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외전 1. 친애하는…… (1)
치아린이 오아시스로 돌아온 것은 긴 우기를 맞아 폭발적으로 피어올랐던 생명이 다음을 기약하며 메마른 모래 속으로 숨어든 때였다.
바짝 메마른 땅을 빠른 속도로 돌파한 치아린은 오아시스에 도착하자마자 궁으로 달려와 가장 먼저 세리아나를 찾았다.
“라누아!”
“치아린!”
몸이 제법 무거워진 세리아나가 앉은 채 손을 벌리자 치아린이 냉큼 달려와 그녀에게 안겼다.
말이 안겼다지 키가 조금 더 큰 치아린이 세리아나를 품에 안은 꼴이었다.
그 모습을 곁에 앉아 있던 바이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지만 두 사람은 그 시선을 무시한 채 서로의 몸을 안았다 풀기를 반복하며 안부를 주고받았다.
“라누아 어쩜! 다친 곳은 괜찮으세요? 다리는요? 팔은? 목은요?”
“이젠 괜찮아. 치아린은 어때? 많이 힘들었지?”
“라누아의 곁을 지키지 못한 것이 제일 힘들었는걸요.”
“치아린…….”
“라누아…….”
“……당신 남편은 나라는 걸 잊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한번 서로 부둥켜안으려는 두 사람의 모습에 결국 바이샤가 입을 열었다.
“남자가 그리 속이 좁으면 아내에게 사랑받지 못합니다, 쿠드라!”
“내 라누아께선 누구보다 날 사랑하시니 그런 걱정은 치워.”
“……그사이 더 뻔뻔…… 죄송합니다. 더 자신만만해지셨네요.”
다소 격한 마음을 소리 내 표현하려다 간신히 안으로 삼킨 치아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자의로 물러난 것은 아니다.
세리아나의 허리를 팔로 감아 제 품으로 끌어당기는 바이샤 때문이었다.
정말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치아린의 시선이 뒤늦게 카얀에게 가 닿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을 눈에 담으니 바이샤로 인해 차오르던 짜증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카얀, 내 사랑. 쿠드라께서 당신을 괴롭힌 건 아니죠?”
“치아린, 두 분 앞이야. 말을 가려야지.”
“그 고지식함까지 사랑해요.”
“……나도.”
슬쩍 바이샤의 눈치를 살핀 카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의 주인도 이 정도는 모르는 척해 줄 것이다.
카얀의 그런 생각은 틀리지 않았는지 평소라면 말꼬리를 잡아 싸움을 걸어왔을 바이샤가 모르는 척 세리아나의 손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나저나 큰일이 있었다지요?”
조금 전까지 해맑았던 치아린의 목소리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흑요석을 닮은 검은 눈동자가 번뜩이는 것이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아도 그녀가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치아린의 질문에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죄인들의 처벌은 모두 끝난 상태였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절로 식은땀이 맺히고 아찔해졌다.
바이샤는 살짝 몸을 떠는 세리아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세리아나가 무서워하잖아.”
“아! 죄송합니다, 라누아! 제가 이런 실수를!”
“괜찮아. 걱정해 준 거잖아.”
“어떻게든 아눌라를 잡아 족쳐야 했는데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오아시스를 비웠던 제 불찰입니다.”
“작정하고 숨어든 죄인을 어쩌겠어. 그리고 그때 우리에겐 아눌라의 처벌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잖아.”
“아아, 라누아! 어쩜 이리도 상냥하신지! 아니, 그런데 잠시만요, 쿠드라. 언제부터 라누아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셨습니까?”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을 위로하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감격해 몸을 떨던 치아린이 깜짝 놀란 얼굴로 질문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바이샤는 세리아나를 ‘나의 라누아’라고 불렀다.
둘만 있는 자리에선 어떤지 몰라도 공적인 호칭은 ‘라누아’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름을 부른다고?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있어도 확실하게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치아린의 예리한 ‘촉’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세리아나를 세리아나라 부르는 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뇨. 그것은 아니지만…….”
“인사를 마쳤으면 물러가라. 특별히 카얀까지 내어 주지. 나와 세리아나의 시간을 방해하지 마.”
“바이샤, 그렇게 말하면 치아린이 오해하잖아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치아린을 쫓아내는 바이샤의 모습에 민망한 듯 작게 웃음을 흘린 세리아나가 치아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바이샤의 말은 이제 막 돌아왔으니 어서 돌아가서 쉬라는 거야. 오해하지 마, 치아린.”
“상냥하신 라누아. 쿠드라의 말을 애써 포장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카얀, 네 치아린을 데리고 당장 나가. 그리고 내일 하루는 푹 쉬도록.”
“명을 받습니다.”
고개를 숙인 카얀이 뭔가 불평을 쏟아내려는 치아린의 입을 살짝 막고 서둘러 라누아의 방을 빠져나왔다.
거칠지 않은 손길로 저를 이끄는 카얀의 모습에 순순히 끌려나가는 치아린의 눈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바이샤와 세리아나에게 머무르고 있었다.
“세상에, 카얀. 두 분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이야기가 길어.”
“하루 휴가도 받았는데 뭐 어때요. 저녁 내내 당신과 붙어 있을 테니 그때 듣죠, 뭐.”
“당장은 쉴 생각이 없는 거로군.”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카얀은 그 할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 대신 못 보는 사이 핼쑥해진 치아린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제 주인 곁을 지키지 못한 종이 하루라도 마음 편히 밤을 보냈을 리 없었다.
그 마음을 생각해 일부러 오아시스의 소식을 늦게 전했지만 그 늦은 전갈이 오히려 죄책감을 더욱 무겁게 했으리라.
“미안해.”
“카얀, 내 사랑. 나를 위해 그랬다는 건 알고 있어요. 당신의 자리에 내가 있었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 그리 미안해하지 말아요.”
“…….”
“미안하면 지금부터 제가 할 일이 라누아께 전해지지 않도록 도와줄래요?”
“응.”
가볍게 입술이 맞닿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사랑하는 이의 온기에 무뚝뚝한 카얀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떠올랐다 빠르게 사라졌다.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려 줘요.”
“응.”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치아린이 먼저 걷기 시작하자 이끌리듯 카얀 역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에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눌라와 누라비는 두 눈과 목소리를 잃은 상태로 검은 사막에 버려졌다.
파라간은 그 일의 집행자로 누구보다도 가까운 위치에서 아비와 누이의 추락을 지켜볼 수 있었다.
아눌라에 동조해 세리아나의 납치를 도왔던 시카의 전사들은 바위 사막으로 보내졌다.
동서남북으로 박은 말뚝에 팔과 다리를 각각 묶인 채 보름을 버텨 내야 하는 벌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보름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뜨거운 낮과 차가운 밤을 맨몸으로 버텨 내야 했다.
그렇게 보름을 버티고 나면 한쪽 손목을 자른 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살아 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살아 돌아오라 보낸 것이 아니니 당연한 결과였다.
세리아나는 그 죄인들의 가족을 처벌하지는 않았다.
이미 연좌제로 묶여 부족의 이름을 잃었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불명예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만으로 벌은 충분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아린의 생각은 달랐다.
부족의 이름을 잃은 것은 벌로 충분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같은 부족의 이름으로 묶여 있던 이들에게만 ‘충분한’ 벌이었다.
다르게 말해 죄인의 가족들에겐 한없이 가벼운 벌이라는 뜻이었다.
아눌라에 동조한 전사들이 그녀를 숨기고 일을 칠 계획을 짜는 동안 그들 가족이 정말로 이 사실을 몰랐을까?
차이툰의 집 안에는 벽이 없다.
집 안에서 비밀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도 분명히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을 확신하는 이상 치아린은 그들의 죄를 모르는 척해 줄 생각이 없었다.
“나중에 쿠드라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어요. 순순히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지만요.”
바이샤도 분명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남겨 뒀다.
이유는 하나다.
뒤늦게 오아시스로 돌아와 제 주인이 당한 일에 분노하면서도 풀 길이 없을 치아린을 위해서였다.
얄미운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남자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동무를 위해 이 정도의 배려쯤은 베풀 수 있는 그였다.
“밤이 오기까지 시간이 별로 없으니 서둘러야죠?”
“준비해 뒀어.”
“당신만큼 나를 아는 사람은 없을 거야.”
잡고 있던 손을 잡아당겨 카얀의 볼에 입을 맞춘 치아린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피를 뿌리러 가는 길에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치아린의 입맞춤에 화답하듯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다정한 모습으로 궁을 나선 두 사람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그림자들과 함께 이름을 잃은 부족의 거주 구역으로 향했다.
그들의 방문을 예상이나 한 것처럼 문을 꼭 걸어 잠근 집들을 지나는 동안 피 냄새가 짙어졌지만 어디에서도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해가 지고 밤이 흘러 다시 날이 밝았다.
바이샤가 짧은 휴가를 내렸지만 치아린과 카얀은 해가 뜨기가 무섭게 각자 자신들의 주인에게로 찾아가 아침 인사를 올렸다.
“치, 치아린? 왜 왔어?”
“네?”
“오늘은 휴가잖아.”
“어제 하루 푹 쉬었습니다. 괜찮아요.”
“하지만…….”
이상했다.
세리아나는 분명 어제는 그리 환한 미소로 치아린을 반겼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가 찾아온 것이 불편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치아린은 의문을 느낌과 동시에 불안함을 느꼈다.
설마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제 주인이 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었다.
“라, 라누아. 저는…….”
“오늘까지는 쉬어. 모처럼의 휴가잖아.”
“……네.”
주변의 시녀들에게 눈짓까지 해가며 치아린을 쫓아내듯 내보낸 세리아나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시녀들을 불러 갈대를 엮어 만든 상자를 들고 오도록 지시했다.
“치아린이 알면 안 돼. 알지?”
말 못 하는 시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접힌 눈이 그녀들이 이 작은 비밀을 지키는 것에 무척이나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 시녀들을 바라보는 세리아나 역시 환하게 미소 지으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한편 라누아의 방 밖으로 쫓겨난 치아린은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방의 입구를 가린 덮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녀의 심경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쥬드.”
“네, 치아린 님.”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쥬드가 공손히 답했다.
“어젯밤 라누아께 무슨 일이 있었…… 아니, 내가 라누아께 무슨 잘못을 했어?”
“…….”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어젯밤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치아린 님도 잘못하신 게 없구요.”
“그럼 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쥬드의 대답에 치아린의 고개가 빠르게 휙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그녀의 검은색 눈동자를 코앞에서 바라보게 된 쥬드가 아주 살짝 몸을 떨었지만 치아린은 그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아는구나! 뭔가 아는 게 있어! 그렇지, 쥬드?”
“…….”
“아는 게 있으면 말해 줘. 라누아께서 이젠 내가 싫으시대? 내가 아눌라를 막지 못해서 화가 나셨나? 그, 그게 아니면 혹시 내가 어제 한 일을 아셨다거나……?”
“진정하십시오, 치아린 님.”
쥬드의 양쪽 팔을 붙들고 빠르게 말을 내뱉는 치아린은 평소와 다르게 무척이나 허둥거리고 있었다.
쥬드는 그런 그녀를 진정시키며 슬쩍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그림자 속으로 빠르게 몸을 숨겼다.
“쥬드!”
“조만간 알게 되십니다.”
그림자 속에서 흘러나온 쥬드의 답변은 그게 끝이었다.
치아린이 몇 번이고 다시 쥬드를 부르려 했지만 평소의 색깔로 돌아온 그녀의 그림자 속에 쥬드는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차마 라누아의 방으로 다시 쳐들어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 앞을 서성이던 치아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암만 머리를 굴려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불길함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야안을 만나야겠어. 야안이라면 알려 줄 거야.”
현명한 야안이라면 분명 답을 알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치아린이 빠르게 궁의 지하로 걸음을 옮겼다.
“야안! 말해 줘요! 내가 뭘 잘못했죠?”
“……망아지 같은 녀석이 돌아와 첫인사도 하지 않고 질문부터 던지는구나.”
“지금 저 엄청 심각하거든요? 라누아께서 절 쫓아내셨다구요!”
“그러냐?”
“야안!”
심각한 치아린과는 다르게 심드렁한 얼굴의 야안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로를 잡아당기며 두 손을 모았다.
그것이 헬라임에게 올리는 기도라는 것을 아는 치아린이 입을 다물었다.
제 사정이 암만 급하더라도 이 기도를 방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야안, 제발요…….”
짧은 기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 앞에 바짝 당겨 앉은 치아린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야안의 이름을 불렀다.
늙은 라누아의 종은 젊은 라누아의 종을 바라보다 짧게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라누아께서 그 종을 진심으로 내치실 리 없지 않으냐.”
“하지만…….”
“그분의 종이라면 그저 믿고 따라야지. 그분이 네게 해가 될 만한 일을 하실 리도 없고. 기다리면 절로 알게 될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