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101화 (101/110)

#101. 매듭 (7)

등과 뒤로 뻗은 두 손으로 바위를 지탱하고 있는 바이샤의 한쪽 얼굴이 피로 적셔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산사태를 막으며 이마가 찢어진 것 같았다.

“아, 안 돼! 바이샤!”

“세리아나…… 당신은 괜찮은 건가?”

눈으로 살피기에도 버거운 크기의 바위를 짊어진 바이샤는 눈으로 세리아나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피가 흐르는 건 당신이면서 왜 걱정스러운 시선은 나에게 닿는 것인가? 울컥하고 치밀어오르는 마음이 눈물이 되어 세리아나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피, 피가…… 바이샤, 피가 나요……!”

“괜찮아.”

“왜…… 왜 피하지 않은 거예요.”

“당신을 두고 나 혼자? 농담을 주고받을 상황은 아닌 거 같은데?”

찢어진 이마에서 흐른 비가 그의 뺨을 타고 흘러 턱 끝에 맺혔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피를 보며 세리아나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눌라의 채찍에 상한 어깨와 심하게 부어오른 발목이 움직일 때마다 고통을 선물했지만 세리아나는 멈추지 않았다.

“멈춰, 세리아나. 거기, 거기에 있어. 아직 위험해.”

“싫어요…….”

바닥을 기어 바이샤 곁으로 다가간 세리아나가 팔을 뻗었다.

마치 바이샤의 목을 감싸 안는 것처럼 내민 팔로 그가 받치고 있는 바위를 밀어내려 애쓰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었지만 저를 위해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려 애쓰는 세리아나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기쁜 마음이 웃음이 되어 자꾸 밖으로 새어 나오려 하고 있었다.

“당신에게, 큭, 해야 할 말이 있어.”

“나중에……나중에요. 제발 바이샤. 힘을 아껴요.”

“후회하기 전에…… 꼭 해야 하는 말이야.”

바이샤의 뜨거운 숨결이 세리아나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의 이마에서 흐른 피가 어깨를 적시는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

그녀는 제 미약한 힘이 조금이라도 바이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끌어모아 바위를 밀어내고 있었다.

“세리아나, 나의 라누아…….”

“바이샤, 제발……!”

“사랑해.”

심장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귓가에 떨어진 한마디가 귓바퀴를 타고 귓속으로 스며들어 그녀의 고막을 두드렸다.

“너무 늦게 깨달았어. 늦은 만큼 확실히, 윽, 당신에게 전하고 싶어서…… 그래서 조금 시간이 필요했었는데…….”

“바, 바이샤…….”

“당신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어. 이 말 한마디를 영원히 전하지 못할까 봐 겁이 났어.”

바위를 밀치는 세리아나의 두 팔이 떨려 왔다.

힘을 다한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인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고백에 몸이 떨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바이샤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 헤매는 사이에도 바이샤의 고백은 계속되었다.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너무 늦어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을 제때 하지 못했어.”

“…….”

“늦어서 미안해.”

“……바이샤?”

“사랑해, 세리아나. 당신을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에 어떤 대답을 전하기도 전, 바이샤가 고개를 툭 하고 떨궜다.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듯 고개를 숙인 그의 모습에 세리아나는 불길함을 느꼈다.

“뱌이샤? 대답해요. 제발 대답해 줘요. 바이샤? 무사한 거죠? 제발……제발 대답해요!”

정신을 잃은 것이 분명한데 바위를 받친 몸은 무너지지 않는다.

마치 이 자리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바위를 받친 채 버티고 있는 바이샤의 이름을 부르며 세리아나가 울부짖었다.

제발 대답해 달라고, 자신을 홀로 두지 말라고, 다시 한번 이름을 불러 달라 애원하고 간청했다.

“누구든 좋으니까 제발! 이 사람을 구해 줘! 바이샤를 살려 줘!”

그녀의 외침에 아로가 긴 울음소리로 대답했다.

세리아나는 자신의 어깨 위에 이마를 기댄 채 정신을 잃은 바이샤의 이름을 불렀다.

여러 개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자신과 바이샤의 이름을 외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계속해서 바이샤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 * *

세리아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찻잔에 담긴 진한 색으로 우려낸 차에선 익숙한 꽃향기가 났다.

그 향기를 깊게 들이마신 세리아나는 길고 느리게 숨을 뱉으며 자신 앞에 앉은 이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꿈이다.

세리아나는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자신조차 모른다.

그저 이것이 꿈이라는 것만이 확실했다.

“내 얼굴이 궁금한가 보구나?”

“네.”

“그리 애쓰지 않아도 된단다. 너는 이미 내 얼굴을 알고 있으니.”

“그런가요?”

여상히 답한 세리아나는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꽃이 가득한 공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차를 음미하고 있는 이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절로 마음이 고요해졌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하니?”

“……네.”

“여기에 오기 전 있었던 일은 기억이 나고?”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바로 앞에 앉아 있음에도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이였다.

그런 이의 웃음소리를 정말로 들은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리아나는 안개가 낀 듯 윤곽조차 알아볼 수 없는 이의 얼굴을 살피는 걸 포기하고 그의 질문을 떠올렸다.

“여기에 오기 전…….”

“그래, 여기에 오기 전.”

“저는…….”

그 순간 바이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을 타고 흐르던 피와 어깨에 닿았던 그의 야트막한 숨결을 떠올린 순간 세리아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급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바이샤는, 그 사람은 어디에 있어요? 무사한가요?”

“아이야, 진정하렴. 여긴 네 꿈속이 아니니. 잠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확인할 수 있을 텐데 그리 부산을 떨 필요는 없단다.”

“어떻게 하면 이 꿈에서 나갈 수 있나요?”

“오랜만에 왔으면서…… 벌써 가려고?”

“바이샤를 봐야 해요. 그 사람이 무사한지 확인해야 해요.”

“너는 정말 그 아이를 좋아하는구나. 이러니 내가 심술을 부릴 수밖에.”

앞에 앉은 이가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여유가 넘치는 그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은 세리아나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로 애원했다.

“돌려보내 주세요.”

“네가 원하면 그리될 거란다. 나는 널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잖니.”

“무슨……?”

“그러니 내게 아주 조금만 시간을 다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리 금방 헤어지기가 아쉬워 그런단다.”

수수께끼 같은 말에 세리아나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이였지만 믿어도 된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세리아나의 그런 모습에 활짝 미소 지은 이가 몸을 살짝 앞으로 내밀며 질문을 던졌다.

“넌 대체 그 아이가 왜 좋으니?”

“네?”

“늘 그게 궁금했단다. 내 자식이지만 거칠고 오만하고 제 잘난 맛에 사는 그런 놈이 어디가 좋은지 난 정말 모르겠어.”

세리아나는 눈앞의 이가 말하는 ‘아이’가 바이샤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비난하는 듯 들리는 말에 담긴 애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졌다.

그녀 앞에 앉은 이는 누구일까?

“바이샤는 다정하고 부드럽고 착한 사람이에요.”

“다른 아이들이 들었다면 기가 막혀 뒷목을 잡았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사실인걸요. 바이샤는 제게 늘 그랬어요.”

“네 눈에 뭐가 씐 게지.”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은 이가 제 몫의 차를 한 모금 더 삼켰다.

그이의 여유로움은 전염성이 있는 듯했다.

마음속에 가득 들어찼던 다급함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세리아나는 앞에 앉은 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눈에 씐 것을 벗어낼 생각조차 없는 듯하니 이번에도 내가 져 줄 수밖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이해할 필요는 없단다. 어차피 꿈에서 깨어나면 잊게 될 테니.”

“왜요?”

“그거야 네가 ‘아래’에 있는 동안엔 ‘위’를 생각하지 않고 살고 싶다 했으니 그렇지. 나도 아쉽단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난 너를 이겨본 일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순식간에 눈앞의 테이블이 사라졌다.

그리고 바람이 일었다.

사납지 않은 바람은 먼 경계에서부터 일어 그녀 주변을 감싼 꽃들을 하나하나 흩트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한 세리아나가 사방을 살피는 동안 그녀 앞에 앉아 있던 이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당신은 누구죠?”

“오랜만에 너를 만나 즐거웠단다.”

“누군지 알려 주세요!”

“너는 이미 알고 있다니까?”

멀어지는 이의 얼굴을 가린 안개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 가까이 다가온 바람이 꽃잎을 휘날려 그녀의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하나 세리아나는 보았다.

옅어진 안개 너머 야안의 얼굴을, 그리고 치아린의 얼굴을…….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녀가 아는 이들의 것으로 계속해서 바뀌는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그이는 까마득히 먼 곳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세리아나?”

그리고 세리아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익숙한 천장의 무늬와 포근한 이불의 감촉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바이샤…….”

“슬픈 꿈을 꿨나?”

“아니요.”

“그러면 왜 울고 있지?”

“어머니를…… 어머니의 얼굴을 본 것 같아서요.”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러나 무척이나 그리웠던 이를 만난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잔상으로 남은 엘라이어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랐다.

“웃고 계셨어요. 어머니가 그렇게 웃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째서일까요?”

바이샤의 부축을 받으며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난 세리아나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이마에 하얀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이 그제야 두 눈에 들어왔다.

“이마가…….”

“그냥 찢긴 상처야.”

“피를 많이 흘리셨어요. 전 바이샤가…… 바이샤가 죽는 줄 알고…….”

집채만 한 바위를 받친 채 정신을 잃었던 바이샤와 그런 그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던 세리아나는 뒤늦게 따라온 카얀과 다른 전사들에 의해 구조되었다.

아로의 안내가 있었다고 했다.

바이샤부터 구하라고 명령했던 세리아나는 그가 다른 전사들에 의해 바위 아래에서 몸을 빼는 것을 확인하고 정신을 놓았다.

그리고 삼 일. 세리아나는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오래 잠들어 있었다구요?”

“그래.”

어느새 침대 위로 올라와 세리나아의 곁에 자리 잡은 바이샤가 그녀를 품 안에 당겨 안았다.

절대로 놓아줄 수 없다는 듯 강한 힘으로, 그러나 부드럽게 세리아나를 끌어안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잃는 줄 알았어. 그리고 우리의 아이도.”

“아…….”

세리아나가 조심스럽게 아랫배 위에 두 손을 올렸다.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올린 바이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이는 무사해. 걱정하지 마. 우리의 아이야. 그리 쉽게 우리를 떠날 리 없지.”

“……네.”

아이를 지켜냈다.

저 역시 죽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워 세리아나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런 그녀의 이마에 바이샤가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나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아.”

“아…….”

“눈앞이 새까맣게 변하는 와중에도 당신의 울음소리가 들렸어. 그런데 내가 떠날 리 없잖아.”

“바이샤…….”

“그리고 고백에 대한 답을 듣지도 못했는데 어딜 가겠어.”

“네?”

바이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 눈을 깜빡이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빠르게 눈을 깜빡인 덕분에 눈에 고였던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 눈물 자국을 닦아낸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붙이며 다시 한번 온 마음을 담아 고백했다.

“사랑해, 세리아나.”

“…….”

“사랑하고 있어. 앞으로도 계속 당신만을 사랑할 거야.”

“…….”

“대답은?”

말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세리아나의 얼굴에 계속해서 입을 맞추며 바이샤가 재촉했다.

지금 당장 그 대답을 듣지 않으면 죽을 사람처럼 엄살을 부리며, 그 와중에도 입맞춤은 멈추지 않은 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대답을 졸랐다.

“세리아나, 대답해 줘. 이렇게 간청할게.”

“저도, 저도…… 사랑해요.”

“응.”

“사랑하고 있어요. 처음 본 순간부터…… 내게는 당신뿐이어서, 그래서…….”

“나 역시 그랬어. 늦게 알아차려 미안해.”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울음이 섞이고 기쁨이 섞였다.

가슴 터질 듯 차오른 사랑이 넘쳐 눈물이 된 것 같았다.

부드럽게 닿았다 삼킬 듯 부딪혀 오는 입술과 그 사이로 계속해서 사랑한다는 말이 넘실거렸다.

“바이샤…….”

“나의 세리아나.”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하고서 환하게 웃는 세리아나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고 빛이 났다.

그런 그녀의 입술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춘 바이샤가 세리아나를 품에 가두듯 안고 두 팔에 힘을 주었다.

누구도 그의 품에 안긴 세리아나를 데려갈 수 없다는 듯 그렇게 가슴이 벅차도록 그녀를 품에 안은 바이샤가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새장 속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로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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