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매듭 (1)
긴 낮잠에서 깨어난 세리아나가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은 바이샤의 얼굴이었다.
언제부터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인지 눈을 뜨는 순간 마주친 그의 시선이 평소보다 짙어 잠에서 단번에 깨어날 수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잠에서 깨어나는 건 익숙한 일이었지만 오늘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바이샤는 어쩐지 설레 보이기도 하고 기뻐하는 듯도 했다.
더 이상한 것은 이후 그의 태도였다.
잠에서 깬 그녀의 뺨을 쓰다듬거나 입을 맞추는 것은 평소와 같았으나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 멈추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것은 이제껏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바이샤가 망설이는 건 처음 봤어.”
한참을 망설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바이샤는 저녁에 돌아와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니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떠났다.
망설이는 것도 모자라 일을 미루고 떠나는 바이샤라니……. 오아시스에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그의 모습에 근심이 쌓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응? 아로?”
“삐-”
오랜만에 만난 것이 기쁜지 제 품에 안겨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는 아로의 둥근 머리를 쓰다듬으며 세리아나는 소파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는데…….”
해가 서쪽으로 조금씩 기울고는 있지만 밤이 찾아오려면 아직은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승전과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알리는 선포의식은 내일로 예정되어 있고 야안과의 만남도 내일 이후로 미뤄져 있는 상태였다.
잠이라도 잘 수 있으면 좋으련만 최근 몸을 가누기 어려우리만치 몰려오던 수마가 갑자기 떠나간 듯 이상하리만치 정신이 맑아 그것도 불가능했다.
“치아린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치아린의 빈자리가 새삼스럽게 크게 느껴졌다.
세리아나는 졸음을 억지로 참아내는 듯 눈을 끔뻑이는 아로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으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너도 치아린이 그립지?”
“삣-”
“그래 우리 아로도 치아린이 그립구나.”
치아린이 곁에 있었다면 저 여우 같은 쿠락은 라누아를 홀로 차지할 시간이 늘어나 오히려 기뻐하고 있다며 성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정을 알 리 없는 세리아나는 제 앞에서만 순하고 둔한 양이 되는 아로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태어날 거야…….”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듯 아로가 세리아나와 눈을 맞추었다.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눈동자 색과 닮은 아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아이의 곁을 얼마나 지켜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래서 말인데 아로…… 네가 지켜줄래?”
“삐이.”
세리아나는 제 죽음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었다.
거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이제껏 거울이 비추었던 장면들은 멀거나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는 다르다.
그녀는 거울이 비추지 않은 미래에 자신의 아이가 반드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세리아나는 아직은 납작한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바이샤의 피를 이었으니 분명히 건강하게 태어날 거야. 이 아이는 바이샤의 첫 번째 자식이니까…… 새로운 라누아도 이 아이를 어쩌진 못해.”
사막을 건너며 세리아나는 그렇게 상황을 정리했다.
바이샤는 자신을 존중하고 배려하겠다고 약속했다.
거기다 이 아이는 그의 첫 번째 자식이 될 터였다.
사랑은 아닐지라도 그 정도라면 바이샤가, 그리고 이 차이툰이라는 모래 왕국이 아이를 지킬 이유는 충분했다.
세리아나는 자신이 바이샤에게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미래를 계획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랬다.
그래서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와중에도 저를 잃어 슬퍼할 바이샤보다도 거울 너머, 새로운 사랑을 만나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를 먼저 떠올릴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천박한 엘라이어의 딸로 태어나 피오르 백작가의 영애로 자라며 바닥까지 치달은 자존감을 끌어안고 그것이 당연하다 여기며 자라왔다.
그래서 사랑받을 욕심조차 내지 못했고 누군가에게 마음 한 조각 쉽게 내어줄 수 없었다.
거울 너머, 바이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마음조차 알지 못하고 살다 죽었을 것이다.
“바이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우리의 아이도 행복하길 바라.”
차이툰으로 와 많은 것이 변했지만 고작 몇 개월이다.
그 정도의 시간으론 한 사람이 태어나 지금까지 쌓아온 가치관을 완벽히 뒤집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세리아나는 여전히 이기적인 욕심을 부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삐이.”
“아로?”
그런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일까? 아로가 세리아나의 품을 벗어나 자신의 새장으로 돌아갔다.
세리아나는 깃에 날개를 묻고 저에게서 시선을 돌린 아로를 보며 곤란하다는 듯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라누아.”
“무슨 일이야, 쥬드?”
“라누아를 뵙고 싶다 청하는 이가 있습니다.”
아로를 어찌 달래야 할까 고민하던 세리아나는 치아린을 대신해 그녀의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쥬드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평소 그림자에 숨어 존재감을 숨기고 지내 온 쥬드가 밝은 빛 아래 서 있는 것이 조금은 어색했다.
“누가?”
“바라의 자라하입니다.”
“자라하가?”
이번 전쟁에서 각 부족의 족장들이 여러모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이며 부족의 힘을 과시한 것과 다르게 후계자들은 오아시스에 머물러야만 했다.
이전 대륙회의 때 각 부족의 족장들이 오아시스에 남고 그 후계자들만 참여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더불어 전쟁 중 족장과 그 후계가 동시에 사망해 부족 지도자의 자리에 공백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세리아나는 사막을 떠나기 전 라누아의 홀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자라하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제게 무슨 말을 할지도 궁금했지만 그간 종이로만 전해 들었던 아눌라의 추적 상황에 대한 성명 또한 듣고 싶었던 것이다.
세리아나의 허락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옷을 입은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자라하가 그녀의 방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아시스를 떠났다 다시 돌아오는 그 시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살이 빠져 한층 더 날카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자라하가 고개를 숙였다.
“바라의 자라하가 라누아께 인사 올립니다.”
“오랜만이야.”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낮은 소파에 앉은 세리아나가 손을 살짝 움직여 허락하자 자라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도 좋다는 세리아나의 손짓에 살짝 고개를 젓고는 섰던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자라하?”
“감사드립니다, 라누아.”
“내가 그대에게 감사 인사를 받을 일이 있나?”
“……슈라의 일입니다.”
세리아나는 고개를 숙인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질 않는 자라하를 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슈라의 일로 아눌라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치아린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파라간을 통해 슈라의 죽음 뒤에 아눌라의 계략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었을 뿐 슈라와 자라하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그대에겐 물어보질 못했군. 괜찮다면 슈라가 그대에게 무슨 의미인지 말해줄 수 있을까?”
“슈라는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생명의 은인?”
“네, 저는 슈라에게 생명을 빚졌습니다.”
십여 년 전, 바이샤도 아직 성년이 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시카는 사막을 유랑하는 부족이었고 가끔 떠도는 길 위해서 만난 부족들과 물물거래를 통해 물자를 조달하고 있었다.
시카는 사막의 끝에서 끝을 떠도는 부족이었기에 바라와도 종종 그런 식으로 거래를 하곤 했었다.
자라하가 슈라를 만난 것도 바로 그 시기였다.
부족의 후계자끼리 친분을 나누라 마련한 자리에서 자라하는 아눌라를 만났다.
태생이 서로 맞지 않았던 것인지 그 첫만남에서 자라하는 아눌라가 저와는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 때문이었는지 기억이 선명하진 않지만 제법 심하게 다툼을 벌였던 것 같다.
아직 어렸던지라 서로의 머리를 움켜쥐고 팔뚝을 물어뜯는 개싸움이었다.
사나운 눈길로 저를 향해 욕설을 내뱉는 아눌라를 무시하고 자리를 떠난 자라하는 바라의 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슈라를 발견했다.
말과 염소는 바라의 귀중한 재산이었기에 평소라면 다른 부족의 아이를 무시하거나 가벼운 경고로 쫓아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전 아눌라와 거칠게 싸우고 분이 풀리지 않았던 탓에 슈라를 향해 거친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크고 맑은 눈을 끔뻑이는 슈라의 모습에 제 실수를 곧장 알아차렸지만 쉽게 사과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자신의 행동에 수치심을 느낀 자라하는 충동적으로 말의 갈기를 잡고 그 등허리에 올라타 말의 옆구리를 세게 찼다.
그저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에 뒤를 생각하지 않고 움직인 것이다.
놀란 말이 낮은 나무 담장을 넘어 달리기 시작한 순간, 자라하는 자신의 기마술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얌전하게 길들인 말로 기마술을 갓 배우던 시기였었다.
그런 그녀가 올라탄 말이 하필이면 가장 사나운 말이었던 것도 문제였다.
“갈기를 붙잡은 손에 힘이 빠질 때까지 한참을 달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등에 통증이 느껴지더군요.”
손에 힘이 빠짐과 동시에 낙마를 한 것이다.
부드러운 모랫바닥이 아니었다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정말 하늘이 도운 일이었다.
하지만 낙마의 충격이 아예 없을 수는 없기에 아주 잠깐 정신을 잃었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저를 태우고 달렸던 말은 사라진 후였고 하늘은 어두워진 상태였다.
“답지 않은 짓을 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늘길을 보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자라하는 헬라임의 이름과 어미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외치며 낙마한 그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길을 찾는 법을 모른다면 차라리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한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 덕분이었다.
“무서웠습니다. 사막의 밤은 짐승들의 시간이었으니까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장난감 같은 단검 하나를 손에 쥐고 기도했었습니다. 누구든 저를 찾아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럼 그때…….”
“네, 그때 슈라가 나타났습니다.”
제 앞에 아눌라가 나타나 거만한 말을 내뱉어도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느꼈던 순간이었다.
“아직도 그 순간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습니다.”
유난히 낮게 뜬 달을 등지고 말 한 마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 말의 등허리에 앉아 환히 웃고 있던 슈라의 얼굴 위에 진 달그림자가 감격스러웠었다.
“홀로 돌아온 말을 보고 놀라 그 말을 잡아타고 저를 찾아왔다고 웃더군요.”
슈라는 어린 시절부터 기마술에 능했고 시카의 아이답게 하늘길을 읽는 데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더불어 사냥에도 큰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추적술에도 능숙했었다.
“여러모로 뛰어난 사람이었구나, 슈라는.”
“네. 그래서 더욱 아눌라의 미움을 샀었습니다.”
고작 아눌라 자신을 앞질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슈라를 죽였다는 파라간의 말에 조금은 의아함을 가지고 있던 세리아나였다.
그러나 지금 그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한순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여 온 감정이 터져 일어난 일이었다.
“슈라는 같은 부족도 아닌, 자신을 향해 폭언을 내뱉었던 저를 찾기 위해 망설이지도 않고 움직였습니다.”
자라하를 구하기 위함이었다지만 다른 부족의 재산인 말을 마음대로 몰아 해가 진 사막으로 뛰어들었다.
작게는 타 부족의 재산을 마음대로 취한 것이고 크게는 밤의 사막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슈라는 자라하를 위해 움직였다.
고작 한 번 얼굴을 스친 인연이었다.
그마저도 그다지 좋은 인상은 주지 못했던 자신을 위해 계산 없이 움직인 슈라는 웃는 얼굴로 저를 향해 손을 내밀었었다.
“슈라와 함께 말을 타고 돌아가던 길은 죽는 순간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세리아나 역시 사막에서 조난당해 죽을 위기를 넘긴 경험이 있었고 밤의 사막이 어떠한지 야안에게 배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라하가 말한 생명의 은인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무사히 돌아간 이후에 많이 혼났겠어.”
“네. 밤의 사막이 아니라 어머니께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농담이라 여기고 싶은데 자라하의 진지한 목소리가 그것이 농담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세리아나는 타람도 히아신과 비슷한 구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소리 내어 말했다간 언젠가 그 말을 전해 듣게 될 타람이 엄청나게 화를 낼 것 같아 차마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