카얀은 그저 곁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제게 안정을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두 분이 우릴 버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죠?”
“버림받아도 그분들 곁을 지키는 게 우리의 운명이야.”
“이럴 땐 ‘그래, 우리를 버리실 리 없어’라고 대답해 줘야죠.”
“미안.”
“괜찮아요. 그런 고지식한 점도 정말로 사랑스러우니까.”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그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춘 치아린이 잔잔한 오아시스로 시선을 돌렸다.
부드럽게 불어온 바람이 두 사람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내일이면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응.”
“그러니 우리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을까요?”
“그래.”
무뚝뚝하지만 애정이 담긴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치아린이 두 눈을 감았다.
처음 느꼈던 불안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남은 불안이 여전히 그녀를 흔들려 하고 있었지만 제 옆을 지키고 앉은 카얀이 있으니 더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내일 해가 뜨면 라누아께 달려가야지.’
그러면 그녀의 상냥한 주인은 분명 치아린의 남은 불안을 전부 없애 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고 기다리자. 치아린은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 * *
전날 자신에게 약속한 것처럼 치아린은 해가 뜨자마자 라누아의 방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말 못 하는 시녀들이 그녀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는 얼굴을 감추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빠르게 움직인 탓에 숨이 거칠어질 때쯤 라누아의 방 앞에 도착한 치아린이 목을 가다듬으며 호흡을 정돈했다.
높게 묶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정리하고 급히 움직이느라 엉망이 되었을지도 모를 옷을 정돈하는 치아린의 얼굴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흠흠, 라누아. 치아린입니다.”
모든 준비가 완벽하다 여길 때쯤 치아린이 방 안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혹여 오늘도 자신을 내쫓을까 굳어 있던 얼굴은 들어와도 좋다는 세리아나의 대답이 들려온 이후에야 아주 살짝 풀어졌다.
“라누아의 종 치아린이 인사 올립니다.”
“좋은 아침이야. 생각보다 빨리 왔네?”
“네, 네? 저…… 다, 다시 나갈……까요?”
“응? 아니?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뇨……. 라누아께서 저를 반기지 않으시는 거 같아서…….”
“세상에, 치아린! 무슨 그런 말이 있어!”
소파에 앉아 치아린을 맞이했던 세리아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녀의 대답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는 해도 몸을 조심해야 하는 임신부였다.
그런 세리아나가 몸을 갑작스레 움직이는 것을 본 치아린 역시 경악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몸을 살폈다.
“라누아! 그리 급하게 움직이시면 안 돼요!”
“미, 미안. 하지만 치아린이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러지.”
“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소파에 다시 앉은 세리아나가 안색이 어두운 치아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힘이 느껴지지 않는 손길이었지만 거역하지 않고 그것에 따라 움직인 치아린은 세리아나 곁에 나란히 앉으면서도 고개를 들 줄 몰랐다.
“무슨 일 있었어? 그곳에서의 일이 많이 힘들었던 거야?”
“아뇨,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그런 말을 해. 반기지 않다니…… 내게 치아린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사람인데.”
“…….”
“치아린?”
손등을 도닥이는 새하얀 손가락이 치아린의 검은 눈동자에 맺혔다.
고개를 숙인 채 그 손길을 바라보기만 하던 치아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물어봐도 괜찮아?”
“그게…….”
말을 잇지 못하는 치아린을 가만히 지켜보던 세리아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 하나에 잠시 당황한 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설마……하면서도 어쩐지 자신이 떠올린 것이 정답인 거 같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고 있었다.
“치아린, 설마…… 어제 일 때문이야? 하지만 휴가를 줬는걸. 나를 만나 일을 하려고 하면 안 되는 날이었잖아.”
“그건 맞지만…….”
숙인 고개가 아래로 점점 더 내려가는 것을 보며 세리아나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나 자신보다 어른스럽고 언니처럼 느껴졌던 치아린이 유독 오늘따라 어리고 귀여운 동생처럼 느껴졌다.
“좀 더 분위기를 살펴서 보여 주려고 했는데. 치아린이 너무 귀여워서 더는 못 숨기겠어.”
“네?”
“그것 좀 가져오련?”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치아린의 손을 도닥인 세리아나가 곁을 지키고 선 시녀에게 부탁했다.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가림막 뒤로 사라졌던 시녀가 다시 나타났을 땐 그 손엔 갈대로 엮은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열어 봐, 치아린.”
“라누아? 이건 뭔가요?”
“치아린을 위해 준비한 내 선물이야. 전부 다 내가 준비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그래도 자수 부분은 전부 내가 했어.”
활짝 미소 지으며 어서 열어 보라 고갯짓하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치아린이 약간은 긴장된 모습으로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것이 어제의 일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특별한 날도 아닌데 대체 무슨 선물을 준비한 것일까? 답을 모를 의문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이건……?”
그리고 상자의 뚜껑을 연 치아린은 더 커진 의문을 느끼며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자에 담긴 것은 붉은 옷이었다.
금실로 화려하게 자수가 놓인 붉은색 옷이 왜 자신의 선물이 되는지 알 수 없어진 치아린이 세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눈빛으로만 질문하는 치아린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세리아나가 짧게 손뼉을 쳤다.
그 신호에 맞춰 방안을 지키고 서 있던 검은 옷의 말 못 하는 시녀들이 치아린에게로 다가와 그녀를 어디론가 잡아끌기 시작했다.
“라, 라누아?”
“다녀와, 치아린.”
손까지 흔들어 가며 인사하는 세리아나가 너무나도 환하게 웃고 있어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치아린이 끌려나갔다.
그리곤 씻겨졌다.
자신보다 약한 것에 약하고 어린 것에는 더 약한 치아린은 어리고 약한 시녀들에게 씻김을 당한 후 혼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목욕 후 몸에 걸친 것이 세리아나가 선물한 붉은 옷이었기에 더욱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라누아, 이게 무슨……?”
“치아린! 예쁘다!”
붉은 것은 신의 것이었고 이렇게 화려하게 장식된 옷은 신의 자식인 쿠드라와 라누아만이 걸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붉은 옷이 선물이라니…… 치아린은 저를 이끌어 평소 몸을 단장할 때 앉는 의자 위에 앉게 한 세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선물, 마음에 들어?”
“라누아? 제게 설명을 좀…….”
“예전에 약속했잖아. 치아린이 결혼식을 올릴 때 베일은 내가 씌워 주겠다고.”
“네?”
그러고 보니 그런 약속을 했었다.
세리아나가 야안을 처음 만난 그날이었을 것이다.
치아린은 헬라임의 품에서 올리게 될 결혼식에 세리아나를 초대했고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머리 위에 베일을 직접 올려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전통을 해치는 일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크다는 건 알고 있어. 나 역시 그 전통에 따라 이 자리에 온 것이니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
치아린의 앞으로 와 무릎을 굽히고 앉은 세리아나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해 주고 싶었어. 헬라임의 품에 안길 날을 기다리기엔 너무 멀어서…….”
“라누아, 저는…….”
“나는 치아린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녀의 손을 도닥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세리아나가 손짓하자 상자를 든 시녀가 다가왔다.
열린 그 상자 안에서 가장자리가 화려하게 장식된 붉은 베일을 꺼내 든 세리아나가 미소 지었다.
“당장 해 줄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 미안해.”
붉은 베일이 천천히 치아린의 시야를 덮는다.
새하얀 손끝으로 베일 자락을 정리한 세리아나가 베일 너머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치아린을 바라보았다.
“결혼 축하해, 치아린.”
“라누아…….”
결국 눈물을 쏟아내는 치아린을 세리아나가 가볍게 끌어안았다.
자신이 직접 수를 놓은 베일을 쓴 치아린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세리아나는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치아린의 등을 도닥이며 기도했다.
부디 나의 친애하는 치아린이 행복하길.
세리아나는 치아린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기도하고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