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98화 (98/110)

#98. 매듭 (4)

세리아나는 경사진 산비탈을 끌려 올라가고 있었다.

두 손은 앞으로 묶여 자유를 잃었고 바닥이 얇은 실내화는 어느 순간 사라져 그녀의 매끄럽고 보드라웠던 발바닥은 상처투성이로 변해 버린 지 오래였다.

“시간 끌 생각하지 말고 부지런히 움직여!”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단단히 묶은 줄 끝을 잡고 거칠게 잡아당기는 이는 아눌라였다.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세리아나의 굼뜬 행동을 지적하는 그녀는 초조해 보였다.

추적자가 절대로 따라올 수 없는 길로 도망치고는 있지만 난생처음 들어와 보는 길 위에서 제 안전을 백 퍼센트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긴 당신이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이야.”

“닥쳐! 네가 아니었다면 진즉 내게 허락되었을 길이야!”

두 사람이 달빛에 의지해 걷고 있는 길은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되는 성지이자 금역, 두 번째 오아시스가 있는 바위산이었다.

아눌라는 오아시스를 건너 라옴-디세나로 이르는 길은 알지 못했지만 오아시스를 둘러 수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성지에 닿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이 사막, 차이툰의 백성들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성지에 닿는 길이었기에 함부로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는 생각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아눌라는 이 길을 택했다.

‘상식’을 가진 사막의 전사들이 이 성지에 절대로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외부로 향하도록 조작해 놓은 흔적을 따라 움직이는 것도 잠시야. 분명 그게 거짓이라는 것을 눈치채겠지.’

어차피 그 흔적은 수로를 따라 금역으로 들어설 시간을 벌기 위한 장치일 뿐이었다.

많은 시간을 끌어주면 좋겠지만 약간의 혼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흔적이었으니 그만큼만 이용되면 그뿐이다.

‘내가 바위산을 넘을 거라 생각하는 이는 없을 거야.’

바이샤라면 분명 자신의 목적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아눌라 자신이 성역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상 추적은 무의미할 테니까.

“쿠드라께서 그대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용서? 내가 그분께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용서를 받아야 하지?”

수로에 더러운 흙이 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바위 하나를 넘은 아눌라가 그 바위 아래서 숨을 헐떡이는 세리아나를 내려다보며 조소했다.

저 더러운 사생아가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여기는 것이다.

세리아나는 그리지 않아도 선명히 보이는 아눌라의 조롱 섞인 웃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아눌라의 발을 묶어 시간을 벌고 자신이 성역에 있다는 사실을 바이샤에게 알려야만 했다.

그러나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 아눌라 덕분에 그녀는 지금까지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지도 못한 채 끌려다니고 있는 형편이었다.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험해.”

“그래서? 내 길잡이라도 되어 주려고?”

“……그래.”

“하하하하, 멍청한 사생아가 머리를 한번 써보겠다 애를 쓰는구나!”

아눌라가 몸을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세리아나는 그 덕분에 조금 느슨해진 끈을 당겨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직 배 속의 아이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으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하던 치료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꼭 지켜 줄게.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버텨 주렴.’

선물처럼 찾아온 아이다.

제 미래에 대해 불안함을 느꼈을지언정 이 아이가 온 것에 대해 불만을 품거나 두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

지키고 싶었다.

가깝거나 먼 미래에 자신이 옆에 없다 하더라도 아이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아가……. 절대로 날 떠나지 말아 줘.’

아랫배 위에 묶인 두 손을 올리고 눈을 지그시 감은 세리아나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어느 사이 웃음을 멈춘 아눌라가 노려보고 있었다.

세리아나의 손이 포개어진 곳에 무엇이 자리를 잡았는지 아눌라도 알고 있었다.

궁에 숨어들어 기회를 노리는 사이 우연히 알게 된 소식이었다.

[라누아께서 아기씨를 가지시다니! 오아시스의 경사야!]

[쉿! 조용히 해! 쿠드라께서 내일 승전 소식과 함께 선포하겠다고 하신 거잖아!]

[이런, 내가 실수할 뻔했군. 못들은 걸로 해, 못들은 걸로.]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채찍을 휘두를 뻔했다.

아이라니! 사생아 따위가 라누아의 이름을 가진 걸로도 모자라 쿠드라의 첫 아이를 가지다니!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가져야 할 모든 것을 라젠의 사생아 따위에게 도둑질당했다.

더럽고 불결한 말라깽이 계집이 감히 제 것을 빼앗아 간 것이다.

참기 어려운 모욕감에 이가 갈리고 한계를 넘어선 분노에 몸이 떨려 왔다.

새로운 계획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라누아의 방으로 쳐들어가 세리아나의 목을 잘라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눌라는 가까스로 분노를 누르고 그길로 시카의 전사들을 소집했다.

아눌라에게 하나, 혹은 둘 이상의 약점을 잡힌 이들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붙잡히면 그들의 죄 역시 고백해 절대로 혼자 죽지 않겠다며 그들을 협박했다.

그리고 자신만이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설득했다.

시카의 후계자로 아눌라는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고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을 익혔다.

그녀는 그렇게 배운 것을 이용해 저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여 줄 이들을 만들었다.

하누가 있었다면 일이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입맛에 맞춰 움직여 줄 하누는 배신자가 되었다.

라누아의 자리에 오르면 가장 먼저 두 발과 손을 잘라 검은 사막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녀는 그런 생각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궁에 숨어들어 말 못 하는 시녀 몇을 치우고 시카의 전사 몇과 함께 그 빈 자리에 스며들어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시카의 전사들이 궁 밖에서 소란을 일으켜 시선을 빼앗은 틈을 타 세리아나를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이 사막을 무사히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일을 시작하기 전 미리 매를 날려 보냈으니 약속한 장소에 마중을 나온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만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리고 저 아이. 생각한 대로만 된다면 일을 좀 더 쉽게 풀 수 있을 거야.’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은 세리아나의 사정을 봐줘 가며 바위산을 오르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아눌라는 이마에 흐른 땀이 적당히 식은 것을 느끼곤 느슨해진 줄을 다시 세게 잡아당겼다.

“쉬었으면 움직여. 네가 그렇게 시간을 끌어도 바뀌는 건 없어.”

두 사람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은 험난했다.

바이샤와 함께 라옴-디세나로 향했던 길이 얼마나 평탄했는지 새삼 깨달은 세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 험한 길을 단순히 그 끝이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를 악물고 올랐던 어린 바이샤의 모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어린 그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걷고 있다 생각하니 이 힘들고 험한 길이 두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드디어 미쳤나 보군.”

앞서 걷고 있던 아눌라는 그런 세리아나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세리아나가 힘든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정신을 놓은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녀의 말에 잠깐 걸음을 멈춘 세리아나는 저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아눌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미치지 않았어. 다만 그대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이야. 아니,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네.”

“허세도 정도껏 부리는 게 좋을 텐데?”

“허세는 그대가 부리고 있지. 정말로 쿠드라의 눈을 피해 달아날 수 있을 거라 믿어?”

세리아나의 대답에 아눌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노예처럼 밧줄에 묶여 짐승처럼 끌려오고 있는 주제에 저를 깔보듯 웃고 있는 세리아나를 보고 있으려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생아 주제에.”

“그것 말고는 나를 이를 말이 없나 봐.”

“뭐?”

“그대, 시카의 아눌라. 그런 말로는 나를 상처 입힐 수 없어.”

사로잡힌 주제에 쓸데없이 당당한 세리아나의 태도가 아눌라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더럽혀진 옷과 헝클어진 머리카락 덕분에 남루한 행색을 하고 있는 세리아나였다.

그러나 더없이 당당하기만 한 태도로 저를 바라보는 모습이 자신이 ‘진짜’ 라누아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아눌라는 참을 수가 없었다.

“꺄악!”

공기를 찢는 소리와 동시에 세리아나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눌라의 허리에 감겨 있던 채찍이 세리아나의 어깨를 후려친 것이다.

어느새 채찍의 손잡이를 잡고 선 아눌라의 눈동자가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내려앉은 서늘한 밤공기를 찢으며 채찍을 두어 번 더 내리친 아눌라는 세리아나의 어깨를 타고 흐르는 붉은 피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기왕이면 온전한 상태로 넘겨달라 해서 참으려 했는데……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무, 무슨…… 윽……!”

피가 흐르는 어깨를 묶인 두 손으로 감싸며 세리아나가 아눌라를 바라보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채찍을 회수해 다시 허리에 감은 아눌라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널 살려 두고 있다고 생각해?”

“…….”

“쓸모가 있으니까. 너를 비싼 값에 사겠다는 이가 있어.”

누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세리아나는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생각했다.

대체 누가 자신을 원한다는 것일까? 아눌라가 말한 ‘비싼 값’에는 그녀가 몸을 숨길 안전한 장소 역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감히 차이툰 여왕의 몸값을 운운하는 자이니 평범한 이는 절대로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설마…… 카디마의……?”

“그래, 카디마의 늙은 마녀가 너를 사겠다고 했어. 근래에 보기 드문 접붙이기 재료라 무척이나 탐이 난다 하더군.”

오아시스로 돌아가는 길, 세리아나를 죽이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 세워둔 두 번째 계획이었다.

대륙회의 첫 번째 날 열린 연회에서 세리아나에 대한 욕심을 감추지 않았던 카디마의 여왕 미라스는 아눌라의 비밀스러운 접근을 경계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눌라의 욕심 가득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저와 닮았다 칭찬을 늘어놓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해준다면 기꺼이 보답하겠네.]

세리아나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그럴 수 없다면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는 것도 방법이리라. 아눌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카디마의 여왕이 건네준 매 한 마리를 받아 제 짐 사이에 숨겼다.

물론 그때만 해도 이 매를 날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뒤집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늙은 마녀는 네 한쪽 팔이 날아가든 두 발목이 잘리든 상관없을 거야. 그저 산 채로 그 눈동자를 보존한 채 제 손에 떨어지기만 하면 충분히 만족할 테지.”

그럼에도 아눌라가 세리아나의 두 손과 발을 남겨둔 것은 그것이 ‘상품’을 가지고 이동하는 데 조금 더 편했기 때문이었다.

세리아나는 저를 카디마의 여왕에게 접붙이기 재료로 팔아넘길 것이라 말하는 아눌라를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륙회의를 마치고 오아시스로 귀환하던 길의 습격을 카디마의 짓이라 의심한 순간은 있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여왕이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금세 지워 버린 생각이었다.

“카디마의 얼음 여왕이 전쟁까지 감수해 가며 나를 원한다고?”

“그 얼음 땅에 네가 있다는 것을 쿠드라께서 모른다면 문제 될 게 없지.”

“바이샤가 모를 리 없어!”

“내 앞에서 그분을 ‘이름’으로 부르지 마! 너같이 더러운 사생아 따위가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이름이 아니야!”

당장이라도 허리에 감았던 채찍을 다시 풀어 내리칠 것처럼 으르렁거린 아눌라가 손에 쥔 밧줄을 세게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몸에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진 세리아나가 다급히 제 아랫배를 보호하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래, 아이는 보호해야지. 그 아이는 내게도 필요하니까.”

“필요해……?”

세리아나는 아눌라의 섬찟한 시선이 제 아랫배에 닿아 있는 것을 보고 몸을 떨었다.

두 손으로 아랫배를 감싸 그녀의 시야에서 제 작은 아이를 숨기려 했지만 불쾌할 정도로 끈적한 아눌라의 시선은 집요하게 세리아나의 배 속에 있는 작은 생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디마의 늙은 마녀가 원하는 건 너지 그 아이가 아니야. 아니, 원한다 해도 쿠드라의 아기씨를 그 미친 늙은이에게 넘길 순 없지. 그 아이는 나를 라누아로 만들어줄 귀한 아이니까.”

“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네 아이는 나를 어머니라 부르게 될 거야. 그리고 난 그 아이를 안고 차이툰으로, 이 오아시스로 돌아와 라누아가 되는 거야.”

“헛소리!”

“나는 네가 죽었다고 말할 거야. 늙은 마녀가 원하는 아이를 만들어낼 때까지 넌 살아도 산 게 아닐 테니 죽었다 말한들 그게 거짓말이겠어?”

달빛 아래 붉은색으로 번들거리는 아눌라의 눈동자는 현재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세리아나는 불길하게 빛나는 아눌라의 눈동자에서 광기(狂氣)를 발견했다.

“나는 라누아가 될 거야. 라누아가 되어 마땅히 내 것이 되어야 할 모든 것을 손에 쥐겠어.”

아눌라의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 스산하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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