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거울 너머의 우리
바이샤의 품에 안겨 라누아의 홀에 도착한 세리아나는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쿠드라의 홀에서 한차례 판결을 받은 죄인들이었다.
“시카의 누라비가 라누아께 인사 올립니다.”
“…….”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색이 새카맣게 죽은 누라비가 말을 잃은 딸의 모습을 곁눈질로 살폈다.
목을 감싼 피가 밴 붕대, 어깨뼈가 박살이 나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한쪽 팔, 그리고 뭉개져 형체를 잃은 한쪽 발. 아눌라는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 여길 만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쿠드라의 벌이 가벼웠나 보군.”
“……죄송합니다.”
그러나 아눌라를 동정할 필요는 없었다.
바위 아래 깔려 숨을 헐떡이는 것을 구해낸 것으로 그 값은 치른 셈이다.
세리아나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아눌라를 무시하며 누라비에게만 말을 건넸다.
“그대의 가장 큰 죄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어찌 물으십니까?”
“그대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누라비가 고개를 떨구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다시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질 않는 그를 보며 세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그대로 인해 이 사막에서 오랜 시간 이름을 이어온 시카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
“앞으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자신의 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지. 그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이의 후손으로 태어났음을 원망하고 자신을 그리 만든 그대를 증오하게 될 거야.”
“부디 자비를…….”
세리아나가 깨어난 후 바이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시카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었다.
아눌라에 동조해 세리아나를 납치하고 해치려 하는 일에 앞장선 부족을 그가 용납할 리 없었다.
시카의 부족민 대부분은 죄가 없었지만 연좌제를 피할 순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원망은 아눌라의 협박에 굴복한 조력자들과 죄를 저지른 아눌라, 그리고 아눌라의 허물을 가리는 데 급급했던 누라비에게로 향했다.
“나의 자비를 바라기에 그대들이 지은 죄가 너무 크지 않나?”
“용서하십시오, 라누아.”
누라비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용서를 빌었지만 그 옆에 앉은 아눌라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세리아나는 그런 아눌라의 상처를 눈으로 훑었다.
목과 어깨, 그리고 발목. 공교롭게도 세리아나가 아눌라에 의해 얻은 상처와 같은 부위였다.
물론 그 정도는 아눌라 쪽이 더 심하긴 했지만 단순히 우연이라 여길 수만은 없는 위치에 남은 상처였다.
“아눌라. 그대는 할 말이 없나?”
“……내게 듣고 싶은 말이 있나 보지?”
쇠를 긁어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눌라의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을 잡지 못했다.
생기를 느낄 수 없는 탁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세리아나가 고개를 저으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아니, 그대에게 듣고 싶은 말은 없어. 무슨 말이 나오든 그것은 나를 기만하는 말일 테니.”
“…….”
“벌을 내리겠다.”
라누아의 홀을 지키고 있던 전사들이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이제 라누아의 홀 안에 고개를 들고 있는 이는 세리아나와 아눌라,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쥬드가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와 아눌라의 뒷머리를 눌러 억지로 고개를 숙이게 했다.
“쿠드라의 판결을 이어받아 그대로 행할 것이다.”
바이샤는 누라비와 아눌라의 두 눈을 파내고 혀를 자르는 벌을 내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 사지를 찢어 짐승들의 먹이로 뿌리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랬다간 세리아나가 벌을 내릴 기회를 빼앗는 것이 되었기에 그 정도로 간신히 타협을 본 것이다.
물론 세리아나도 누라비와 아눌라에게 벌을 내리고 싶었기에 그런 그의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주 사소한 문제라고 한다면 이런 쪽으론 상상력이 뛰어나지 못한 세리아나가 그보다 더 잔혹한 형벌을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반성하지 않는 죄인들의 눈을 뽑고 혀를 자른 후 검은 사막에 버려라. 그때 두 발엔 족쇄를, 두 손엔 수갑을 채우고 아비와 자식이 서로 의지할 수 없게 다른 방향을 걷도록 하라.”
“명을 받습니다.”
“명을 받습니다.”
“명을 받습니다.”
대답을 마친 호위전사들이 누라비와 아눌라의 양쪽 팔을 잡아 홀 안에서 끌어내는 모습을 지켜보던 세리아나가 쥬드를 곁으로 불러들였다.
“파라간을 불러 죄인들이 벌을 받는 모습을 모두 지켜볼 수 있게 해줘. 검은 사막으로 죄인을 호송하는 일 역시 파라간이 해야 할 거야.”
“라누아의 쥬드가 명을 받습니다.”
세리아나는 파라간에게 약속했다.
아눌라의 추락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세리아나는 오늘 그 약속을 지킬 것이다.
죄인들이 모두 물러간 후 홀의 열린 문을 바라보는 세리아나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냥대회에서 돌아와 아눌라에게 벌을 내렸을 때도 이렇게 앉아 바이샤를 기다렸었다.
본의 아니게 그때와 똑같이 제 발로는 걸을 수 없는 상태였기에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땐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도 못 했었는데.”
바이샤의 곁에 나란히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 다짐하던 것이 전부였었다.
고작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서 그의 옆자리를 누구도 탐낼 수 없게 지키고 버티겠다 그리 맹세했었다.
간신히 짜낸 욕심이 겨우 그 정도여서 누구의 비웃음을 사도 어쩔 수 없었던 그런 시기였다.
“지금 내가 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지, 아로?”
어느새 날아와 세리아나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에 내려앉은 아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짧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본래라면 잠들어 있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옆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는 바이샤에게 밀려 어쩔 수 없이 낮에 깨어 움직이기 시작한 아로였다.
세리아나는 어리광을 부리는 아로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 작고 둥근 머리를 손끝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은 듯 눈을 지그시 감은 아로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세리아나가 미소 지었다.
“언젠가 나도 네가 보는 것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바이샤가 겪은 신기한 일을 조금 늦게 전해 들은 세리아나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로와 시야를 공유하다니! 마법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신기해하는 세리아나를 위해 모처럼 마음이 맞은 바이샤와 아로가 그때의 일을 재현해 보려 몇 번을 시도했지만 그날과 같은 기적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헬라임의 도움이었을까? 응, 아로? 너도 잘 모르는 일이야?”
아로의 날개에서 바이샤의 팔로 옮겨 간 상처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가 독에 당해 정신을 잃었을 때 아로가 가져왔던 라큘의 나뭇잎으로 만든 연고가 큰 역할을 했다.
그것으로 세리아나의 상처를 먼저 치료해야 한다 바이샤가 주장했으나 치료사에 의해 기각되었다.
아이를 가진 몸에 쓰는 약은 그것이 라큘의 잎사귀로 만든 것이라 해도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는 의견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아로의 도움을 받은 것이 되어 작게 투덜거리던 바이샤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딱 하루 저녁, 세리아나의 옆자리를 양보했다.
치아린이 곁에 있었다면 하늘과 땅이 뒤집힐 일이라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다 때려치우고 오아시스로 돌아오겠다는 치아린을 카얀이 간신히 막았대.”
세리아나의 납치와 구조, 그리고 부상 소식은 조금 늦게 치아린에게 전해졌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탓에 벌어진 일이라 자책하던 그녀를 위로한 것은 카얀이었다.
바이샤의 명령을 받아 오아시스의 소식을 들고 직접 치아린을 찾아간 그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정말로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세리아나의 곁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조금 아쉽다. 그렇지?”
치아린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투정을 부려선 안 된다.
그녀는 세리아나를 대신해 정복지를 살피는 중이었으니까. 치아린이 오아시스로 돌아올 때까진 제법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아로의 몸을 쓰다듬던 세리아나는 작게 흔들리는 제 그림자를 확인하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바이샤가 오고 있다는 쥬드의 신호였다.
“내가 늦었나 보군. 일은 잘 끝냈나?”
“네. 파라간이 일을 마무리할 거예요.”
“당신이 받아들인 녀석이니 알아서 잘하겠지.”
“그는 차이툰의 파라간이니까요.”
“그래.”
세리아나의 품에 안겨 잠든 아로를 잠깐 흘겨본 바이샤가 짧게 혀를 찼다.
안 보인다 싶더니 약삭빠르게 제 아내의 품을 차지하고 잠들어 있다니. 역시 저 쿠락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튼튼한 새장을 만들어야겠어.”
“네?”
“저 녀석의 부리로도 열 수 없는 튼튼한 새장이 필요해.”
한쪽 팔로 세리아나의 몸을 안아 든 바이샤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 심각한 말투와 말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아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낸 세리아나가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지 마세요. 아로는 가둬 둘 수 있는 아이가 아닌걸요.”
“……내가 당신을 이기지 못하는 걸 알고 일부러 더 얄밉게 군다고.”
“아로가요?”
“그래, 당신의 쿠락이.”
“그럴 리가요. 우리 아로가 얼마나 착한데요.”
세리아나 앞에서만 순한 양처럼 구는 아로의 모습을 알고 있는 바이샤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여우 같은 녀석이 세리아나 앞에서 얼마나 내숭을 떨었는지 보지 않아도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러나 세리아나 앞에서 저 작은 녀석의 흉을 잡으며 제 이미지를 깎아 먹을 생각은 없었다.
물론 세리아나가 보지 않는 곳에서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일단 지금은 점잖은 모습을 보여줄 때였다.
“오늘은 오아시스를 보며 점심을 먹을까?”
“네, 좋아요.”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라 이르지.”
“네.”
세리아나를 안고 라누아의 홀을 벗어난 바이샤가 궁의 정원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창 피어나기 시작한 라일 꽃을 아내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세리아나는 거침없이 걷고 있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버릇처럼 그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은 들떠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 소리가 어쩐지 조금 간지러워 세리아나의 가슴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 *
화려하게 장식된 가마가 붉은 길 앞에 멈춰 섰다.
사방에서 흩뿌려지는 새하얀 꽃비를 맞으며 가마에서 내린 세리아나는 품에 소중히 안은 것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이곤 천천히 붉은 길 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온몸을 붉은색으로 감싼 세리아나는 길 끝에 선 바이샤를 붉은 베일 너머로 바라보았다.
같은 날 얻은 다른 상처는 흉터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지만 이마에 남은 상처는 기이할 정도로 선명히 남아 그날의 일을 잊지 못하게 했다.
붉은 길 위에 뿌려진 하얀 꽃잎을 사뿐히 밟으며 걸어온 세리아나가 드디어 바이샤의 앞에 섰다.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바이샤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어디에서 온 익숙함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린 세리아나는 남은 한 손을 마저 뻗어 자신을 반기는 바이샤에게 소중히 안고 있던 것을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기다란 붉은 베일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붉은 모포에 몸을 감싼 작은 아이였다.
주변의 소란이 들리지 않는 것인지 깊게 잠든 아이의 머리 위로 새하얀 꽃 한 송이가 떨어졌다.
세리아나에게서 아이를 받아 오른쪽 팔로 조심스럽게 감싸 안은 바이샤가 왼쪽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성들이 다시 환호했다.
“깨지도 않고 잘도 자는군.”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며 바이샤가 작게 중얼거렸다.
태어난 지 이제 백일. 두 사람의 소중한 아이는 그 백일을 무사히 보내고 오늘에서야 드디어 헬라임의 제단에 올라 자신이 신의 핏줄임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일부러 깨우지 마세요.”
“……설마 내가 그러겠어?”
“바이샤.”
“안 해. 걱정하지 마.”
애정과 장난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답하는 바이샤의 모습에 세리아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베일 너머 온통 붉게 물들어 있는 제단의 꼭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세리아나는 그녀가 느낀 익숙함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울이 마지막으로 비추었던 모습이구나!’
바이샤의 두 번째 결혼식이라 믿었던 붉은 길이 사실은 두 사람의 아이가 처음 오르게 되는 붉은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후손을 가지라는 압박이 될까 야안이 일부러 가르쳐 주지 않은 두 번째 붉은 길을 그의 다른 결혼식이라 오해한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자신은 어떤 다짐을 했던가. 수많은 다짐과 맹세들이 떠올라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세리아나?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올라서요.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재미있는 이야기? 어떤 거지?”
“음…… 제 첫사랑 이야기?”
“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반문하는 바이샤를 보며 세리아나가 조금 더 큰 웃음을 터트렸다.
날벼락을 맞은 듯 도무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첫사랑이라니…… 그 씹어먹을…… 아니, 어느 잘나신 분의 이야기를 해주려고?”
“당신도 들으면 웃게 될 거에요, 분명히.”
이를 갈면서도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맞잡은 손에 더 큰 힘을 준 바이샤가 조금 더 빨라진 걸음으로 계단을 성큼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뒤를 쫓아 걷는 세리아나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 밤 그녀는 숨겨 왔던 마지막 이야기를 그의 사랑하는 남편에게 들려줄 것이다.
눈물범벅으로 숨을 곳을 찾아 들어간 창고에서 마법의 거울을 발견한 어린아이가 사랑에 빠진 그 순간을.
그 사랑으로 인해 버텨낼 수 있었던 시간을.
그리고 마침내 얻게 된 당신의 사랑을.
그 모든 것을 세리아나는 바이샤에게 고백할 준비를 마쳤다.
_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