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97화 (97/110)

#97. 매듭 (3)

시카의 아눌라가 아기씨를 가진 라누아를 납치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차이툰의 백성들은 쫓고 있던 죄인이 오아시스 안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에 먼저 놀라고, 그 죄인이 라누아를 납치했다는 데 경악했다.

그리고 납치당한 세리아나가 아이를 가진 상태라는 소식엔 차마 그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모래땅에 신의 손길이 닿은 이후 처음 벌어진 대사건이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누가 누굴 납치했다고?”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라누아의 방을 바라보며 바이샤가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답을 몰라 똑같은 질문을 다시 던진 것은 아니리라. 그렇지만 카얀은 그의 주인이 원하는 대로 조금 전 했던 말을 반복했다.

“시카의 아눌라가 라누아를 납치했습니다. 조금 전 있었던 소란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유인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내 오아시스에 죄인과 그에 동조하는 자들이 남아 있을 수 있지?”

“……죄송합니다.”

모래폭풍이 불어오기 직전의 고요함을 닮은 바이샤의 물음에 고개를 숙인 카얀이 자신의 옆을 곁눈질하며 답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자리엔 두 명의 사내가 죄인의 자세를 하고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아눌라의 추적을 담당하고 있는 파라간과 누라비를 대신해 시카를 관리하고 있던 샹크, 두 사람이었다.

오아시스 밖으로 이어져 있는 아눌라의 흔적을 좇던 파라간은 그것이 조작된 흔적이라는 것을 빠르게 알아차렸으나 그것이 아눌라가 오아시스 안에 숨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가 암만 뛰어난 능력을 갖췄다 하더라도 조력자 하나 없이 오아시스 안에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샹크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시카의 내부를 더 집요하게 살피지 못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시카 안에 조력자가 남아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눌라가 약점을 쥐고 제 입맛대로 주무를 이들이 잔뜩 남아 있었다.

아눌라는 자신이 잡히면 그들의 죄까지 모두 폭로하겠다는 협박으로 아무도 모르게 오아시스에 숨어 기회를 노렸고 보란 듯이 세리아나를 납치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파라간, 네 이름 앞에 놓인 차이툰의 이름이 가볍더냐?”

“아닙니다.”

“샹크, 네 손안에 있던 시카를 쥐는 것이 버거웠나?”

“죄송합니다.”

바이샤의 분노가 칼날이 되어 두 사람의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

살기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면 이 방안을 가득 채워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이를 가지셨다.”

바닥에 엎드린 파라간과 샹크가 몸을 움찔거렸다.

아눌라가 범한 죄가 새삼 더 크게 다가왔다.

그녀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아눌라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욱 필사적으로 도망칠 것이다.

“돌아와 제대로 된 휴식조차 취하지 못했어!”

“쿠드라, 진정하십…….”

“세리아나가 사라졌는데 내가 어떻게 진정을 해!”

점점 격양되어 커지는 바이샤의 목소리에 그를 진정시키려 입을 열었던 카얀은 제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는 바이샤는 처음 보았다.

카얀은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세게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피를 보며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지금 쿠드라께서 침착하게 대응하지 않으시면 라누아께 해가 되는 판단을 내리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분노한 때에 가장 차가워야 한다는 전대 쿠드라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흔들림 없는 카얀의 목소리에 바이샤가 두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화를 누르기가 힘들었다.

이제 막 자각한 사랑이 빚어낸 독점욕과 본래 지니고 있던 뛰어난 상상력이 만들어낸 불안이 그의 심상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당신의 뛰어난 전사들을 믿으셔야 합니다.”

“……붙잡은 시카의 죄인들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나?”

“아눌라가 오아시스에 숨어들어 그들을 조종한 방법은 알아냈습니다. 하나 그 이상은 그들도 아는 바가 없는 듯합니다.”

“아눌라가 향한 곳을 모른다?”

“그것은 알려주지 않았다 합니다.”

조금은 누그러진 바이샤의 목소리에 카얀이 답했다.

바이샤의 주먹 쥔 손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져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몸을 상하게 하는 일은 하지 말라 말하고 싶었지만 저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에서 타오르는 분노를 달리 누를 길이 없을 것이다.

카얀은 제 주인이 흘리는 피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 오만한 아눌라가 제 계획을 공유할 리 없지. 하나 그 죄인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선택지는…… 카디마겠지.”

“그리 생각하시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길잡이로 능력이 높다 하나 이 사막 안에 머무르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외부로 향해야겠지.”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장 가까운 라젠은 이미 우리의 땅이 되었고 인접한 다른 나라는 이 사막과 인연이 닿은 일이 없다.”

“그렇게 따지면 카디마는 차이툰과 인접해 있지도, 인연이 닿아 있지도 않습니다.”

“잊었나, 카얀? 그곳엔 얼음 여왕이 있다.”

“……아!”

미라스 엘 갈로딘, 카디마의 여왕. 그녀는 대륙회의 기간 내내 세리아나를 탐냈다.

그리고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눈치 빠른 아눌라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다.

“아눌라는 세리아나를 해치기 위해 평소 경멸하던 라젠과도 손을 잡았다. 카디마의 늙은이와 손잡고 또 다른 수작질을 계획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어.”

“확실히 그쪽의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카얀의 생각 역시 바이샤와 같았으나 여지를 남겨두며 대답했다.

확신은 바이샤의 몫이었고 의심은 그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아시스에서 카디마로 향하려면 어느 길을 따라가야 하지?”

“흰 모래사막을 지나 배를 타는 방법과 성지인 바위산을 둘러 바위 사막을 지나는 방법, 이 두 가지가 가장 빠릅니다.”

“당장 전사들을 보내라.”

“전부 보냅니까?”

“너의 의심이 남는다면 전부가 아니어도 좋다.”

“명을 받습니다.”

만에 하나의 상황을 위해서라도 수색 중인 전사들 전부를 불러들이는 모험을 할 수는 없다.

세리아나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평소보다 더 신중히 움직여야 한다.

카얀은 흰 모래사막과 바위 사막으로 보낼 전사들의 수를 가늠하며 각 조에서 차출할 수 있는 이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해가 지고 있다, 카얀. 나의 인내는 길지 않아.”

“네.”

세리아나가 사라진 지금 바이샤는 오아시스를 떠날 수 없다.

쿠드라가 오아시스를 떠나기 위해선 반드시 라누아의 허락과 축복이 필요했다.

그녀가 이 오아시스에 존재하지 않았을 시절은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라누아의 자리가 채워진 지금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바이샤는 당장이라도 세리아나를 찾아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한 율법을 무시한 채 자신마저 오아시스를 비우게 되면 백성들이 동요할 것이다.

라누아를 잃어버려 혼란에 빠진 백성들에게 또 다른 불안을 안겨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늘 밤 달이 지기 전까지다. 찾아라, 카얀.”

“반드시 찾겠습니다.”

카얀이 그 시간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바이샤는 움직일 것이다.

율법을 어겨 벌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라누아의 축복 없이 오아시스를 떠나 불행을 떠안게 될지라도 제 두 발로 움직여 세리아나를 되찾을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선 카얀이 반드시 아눌라와 세리아나를 찾아내야 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카얀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라누아의 방을 떠나고 그때까지도 엎드려 있던 파라간과 샹크 역시 바이샤의 손짓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따로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두 사람 역시 아눌라와 세리아나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홀로 방에 남게 된 바이샤는 서쪽으로 기울어 사라지는 태양이 만들어낸 저의 기다란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붉은 노을이 라누아의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혼자 두는 게 아니었어.”

후회라는 것은 언제나 뒤늦은 법이다.

바이샤는 제 품 안에서 깨어나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미소 지었던 세리아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 조금 더 같이 시간을 보냈다면 어떠했을까? 뜸 들이지 않고 그냥 그때 제 마음을 고백했었다면 지금 이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울 수 있었을까?

쉽게 떨쳐 냈던 지난 후회들과 다르게 제 심장을 조이며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무거운 마음들이 버거워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쿠드라.”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가슴의 답답함을 풀어보려 애쓰던 바이샤는 등 뒤에서 들려온 작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방 안에 들어와 바이샤의 눈치를 살피던 견습 치료사는 그의 시선에 놀라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지?”

“아로 님께서…… 난동을 부리고 계십니다.”

라누아의 전령으로 알려진 새인 데다 세리아나가 직접 데려온 아로는 차이툰의 어지간한 귀족들보다도 귀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견습 치료사 역시 아로를 함부로 대할 수 없어 이리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치료가 잘못됐나?”

“한두 달 정도 날개는 쓰지 못하겠지만 목숨이 위험한 정도는 아닙니다.”

“그럼 왜?”

“짐작입니다만…… 라누아를 찾으려 하시는 것 같습니다.”

견습 치료사의 말에 긴 한숨을 내쉰 바이샤가 아로를 라누아의 방으로 데려올 것을 명령했다.

건방지지만 충성스러운 라누아의 쿠락이 무슨 생각으로 난동을 부리고 있는지 그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삐-!”

“진정해라. 그리 흥분해 봤자 당장 바뀌는 건 없다.”

견습 치료사의 품에 안긴 채 라누아의 방으로 돌아온 아로는 방 한가운데 서 있는 바이샤를 보며 날개를 퍼덕이려다 실패했다.

아눌라의 채찍이 할퀴고 간 자리에선 여전히 피가 흘러 날개를 감싼 흰 붕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삐삐-!”

“그 날개론 세리아나를 찾으러 갈 수 없어.”

아로를 넘겨받은 바이샤가 눈을 마주치며 말하자 그제야 퍼덕임을 멈춘 새가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찰나의 순간 똑같은 색을 가진 인간과 짐승의 눈동자가 서로의 모습을 비췄다.

“……뭐? 지금 누가…… 아로?”

그 순간 바이샤는 ‘목소리’를 들었다.

귀가 아닌 머리로 전해지는 목소리가 세리아나를 찾을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주 잠시 자신이 미친 건가 고민하던 바이샤는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미친 게 아니고, 정말로 네가 할 수 있다면…… 해라.”

바이샤의 허락이 떨어지고 아로가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누가 손을 덴 것도 아닌데 아로의 날개를 감싸고 있던 붕대가 풀려 바닥에 떨어졌다.

견습 치료사는 조금 전까지도 피를 흘리고 있던 상처가 말끔히 아문 아로의 날개를 보고 놀랐고 동시에 바이샤의 오른쪽 팔뚝에 생겨난 상처에 경악했다.

“쿠, 쿠드라, 상처가!”

마치 ‘채찍’을 얻어맞은 듯 팔뚝에 난 긴 상처에선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서로의 상처를 교환한 것처럼 한쪽은 치유되고 한쪽은 상처 입는 모습에 놀란 견습 치료사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는 사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듐이 비틀거리는 바이샤의 몸을 받아 부축해 주었다.

“쿠드라.”

“별거 아니다.”

듐은 손을 내젓는 바이샤의 모습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를 바라보는 주인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주인의 변화에 놀란 듐이 멈칫한 사이 바이샤가 입을 열었다.

“제법 기특한 재주를 가졌구나, 아로.”

“삐이.”

바이샤의 눈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로의 눈동자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네가 나를 걱정하다니 별일이군. 곧 적응할 테니 문제없다.”

“삐-”

“가라, 가서 세리아나를 찾아.”

바이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로가 날개를 움직여 날아올랐다.

상처 입은 적이 없었다는 듯 날개를 힘차게 퍼덕이며 방 안을 한 바퀴 돈 아로가 빠르게 창문을 넘어 사라졌다.

“쿠드라, 이게 무슨…….”

“헬라임께서 도움을 주려 하신 모양이야.”

어지러움을 느낀 듯 낮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바이샤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듐의 손짓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견습 치료사가 제 스승을 부르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쿠드라, 그 눈은…….”

“나중에 설명하마. 당장은 카얀에게 멈추라고 해. 다른 방법을 찾았다.”

“쿠드라의 듐이 명을 받습니다.”

듐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고 마침내 방 안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직 달이 높게 떠오르지 않아 어두운 방 안에 홀로 남은 바이샤는 제 한쪽 눈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처음 겪는 일인지라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웠다.

그러나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그 증상들은 많이 완화되어 약간의 불편함만을 남겼다.

바이샤는 이 상태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세리아나, 조금만 기다려. ‘우리’가 당신을 찾을 거야.”

어두웠지만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눈에 선명히 비치는 건 이 방 안이 전부가 아니었다.

짐승의 것으로 변한 호박색 눈동자는 태어나 처음 보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밤의 사막’을 선명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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