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96화 (96/110)

#96. 매듭 (2)

성난 얼굴을 한 타람을 떠올렸다가 황급히 그 얼굴을 지운 세리아나가 자라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세리아나는 차분히 자라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슈라는 저를 구한 공을 인정받아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공식적으론?”

바라의 후계자를 구했으니 벌이 아닌 상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라하가 선택한 단어가 이상했다.

공식적으로……라니. 마치 비공식적으로는 처벌을 받았다는 소리처럼 들린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리아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듯 자라하가 이를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시카가 머무는 장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눌라가 휘두르는 채찍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슈라를 발견했습니다.”

여린 살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아눌라의 채찍질을 막지 않았다.

분노한 자라하가 아눌라에게 덤벼들어 채찍을 빼앗을 때까지, 시카의 그 누구도…….

“……그게 무슨…… 어째서?”

“저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아눌라는 자신과 개싸움을 벌였던 자라하가 무사히 돌아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바라의 후계자에게 분풀이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자라하를 구한 슈라였다.

“조금만 머리를 쓸 줄 알았다면 그렇게 공개적으로 채찍질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 속을 다스리지 못하는 어린 시절이었기에 벌일 수 있는 일이었죠.”

세리아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패악질의 농도가 너무 짙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잠깐의 침묵 후 자라하가 고개를 들어 올려 세리아나의 연둣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슈라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 시카가 다시 길을 떠났고 다시 만날 때까지 2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슈라와 친구가 된 것은 그때다.

매를 날려 편지를 주고받았고 부족 간의 모임이라도 생기면 반드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다.

자라하는 수줍은 얼굴로 제 약혼자를 소개하던 슈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것이 마지막 만남인 줄 알았다면…… 그랬다면…….

“슈라가 낙마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이 아눌라의 얼굴입니다.”

슈라의 기마술은 시카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차이툰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 사막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그런 그녀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자라하는 슈라의 등에 채찍질하던 아눌라를 떠올리며 슈라의 죽음에 그녀가 깊게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시카의 족장이 쿠드라와의 만남을 청한 이후 슈라의 죽음에 대한 함구령이 내려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확신했습니다.”

“쿠드라를…… 원망했어?”

“……죄송합니다.”

슈라의 소식을 듣고 빠르게 달려 오아시스에 도착했을 땐 이미 그녀의 장례가 끝난 이후였다.

쿠드라의 허락을 받지 않고 오아시스 안에 발을 들인 죄로 추방당하며 그에 대한 원망을 쌓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바이샤는 사막의 왕이었고 그녀가 섬겨야 하는 신의 자손이었다.

“라누아께 벌을 청합니다.”

죄인의 자세로 엎드린 자라하를 내려다보던 세리아나가 양옆에 서 있던 시녀들을 손짓했다.

평소라면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을 시녀들이 허둥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이내 그녀의 뜻대로 자라하의 몸을 일으키고 뒤로 물러나는 모습에 세리아나는 그 이상한 느낌을 흘려넘기고 말았다.

“아니, 벌을 내리려는 게 아니야. 내가 그대의 상황이었더라도 분명 원망했을 테니까.”

바이샤를 원망할 것 같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할 테지만 그것이 바이샤가 아닌 항명할 수 없는 상급자라고 하면 분명 원망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말은 진심이다.

그저 자신을 달래려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자라하가 다시 세리아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 벌을 청할 필요도, 감사할 필요도 없어.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야.”

“라누아.”

“그럼에도 내게 벌을 청하고 싶고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면…… 아눌라를 잡아 오도록 해.”

세리아나의 말에 자라하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죄인을 잡아 온 것으로 그대의 죄를 사하고 죄인에게 벌을 내려 슈라의 억울함을 푼 것으로 그대의 감사 인사를 받도록 할게.”

“……바라의 자라하가 라누아의 명을 받습니다.”

고개 숙여 답하는 자라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가 웃는 얼굴을 처음 본 세리아나 역시 자신의 입꼬리가 느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였다.

궁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며 고요한 오아시스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놀라 자라하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세리아나의 등 뒤에 서 있던 쥬드가 그녀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섰다.

“쥬드?”

“알아보겠습니다.”

치아린이 없는 지금 세리아나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움직일 수 있는 이는 쥬드 한 사람뿐이었다.

세리아나의 곁을 비우는 것은 걱정되었지만 이곳은 오아시스의 궁이었고 세리아나를 섬기는 시녀들과 바라의 후계자가 있었다.

쥬드는 다른 호위 전사 하나를 호출해 세리아나의 그림자에 숨기고 소란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빠르게 몸을 날렸다.

물론 훈련받은 대로 밖에서 대기 중인 시녀들을 불러들여 세리아나의 곁을 감싸 사람으로 만든 벽을 세우라 명령한 이후였다.

“자라하, 쿠드라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 소란이 일 만한 다른 일이 있었어?”

“아니요, 없었습니다.”

“소란의 원인이라 짐작 가는 일은?”

“그것 역시…….”

오아시스의 궁 안에서 무기가 허락되는 것은 쿠드라와 라누아를 섬기는 그들의 종과 호위기사들뿐이었다.

자라하는 허전한 제 허리춤을 만지작거리며 라누아의 방 입구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어나가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지만 호위 전사 하나가 비는 지금 세리아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녀가 남아 있어야만 했다.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것 같았던 소란이 길어지고 있었다.

세리아나는 자신을 감싸고 선 시녀들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 더는 앉아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림자에 숨은 호위 전사를 불러냈다.

“쥬드에게 연락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오아시스의 궁에서?”

“소속을 알 수 없도록 정체를 숨긴 이들이 궁을 호위 중인 전사들과 교전 중입니다.”

그림자를 통해 전해진 소식에 세리아나는 경악했다.

오아시스의 궁은 사막의 전사들에게 불가침의 공간이었다.

그것을 어긴다면 쿠드라나 라누아의 판결 없이도 즉각 처벌이 가능한 중죄로 다스려져 다시는 헬라임의 품에 안길 수 없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그런 공간을 침범하려는 사막의 백성들이 있다고? 세리아나는 믿을 수 없었다.

“대체 누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놀란 세리아나가 몸을 떤 그 순간, 그녀 바로 곁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이라 믿었던 아로가 시녀 하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아로의 날카로운 부리와 단단한 발톱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살려 달라 비명을 지르는 시녀의 모습에 어떤 깨달음을 얻은 세리아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 어떻게?”

라누아를 섬기며 신관 역할까지 맡은 시녀들은 말을 하지 못한다.

간혹 소리를 낸다 해도 목을 긁는 소리를 낼 뿐이다.

저렇듯 살려 달라 비명을 지를 수 없다는 뜻이었다.

“라누아!”

세리아나보다 조금 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호위 전사가 다급히 세리아나를 제 뒤로 숨기려 했지만 호위 전사의 등에 검이 박힌 것이 먼저였다.

시녀로 위장하고 있었던 자들이 넓은 소매 아래에 숨기고 있던 검을 들어 겁에 질린 시녀들을 하나씩 죽여 나갔다.

“감히!”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던 세리아나였다.

그 보호 밖에 서 있던 자라하가 제게 달려드는 습격자 하나를 처리하고 그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빼앗아 다급히 움직였지만 세리아나의 목에 검이 드리워진 이후였다.

“감히 라누아께 무슨 짓이야!”

“라젠의 사생아 따위가 무슨 라누아야!”

시녀의 옷을 훔쳐 입은 습격자가 소리를 질렀다.

여기서 들려와선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온 탓일까? 검을 든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린 자라하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삐익-!”

“짐승 따위가!”

먼저 덤벼들었던 습격자의 한쪽 눈을 파내는 것에 성공한 아로가 세리아나를 위협하는 이에게 덤벼들었지만 빠르게 날아온 채찍이 아로를 후려쳤다.

강한 충격을 받아 바닥에 추락한 아로의 몸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아로!”

“이 상황에 짐승 새끼를 걱정하다니. 멍청한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아로에게 휘둘렀던 채찍을 회수하며 덮어썼던 시녀의 검은 옷을 벗어 버린 이가 중얼거렸다.

“아눌라! 네가 감히! 당장 라누아를 풀어 줘!”

“자라하, 라젠의 사생아에게 멍청함이 옮았나 보구나.”

“아눌라!”

“닥쳐.”

채찍을 허리띠처럼 허리에 감아 정리한 아눌라가 세리아나에게로 눈을 돌렸다.

세리아나가 제 손에 들어온 이상 자라하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아눌라였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저를 노려보고 있는 세리아나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구나, 라젠의 사생아야.”

“아눌라…… 어떻게?”

“너를 찢어 죽일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를 거야.”

“설마 지금 이 소란의 원인이 그대인가?”

고요한 방 안과 다르게 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세리아나는 비릿하게 웃고 있는 아눌라가 이 소란의 원인이라 확신했다.

“그럼 누가 있어서 이런 대담한 짓을 벌였겠어?”

“그대…… 미쳤구나…….”

“아니, 난 그 어느 때보다도 멀쩡해.”

세리아나의 말에 키득거리며 대답하는 아눌라의 등을 보며 자라하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눌라를 잡는다면 이 소란은 바로 정리될 것이다.

검을 들고서도 아눌라의 눈치를 살피며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는 시카의 전사들이 그 증거였다.

분명 아눌라가 협박해 끌어들인 이들일 것이다.

“자라하, 한 걸음만 더 움직여 봐. 네가 라누아라 섬기는 이 잘난 사생아의 목이 날아갈 테니.”

“네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없을 거라 생각해?”

“…….”

“하하, 그래 목은 못 날리지. 이 계집에겐 다른 쓸모가 있으니까. 대신 손목 하나쯤은 날릴 수 있는데……. 어때? 한번 시험해 볼래?”

뒤돌아 자라하를 바라보는 아눌라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것을 확인한 자라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움직인다면 아눌라는 정말로 세리아나의 손목을 자를 것이다.

지켜야 하는 이가 인질로 잡힌 이상 자라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눌라는 그런 자라하를 비웃으며 다시 몸을 돌려 세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저 반반한 낯짝을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쓸모가 있으니 참아야만 했다.

“쿠드라의 아이를 가졌다지?”

“아, 아눌라 님! 그, 그런 마, 말씀은 없으셨잖습니까!”

세리아나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던 시카의 전사 하나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라누아에게 검을 겨눈 것만으로도 이미 목이 달아날 중죄인데 다음 대의 왕이나 여왕이 될 아이를 품은 라누아라니…… 죽어서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야. 이제 와 도망이라도 치려고?”

“하, 하지만.”

“어차피 너희가 살길은 나, 시카의 아눌라뿐이야! 그러니 제대로 해!”

아눌라의 일갈에 몸을 떤 시카의 전사들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처음 이 계획에 끌려왔을 때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아눌라가 무사히 도망갈 수 있도록 그들이 길을 열어야 했다.

“그림자가 돌아오기 전에 자리를 뜬다. 너희는 책임지고 바라의 후계자와 그림자들을 막아.”

“네!”

“네!”

“네!”

세리아나의 곁을 지키던 그림자 하나가 죽었으니 다른 그림자들이 몰려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세리아나의 목에 겨눠진 검을 넘겨받은 아눌라가 세리아나의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아 거칠게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이거 놔!”

세리아나가 저항했지만 가지고 있는 힘의 크기가 달랐다.

아눌라는 세리아나의 반항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커다란 창을 넘어 오아시스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자라하가 그 뒤를 쫓으려 했지만 자리에 남은 시카의 전사 셋이 그녀 앞을 막았다.

“라누아시다! 너희가 이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눌라 님의 말씀처럼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다! 우리가 살려면 아눌라 님께서 성공하셔야 해!”

“시카 이 머저리들이!”

조급해진 자라하의 시선이 커다란 창 너머로 향했다.

아눌라와 세리아나의 모습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사라지기 전에 움직여 그 뒤를 쫓아야 했지만 시카 전사들의 저항이 너무 강했다.

“아눌라!”

자라하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자라하는 이를 악물며 시카의 전사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삼 대 일의 전투였지만 한 부족의 후계자답게 자라하의 눈동자엔 가당치 않은 일을 벌인 자들에 대한 분노만이 비칠 뿐 그 어떤 두려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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