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매듭 (6)
바이샤는 낮은 소파에 기대어 앉은 채 밤의 사막을 살폈다.
처음 어지러웠던 시야에 적응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아로의 눈으로 아눌라와 세리아나의 흔적을 찾던 바이샤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 묻는 아로에게 우선 흰 모래사막으로 움직이라 명령했다.
신의 전령이라 불리는 쿠락의 날개는 그를 순식간에 흰 모래사막의 끝으로 데려다주었다.
달을 비추는 잔잔한 바다와 고요한 사막의 모습을 살피며 인기척을 살피던 바이샤는 고개를 저었다.
어디에서도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위산으로 가자.’
공중에서 우아하게 방향을 튼 아로가 바위산을 향해 날갯짓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바위산의 주변 길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아눌라가 대담한 일을 벌인다 하더라도 그녀 역시 사막의 전사였으니까. 헬라임의 자식들에게만 허락된 장소에 함부로 발을 들여놓을 거란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떠한 예감이 바이샤의 생각을 돌려놓았다.
사막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을 벌인 아눌라가 과연 상식적인 도주로를 선택했을까?
‘살펴서 나쁠 것은 없지.’
여유를 부리는 것은 아니었다.
세리아나의 안전이 걸린 만큼 그 어느 때보다 필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바이샤는 의문이 남은 길을 살피기로 했다.
그의 예감은 언제나 옳은 길로 바이샤를 인도해 주었으니까.
“세리아나.”
그리고 그 예감은 이번에도 바이샤에게 그것이 정답이었다 알려주었다.
아로의 눈으로 바위산을 살피던 바이샤는 손이 묶인 채 아눌라에게 끌려가고 있는 세리아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반가움에 아로의 울음이 터져 나온 순간 세리아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친 것 같았다.
“윽……!”
“쿠드라! 괜찮으십니까?”
그 순간 아로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갑작스러운 단절에 속이 뒤집혀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옆에서 대기 중이던 카얀이 서둘러 다가와 그의 몸을 살피는 것을 느끼며 바이샤가 손을 휘저어 그의 걱정을 끊어냈다.
“나는 됐다. 조금 어지러운 것뿐이야.”
“네.”
“전사들은?”
“명령을 내리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찾으신 겁니까?”
“그래.”
헬라임의 성지에 아눌라와 세리아나 두 사람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전 아로와의 연결이 끊어진 것이 아쉬웠으나 그는 똑똑히 보았다.
“수로.”
아눌라는 수로를 따라 이동 중인 게 분명했다.
수로를 거슬러 바위산의 가장 깊숙한 장소에 숨을 생각일 것이다.
추적자들의 포위망이 느슨해질 때까지 그곳에서 시간을 벌 속셈이겠지. 사막의 전사들은 죄인이 라누아라는 인질을 잡고서 성지이자 금역인 바위산에 숨어들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
실제로 바이샤도 ‘예감’이 아니었다면 바위산 안쪽을 살펴볼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로입니까?”
“그래.”
“시카의 아눌라가 미쳤군요.”
바이샤의 혼잣말에 상황을 파악한 카얀이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평소 얼굴에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그의 얼굴이 대번에 변할 정도로 아눌라의 선택은 상식을 넘어가 있었다.
“바로 가겠다.”
“전사들이 성지에 들어가기 위해선 준비가 필요합니다.”
“내가 먼저 간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따라와.”
“최대한 빨리 따르겠습니다.”
신의 핏줄이 아닌 이들이 성지에 발을 들이기 위해선 정화의 의식이 필요했다.
말이 정화의 의식이지 사실은 전사들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한 의식이나 마찬가지였다.
바위산은 성지이자 금역으로 불리는 땅이었고 금기를 어긴 인간은 반드시 헬라임의 노여움을 사 벌을 받기 때문이었다.
바이샤의 허락이 있으니 헬라임의 허락을 따로 구할 필요는 없었지만 전사들의 불안을 달래는 의식을 생략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태가 사태인 만큼 카얀은 정화의 의식을 약식으로 최대한 빠르게 진행할 생각이었다.
“다른 길을 찾을 필요는 없다. 수로만 따라서 움직여.”
“조심하십시오.”
카얀의 당부가 끝나기도 전에 창문 밖으로 몸을 날린 바이샤는 뛰고 있었다.
오아시스를 둘러 수로를 따라 올라가는 방법보다 더 빠른 길을 알고 있기에 그의 움직임엔 망설임이 없었다.
배를 끌어올 시간이 없어 오아시스에 몸을 던진 바이샤는 빠른 속도로 헤엄쳐 샘을 건넜다.
그리고 어린 시절 아버지의 눈을 피해 올랐던 바위산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과 비할 수 없을 만큼 강인한 몸을 무리한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크고 작은 바위를 타고 넘었다.
“삐이-”
중간에 잠시 길을 헤맬 뻔한 순간엔 어느새 합류한 아로가 방향을 잡아 주었다.
아로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바이샤는 멀지 않은 곳에 세리아나가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찾았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세리아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붉은빛으로 물든 동쪽 하늘 위로 태양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세리아나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작지만 천둥소리보다도 강하게 귀가 아닌 심장에 내려꽂히는 그리운 목소리였다.
그녀를 노려보고 있던 아눌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절대로 들려올 수 없는, 그리고 들려와선 안 되는 목소리에 놀라 몸을 굳혔다.
“세리아나.”
세리아나의 연둣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눈앞에 그가 환상처럼 사라질까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세리아나!”
바로 그곳에 바이샤가 서 있었다.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눈은 세리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도와 애정이 담긴 호박색 눈동자가 저를 담고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맥이 풀리며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바이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드디어 세리아나를 찾았다는 생각에 안도하던 바이샤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눈물범벅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얼굴, 피가 흐르는 어깨와 눈으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부어오른 발목.
낮잠에서 깨어나 그에게 환히 웃어주던 마지막 모습과 대비되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세리아나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는 동안 쌓인 분노는 세리아나 앞에 채찍을 들고 서 있는 아눌라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폭발했다.
“감히……!”
성난 바이샤의 목소리에 아눌라가 흠칫 몸을 떨었다.
진한 살기가 피부를 저미는 듯했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은데 긴장으로 꽉 다물린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것은 앓는 소리뿐이었다.
“쿠, 쿠드라…….”
“세리아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나, 나는…… 아니, 저는…… 이, 이 불결한 사생아를 치, 치우려고…….”
“세리아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물었다!”
목이 졸리는 소리를 내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아눌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억울해진 것이다.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탐한 불결한 계집 하나를 위해 차이툰의 위대한 왕이 제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이래선 안 된다.
바이샤는 자신 곁을 허락할 수 있는 유일한 사내였고 저를 가장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고귀한 라누아로 만들어줄 수 있는 남자였다.
고작 저런 계집을 위해 화를 낼 것이 아니라 그를 대신해 쓰레기를 치워준 자신에게 박수를 쳐 줘야 옳았다.
억울함에 덩치를 키운 분노가 두려움을 눌렀다.
아눌라의 흔들리던 헤이즐넛색 눈동자가 붉게 타오르며 그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더러운 것을 치운 것뿐입니다! 당신이 하지 못한 것을 제가…… 아니, 내가 대신 하고 있을 뿐인데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죠?”
“아눌라!”
“그래요! 나는 시카의 아눌라! 누구보다도 위대하고 고귀한 라누아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죠!”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른 아눌라가 세리아나의 멱살을 잡아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놀란 아로가 다시 아눌라를 공격하려 했지만 세리아나를 방패 삼아 흔드는 모습에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공격을 포기한 것은 아닌지 아로는 아눌라의 머리 위를 맴돌며 기회를 살피기 시작했다.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라누아가 될 수 있었어! 불결한 사생아 따위가 감히 내 자리를 도둑질했다고!”
“윽!”
“그만둬, 아눌라!”
“나는 내 것을 전부 잃었어! 그런데 내 것을 도둑질해 간 것도 모자라 내가 마땅히 품었어야 할 아이까지 빼앗아?”
억지였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가 아눌라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실핏줄이 터져 시뻘겋게 변한 눈으로 세리아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아눌라가 바이샤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악을 쓰던 얼굴은 어디 가고 그를 바라보는 얼굴엔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쿠드라, 당신도 아시잖아요. 라누아의 자리에 어울리는 건 바로 나예요.”
“헛소리. 나의 라누아는 세리아나뿐이다.”
“하!”
아눌라는 진심으로 웃기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사고가 마비된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분노였다.
그렇기에 함부로 자극해서는 안 된다.
이성이 제어할 수 없는 분노는 피를 부르기 쉬우니까. 바이샤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세리아나를 살피며 조금씩 아눌라와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쿠드라, 당신은 늘 나를 용서하셨어요.”
“용서한 적 없다.”
“아니요, 당신은 나를 용서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나를 용서할 테죠. 라누아의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 나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헛소리.”
“그래요, 이해해요. 암만 쓰레기 같은 여자라 해도 헬라임 앞에서 연을 맺은 아내이니 함부로 버릴 순 없겠죠.”
조금만, 조금만 더. 몇 발자국만 더 다가갈 수 있다면 세리아나를 무사히 구해낼 수 있다.
당장이라도 몸을 날려 미친 아눌라를 제압하고 싶었지만 세리아나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바이샤는 급한 마음에 챙겨 오지 못한 제 검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였다.
“그러니 제가 대신할게요.”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당신이 하고 싶으나 할 수 없는 일이죠.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를 위해서 제가 할게요.”
천천히 움직이던 바이샤가 걸음을 멈추었다. 저를 똑바로 바라보며 웃는 아눌라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아눌라가 두 손으로 세리아나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죽어! 죽어버려!”
“그만둬!”
순식간에 세 사람의 몸이 뒤엉켰다.
평범한 사람의 힘이라 볼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으로 세리아나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 아눌라는 웃고 있었다.
세리아나가 몸을 비틀며 발버둥 치고 바이샤가 강한 힘으로 그녀를 떨어트리려 했다.
그러나 아눌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에 더욱 강한 힘을 주며 세리아나의 목을 졸랐다.
“삐-삐-”
아로의 다급한 울음소리가 들려온 순간 땅이 흔들렸다.
작은 진동은 서로 얽혀 거대한 벽을 이루고 있던 바위를 흔들며 그 크기를 키워갔다.
바위틈 사이사이로 작은 돌멩이들과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곧 두 발로 서 있기 어려울 만큼 커다란 울림이 세 사람을 덮쳤다.
“세리아나!”
거친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몇 번을 구른 이후에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던 세리아나는 저를 덮쳐오는 커다란 바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당장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푸른빛으로 변한 발목의 상처 때문에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바이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며 그동안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라젠의 궁 정원에서 바이샤를 만나 그의 아내가 되고 모래사막으로 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났고 지키고 싶은 것도 생겨났다.
그것으로 울었고 웃었다.
아니, 웃은 기억이 더 많았다.
그 중심엔 바이샤가 있었다.
절망적인 얼굴로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바이샤의 얼굴을 바라본 세리아나는 웃을 수 있었다.
거울이 마지막으로 비추었던 바이샤의 얼굴이 떠올랐다.
덕분에 세리아나는 깨닫게 되었다.
‘아, 여기까지구나.’
여기서 자신의 생은 끝나는 것이다.
세리아나는 자신을 덮치는 바위를 외면하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아랫배를 감싸 안으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미안해 아가. 내가 널 지키지 못했어.’
행복하길 바랐다.
자신이 없더라도 아이만큼은 행복하길, 사랑받으며 자라나길 원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잔혹한 희망 사항이었을 뿐이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바이샤를 사랑하겠다고 한 맹세는 지켰으나 아이를 지키겠다는 맹세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다.
세리아나는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게, 자신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기를 바라며 자신을 덮칠 바위를 기다렸다.
죽음이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세리아나의 마지막 바람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당장이라도 저를 덮칠 듯 추락하던 바위가 움직임을 멈췄다.
바위가 바닥과 충돌하며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은 들었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을 덮치지는 않았다.
몸을 두드리고 지나가는 작은 돌멩이들마저 조용해진 순간 의아함을 느낀 세리아나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거대한 바위가 어째서 멈춰 섰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바이샤!”
거기에 그가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등으로 거대한 바위를 지탱하고 있는 바이샤가 세리아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