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매듭 (5)
아눌라는 미쳤다.
미친 게 분명하다.
세리아나는 제 아이를 이용해 라누아가 되겠다며 눈을 반짝이는 그녀에게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지기 위해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의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도망치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아눌라가 밧줄을 잡아당긴 것이다.
“정신 차려, 아눌라! 이 아이를 이용해 라누아가 되겠다니!”
“왜? 불가능할 것 같아?”
“당연히……!”
“쿠드라의 아이가 어머니라 부르는 이는 라누아 한 사람뿐이니 그 아이가 나를 어미라 믿도록 만들면 되는 일이야.”
억지였다.
그러나 아눌라는 진심으로 그리 믿고 있는 듯 세리아나의 아랫배를 탐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네 배 속의 아이가 나를 라누아로 만들어줄 거야.”
“그대, 정말로 미쳤구나.”
“첫 번째 자식이 간절히 원한다면 쿠드라께서도 들어줄 수밖에 없지!”
“아니야!”
“그게 아니면 그 아이의 목숨값으로 라누아의 자리를 받아내면 돼.”
“무, 무슨……!”
“설마 쿠드라께서 당신의 첫 번째 자식을 포기할까? 그럴 리 없지.”
아눌라가 밧줄을 세게 잡아당겨 세리아나를 자기 코앞으로 끌고 왔다.
그리곤 경악하는 세리아나의 얼굴을 감상하며 그녀의 아랫배 위에 제 손을 올렸다.
경악한 세리아나가 그 손길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아눌라가 한 손으로 목을 졸라 그 움직임을 막았다.
“귀한 아이야. 그러니 잘 지키도록 해.”
“큭……!”
“걱정하지 마, 내가 라누아가 되고 쿠드라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너의 아이는 돌려줄 테니. 어미와 자식이 헬라임의 품 안에서 재회하는 것도 좋지 않겠어?”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을 이용하고 죽일 계획까지 끝낸 아눌라를 향해 세리아나가 침을 뱉었다.
아눌라의 역겨운 욕망에 속이 뒤틀려 구역질이 올라와 참을 수가 없었다.
세리아나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을 흔들어 그녀를 바닥에 내팽개친 아눌라가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아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도망칠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세리아나를 묶은 밧줄의 끝을 강하게 움켜쥐며 아눌라가 사납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반항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번뜩인 그녀가 다시 바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키가 작은 풀들을 발끝으로 으깨듯 밟으며 산을 타는 아눌라를 따라 걷기 시작한 세리아나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삐이-”
그때였다.
어디에선가 익숙한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로?”
반가움과 걱정이 뒤섞인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세리아나는 곧 실망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조금 전까지 밤하늘을 밝히고 있던 커다란 달은 갑작스럽게 덩치를 키운 구름에 가려 빛을 잃은 상태였다.
덕분에 세리아나는 그녀의 작고 영리한 검은 새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었다.
‘아로의 상처…… 괜찮을까? 심하게 다친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하필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아눌라의 채찍에 당해 바닥에 누워 파르르 몸을 떠는 모습이었다.
조금 전 들은 소리는 아마도 그러한 걱정이 만들어낸 환청이었을지도 모른다.
세리아나는 아로가 부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 무사하기를 기도했다.
그렇게 또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세리아나의 배 속에 든 아이가 필요하다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강행군은 달이 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지평선 너머 모습을 감출 때쯤 끝이 났다.
달이 모습을 감추고 해가 아직 떠오르지 않은 시각.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던 키 작은 나무들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마른 풀잎들이 듬성듬성 자라난 평평한 땅에 도착한 아눌라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젠장!”
위아래가 훤히 드러난 공간이었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해야 했으나 뾰족하고 거대한 바위들이 얽혀 거대한 벽을 만들어낸 공간에서 길을 찾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예상외의 사태에 세리아나는 숨을 돌릴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까진 발바닥에서 흘러내린 피가 세리아나의 움직임을 따라 붉은 족적을 남겼다.
앓는 소리를 속으로 삼킨 그녀는 상처를 애써 무시하며 아눌라와 마찬가지로 주변을 살폈다.
‘수로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두 사람이 따라 올라왔던 수로는 바위 틈새로 이어져 있었다.
어린아이 하나가 간신히 통과할 만한 크기의 틈새를 따라 흘러나온 물은 사람의 손길로 정리된 수로를 따라 쉴 새 없이 아래로 흘러내려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살핀 세리아나는 이곳이 수로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린 바이샤가 수로의 끝에 이르러 본 것은 작은 폭포였으니까.
“여기서 끝이라니!”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아눌라는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느끼며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사막의 백성들이 귀하게 여기는 수원지였기에 조금은 비밀스러운 장소에 있을 것이라 짐작했던 탓이었다.
비밀스러운 공간이라면 더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다는 생각에 기껏 수로를 따라 올라온 것이었는데 이렇게 훤히 드러난 장소라니!
‘여기가 성지가 아니었다면 당장 추적자들이 들이닥쳤을 거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추적자들이 아직 두 사람의 흔적을 발견해 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만약 도망친 장소가 이곳 바위산이 아니었다면 조금 난감했을 것이다.
아눌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늘이 질 만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추적을 따돌리고 수로가 아닌 다른 길을 찾기 전까진 이 장소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니 태양을 피할 자리는 필수였다.
세리아나는 쉴 장소를 찾는 아눌라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씩 그녀와의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두 손이 묶이긴 했지만 발은 아직 자유로웠기에 도망칠 기회를 살피려면 지금뿐이었다.
‘라옴-디세나로…… 아니,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야 해.’
세리아나는 라옴-디세나로 향하는 길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 대략적인 위치는 알고 있었다.
바이샤가 직접 알려주기도 했고 야안과 치아린에게 하늘길을 읽는 법을 배우며 스스로 그 위치를 찾아본 경험도 있었다.
그러니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라옴-디세나는 이 바위산이 성지 혹은 금역이라 불리는 근본적인 이유이자 절대로 더럽혀져서는 안 되는 가장 신성하고 중요한 장소였다.
실수로라도 그곳으로 도망쳐 아눌라가 그곳에 발을 들이는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아눌라에게 끌려가면서도 하늘길을 살핀 덕분에 지금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정확히 파악한 세리아나는 머릿속에 도주로를 그려 넣으며 기회를 살폈다.
다른 곳이었다면 엄두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 이곳은 세리아나가 ‘아는’ 장소였다.
그리고 아눌라는 ‘모르는’ 장소이기도 했다.
물론 세리아나도 이 성지의 구석구석을 전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큰 차이였고 세리아나가 가진 이점이 되었다.
‘바이샤의 배는 반대편에 있을 테지만 얕은 자리를 둘러 헤엄을 친다면 충분히 건너갈 수 있어.’
아눌라를 따돌리고 오아시스를 건너 그녀의 방 커다란 창문으로 이어진 길 위를 달릴 것이다.
그러면 아눌라는 더는 그녀를 쫓지 못한다.
제자리를 탐하지도, 바이샤와 자신의 소중한 아이를 이용할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할 수 있을까?’
체력적으로 아눌라를 앞지를 순 없다.
그녀보다 발이 빠른 것도 아니고 눈이 밝지도 않았다.
가진 이점이라곤 아눌라보다 이 바위산에 좀 더 익숙하다는 것, 그리고 바이샤에게 들어 알고 있는 샛길이 있다는 것. 보지는 못하고 듣기만 한 장소였기에 제대로 찾아낸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지만 해내야 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저를 선택해 찾아온 소중한 아이였다.
사랑하는 남자와 자신의 피를 이을 귀한 아이를 아눌라의 손에 넘길 순 없었다.
세리아나는 아눌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밧줄로 단단히 묶인 제 손목을 비틀었다.
처음엔 뻑뻑하기만 하던 매듭이 조금씩 느슨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저를 묶은 밧줄의 반대쪽 끝을 꼭 잡은 채 주변을 살피는 아눌라를 곁눈질하며 하얀 피부가 밧줄에 쓸려 새빨갛게 변할 때까지 계속해서 손목을 비틀었다.
그렇게 한참을 밧줄과 씨름하던 세리아나가 한쪽 손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아눌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나머지 한쪽 손도 매듭 사이로 빼낸 세리아나는 밧줄의 끝을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뒤돌아 달음박질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바로 붙잡힐 것이다.
최대한 거리를 벌려둔 후 달아나야 한다.
천천히 한 걸음씩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세리아나가 드디어 평평한 바위산의 경계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그 경계 아래로 이어진 가파른 길을 곁눈질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한 걸음만 잘못 내디뎌도 위험해지는 길이었다.
“너! 거기 서!”
“윽!”
언제 몸을 날려 뛰어 내려가야 하나 망설이던 그 순간, 아눌라가 세리아나의 탈주를 눈치챘다.
그 바람에 놀라 발을 헛디딘 세리아나가 갑작스러운 통증에 입술을 깨물었다.
불안정한 바닥을 헛디딘 탓에 발목을 접질린 것이다.
그러나 주저앉을 순 없었다.
세리아나는 저를 향해 무섭게 달려오는 아눌라를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딜!”
발목의 통증을 무시하며 가파른 내리막길 위로 뛰어내렸다.
혹여 배 속의 아이가 놀랄까 두 손은 아랫배를 감싼 상태였다.
그렇게 위태로운 모습으로 내달리던 세리아나는 얼마 달리지 않아 저의 다친 발목을 낚아채는 아눌라의 채찍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듯 넘어지고 말았다.
황급히 몸을 비튼 덕분에 두 손으로 감싼 배는 충격을 받지 않았지만 오른쪽 어깨부터 바닥에 부딪힌 탓에 간신히 피가 멈추었던 상처가 터졌다.
그것 역시 아눌라의 채찍에 당한 상처였다.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한 어깨를 감싸 쥔 세리아나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쥐새끼처럼 도망을 치려고 해? 정말 이 자리에서 죽고 싶은 거야?”
“그대는 나를, 윽, 죽이지 못해.”
“아, 그래! 깜빡했네. 알려줘서 고마워. 나는 너를 살려서 데려가야 했지?”
“하윽!”
“하지만 아까도 말했잖아. 살아만 있으면 된다고.”
아눌라는 제 채찍에 감긴 세리아나의 발목을 지그시 밟으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녀의 모습을 감상했다.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신음처럼 새어 나오는 비명이 무척이나 기꺼웠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예술품을 감상하듯 세리아나의 발목을 더욱 강한 힘으로 내리누르던 아눌라가 발을 들고 채찍을 회수했다.
“조금만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면 그 입술까지 찢어줄 수 있었을 텐데.”
“하아, 하아…….”
숨을 급하게 몰아쉬는 세리아나의 멱살을 붙잡은 아눌라가 짐짝을 끌 듯 그녀의 몸을 끌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친 바닥에 몸이 쓸려 고통스러웠지만 부어오르기 시작한 발목 탓에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수로가 있는 바위산의 평지로 올라온 아눌라가 세리아나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찢긴 옷 사이사이 붉은 생채기가 남았다.
하지만 세리아나는 몸에 난 상처보다도 먼저 배를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이 아이가 무사하게 해달라고. 약하고 보잘것없는 자신보다 바이샤를 닮아 강하고 빛나는 아이로 무사히 태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다.
몸의 통증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나 아이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더욱 컸다.
아눌라는 떨리는 몸을 둥글게 말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세리아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안의 가학심을 충족시키는 그녀의 모습에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상태였다.
아눌라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채찍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또다시 도망을 치려 한다면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미리 알려주지.”
위협하듯 휘두른 채찍이 세리아나의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당장이라도 세리아나의 여린 피부를 할퀼 듯 채찍이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작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삐이-”
몸을 웅크린 채 아눌라의 채찍이 공기를 찢는 소리를 듣고 있던 세리아나는 다시 아로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이번에도 환청인 걸까? 그러나 그 울음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환청이 아니라는 확신이 든 순간 아눌라의 비명이 들려왔다.
“꺅! 그만둬! 이 미친 새가!”
“삐잇-삣!”
윤기가 흐르는 검은 날개를 활짝 펼친 아로는 아눌라의 얼굴을 공격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번갈아 할퀴고 쪼며 죽일 듯 덤벼드는 아로가 세리아나의 연둣빛 눈동자에 담겼다.
“아로!”
분명 다쳤을 텐데. 아눌라의 채찍에 한쪽 날개가 상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세리아나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저의 작고 검은 새의 이름을 불렀다.
“삐이-”
조금은 분이 풀렸는지 세리아나 곁으로 날아온 아로가 그녀의 다치지 않은 어깨에 내려앉아 얼굴을 비볐다.
세리아나는 그런 아로를 떨리는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제 눈에는 여전히 작고 어린 새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삐-”
“짐승 새끼가 감히 나를 공격해!”
아로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떨어트렸던 채찍을 다시 손에 쥔 아눌라가 살기를 가득 담은 눈으로 세리아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를 보호하듯 아로를 품에 안아 그녀의 시선으로부터 숨긴 세리아나가 아눌라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배 속의 아이도 품 안의 아로도 그녀가 지켜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