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94화 (94/110)

#94. 느리게 닿는 말 (6)

바이샤는 어디가 고장이 난 사람처럼 멍하니 카얀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얀은 그의 주인이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처럼 친절히 바이샤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말을 다시 한번 들려주었다.

“쿠드라께서 라누아를 보고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셨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럴……리가?”

“오히려 제가 여쭙고 싶습니다. 왜 아니라 생각하십니까?”

카얀의 질문에 바이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는 듯 턱을 긁으며 생각에 잠겼던 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세상이…… 사라진다고 하던데?”

“……네?”

“주변의 모든 풍경이 사라지고 그 사람과 자기 자신만 남는다고 하더군.”

치아린이구나. 카얀은 바이샤의 말을 듣자마자 그 말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아차렸다.

자신에게 종종 해왔던 말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난 아직 세상이 사라진 경험은 해본 일이 없다.”

“언제부터 치아린의 말을 그리 귀담아들으셨습니까?”

“듣고 싶지 않아도 그만큼 곁에서 떠들면 저절로 듣게 된다.”

카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로지 한 사람, 자신의 아내만을 사랑하겠다 신 앞에 맹세한 그의 주인은 이성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배제했다.

일부일처의 사회였지만 결혼 전까지는 어느 정도 가벼운 만남을 허락하는 차이툰이었다.

그 덕분에 많은 여인이 라누아의 자리를 노리거나 혹은 그저 하룻밤의 황홀한 꿈을 좇아 그를 향해 그야말로 온몸을 던졌지만 바이샤는 단호하게 그들을 쳐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어떤 스캔들 하나 없이 제 옆자리를 깨끗하게 비워뒀었다.

지금까진 그저 그 의지가 대단하다 여겼을 뿐 그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카얀은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너의 미래의 짝이 했던 말이니 어서 제대로 설명이나 해보라 말없이 재촉하는 바이샤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전부 다릅니다. 치아린의 경우가 그러하다면 저는 치아린을 볼 때 그 향기에 질식할 것처럼 숨이 가빠 오고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니까요.”

“사람마다 다르다?”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합니다.”

“……아까와는 말이 다르잖아.”

조금 더 제대로 된 설명을 원한다.

바이샤의 호박색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카얀은 잠시 이것을 어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사랑이라는 것의 모양은 제각기 전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하나의 단어로 정리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제가 느끼는 바를 진실하게 설명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간단히 생각을 정리한 카얀이 말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무척이나 특별하고 별거 없는 감정입니다.”

“특별한데 별거 아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 사람의 웃는 얼굴이 좋고, 우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화를 내면 온종일 그 화를 풀어줄 생각에 안절부절…… 그러다가도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불러주면 모든 근심이 사라지죠.”

“…….”

“보듬어 지켜 주고 싶다가도 그 품에 안겨 보호받고 싶고, 오로지 내 곁에 머무르게 묶어두고 싶다가도 그이가 가슴에 모든 것을 품을 수 있게 풀어주고 싶은 겁니다. 무척이나 변덕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사실 절대적인 마음이라 감히 거부할 생각조차 들지 않습니다.”

“……그건…….”

“다른 사람의 세상을 제 가슴에 품게 되고 그이가 제 세상을 품어주는…… 무척이나 특별하지만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하고 별거 아닌 그것이 제가 아는 사랑입니다.”

카얀의 열렬한 고백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바이샤가 입을 다물었다.

특별하지만 별거 아닌 것, 변덕스럽지만 절대적인 것. 뜬구름을 잡는 말처럼 들렸지만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는 말이었다.

“제가 주제넘게 쿠드라께 말씀 올렸지만……. 사실 그냥 저절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절로?”

“네, 저절로 알게 되십니다.”

바이샤는 카얀의 말을 되새기며 세리아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세리아나, 나의 라누아, 나의…….”

카얀의 말이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흐릿한 형상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멀리 달아나는 느낌에 바이샤의 잘생긴 미간이 구겨졌다.

“라누아를 뵈어야겠다.”

아내의 얼굴을 보면 명확한 답을 낼 수 있으리라. 바이샤는 자리에서 곧장 일어나 자신의 방 반대편 끝에 있는 라누아의 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처음의 느릿했던 걸음이 점점 빨라져 갔다.

뒤따르는 카얀은 그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정작 바이샤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 보였다.

빠르게 움직이며 긴 복도와 중앙 정원을 지나친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라누아의 방으로 이어진 입구 앞이었다.

당장이라도 두꺼운 덮개를 걷어내고 그 안으로 들어갈 듯 움직이던 바이샤가 망설이고 있었다.

덮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끝을 움찔거리며 멈추기를 수차례, 뒤에 선 카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라누아께선 무엇을 하고 계시지?”

한참 동안 망설이던 바이샤가 문 앞을 지키고 선 시녀를 향해 질문했다.

말 못하는 시녀가 손을 조금 움직여 세리아나가 잠들어 있다 답하자 바이샤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작은 일에도 쉽게 피로를 느끼게 된 그의 아내에게 휴식을 취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 들었으나 당장이라도 그 얼굴을 보아야 한다는 충동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바이샤는 이내 결심했는지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문을 가린 덮개를 걷어 라누아의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한 보물을 훔치려는 도둑보다도 조용한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선 그는 망설이지 않고 천천히 세리아나가 잠들어 있을 침대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수없이 들락거린 장소였지만 어쩐지 입안이 바짝 말라 왔다.

고요한 방 안, 쿵쾅거리며 요란하게 뛰는 제 심장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였다.

이제 와 새삼스럽게 침실로 향하는 그의 걸음에 떨림이 묻어났다.

세리아나는 잠들어 있었다.

여정이 고단했든지 아니면 몸 안에 깃든 작은 생명이 벌써부터 제 어미를 피곤케 하는 것인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잠든 그녀를 발견한 바이샤가 잠시 멈칫했다.

이대로 돌아 나갈까? 그러나 그 생각은 누운 자세가 불편한 듯 얼굴을 살짝 찌푸리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금방 사라졌다.

바이샤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세리아나에게로 다가갔다.

침대에 걸터앉은 상태 그대로 옆으로 몸을 뉜 것인지 침대 밖으로 나와 있는 그녀의 무릎 뒤에 손을 넣고 어깨를 감싸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제 의지가 아닌 움직임에 가볍게 몸을 뒤트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바이샤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이내 그의 품 안에서 익숙하게 자세를 잡아 편안한 숨을 내쉬는 모습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바이샤는 세리아나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여 침대 위에 그녀를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불편하지 않도록 누운 자리를 살피고 옷자락을 정리하는 손길이 투박한 손과 어울리지 않게 섬세했다.

평온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던 그 순간, 세리아나의 숨결이 바이샤의 손끝에 닿았다.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간 호흡이었고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바이샤는 불에 덴 듯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손을 거두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버렸다.

그는 세리아나의 숨결이 닿았던 손끝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저 잠든 이의 느린 호흡이 손끝을 스쳤을 뿐이다.

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넘겼을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숨결이 이리도 뜨거운 것일까? 불에 덴 듯 저도 모르게 오그라들었던 손끝을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들어 세리아나를 바라보았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세리아나?”

시간이 멈췄다.

아니 세상이 정지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사물이 제 존재를 잃어 흐릿해지는 와중에 세리아나만이 선명했다.

그녀의 느린 숨소리가 제 심장 뛰는 소리보다 더 크게 고막을 때렸고 그녀의 몸에서 나는 라일꽃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워 숨을 쉬기가 버거워졌다.

“아…….”

빠듯하게 부풀어 오른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느낀 그 순간, 바이샤는 깨달았다.

저절로 알게 된다는 카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구나.

이리도 선명한 마음을 어떻게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바이샤는 수없이 입을 맞추었던 세리아나의 둥근 이마를, 긴 속눈썹을, 오뚝한 코를, 붉은 입술을 눈으로 천천히 훑으며 생각했다.

수많은 낮과 밤을 함께 보내 왔음에도 미련한 저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고.

영원히 멈춰 있을 것만 같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작은 모래시계 하나가 비워질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흐른 이후였다.

아이를 보호하듯 몸을 옆으로 틀어 두 손으로 배를 감싸고 몸을 웅크리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바이샤의 얼굴이 서서히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뒤늦은 깨달음이 주는 선물이었다.

세리아나의 숨결이 닿았던 손끝에서 시작된 열기가 바이샤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또 한 번 뒷걸음질 쳤다.

태어나 지금까지 뒤로 물러선다는 선택지는 단 한 번도 선택해 본 적 없는 남자가 두 번씩이나 물러난 것이다.

뒤늦은 깨달음이 가져온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한 가지 말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이 일시에 들고 일어나며 찾아온 현기증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세리아나의 숨소리에 가려 들리지 않았던 제 심장 뛰는 소리가 요란했다.

“……바이샤…….”

시끄럽게 요동치던 심장이 뚝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무슨 꿈을 꾸는 것인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제 이름을 불러오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몸이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혹여 아내의 꿈속에서 자신이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것일까? 바이샤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 이내 찌푸린 얼굴을 펴고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또 한 번 제 이름을 불러오는 아내의 모습에 바이샤는 비로소 안심하며 숨을 크게 내쉴 수 있게 되었다.

“꼴사납군.”

그래, 꼴사납다.

세리아나가 깨어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하하, 도망이라니…….”

어떤 용맹한 전사나 사나운 짐승을 상대할 때도 물러서 본 적이 없는 그가 아내에게서 등을 돌려 달아나는 제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고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으나 동시에 이상하게 즐거웠다.

또 이상하게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손으로 가린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바이샤가 몸을 들썩였다.

제 기쁨이 커도 평온히 잠든 세리아나의 휴식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우선한 것이다.

제 몸에 맞지 않는다 여겼던 배려라는 이름의 옷을 자연스레 두른 꼴이 되었다.

그것이 우습고 유쾌했다.

아아, 이런 것이구나. 이처럼 별거 아니고 특별한 것이 사랑이로구나. 마치 이길 수 없는 강대한 적을 앞에 둔 것처럼 몸이 떨렸다.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희열이었다.

감당하기 어려우리만치 거대한 기쁨이 그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한참 동안 몸을 떨며 웃음을 삼켜내던 바이샤가 한쪽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붉게 달아올랐던 피부가 본래의 색을 되찾았고 안색 또한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 그의 눈동자는 달랐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질척하게 얽혀 짙은 색으로 가라앉은 호박색 눈동자는 세리아나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제 것이었다.

깨닫기도 전에 제 손에 넣은 사람이었다.

제 아이를 품은 자신의 단 하나뿐인 아내였고 제가 무릎을 꿇고 올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여왕이었다.

“세리아나.”

바이샤는 천천히 움직여 누워 있는 세리아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누운 자리 옆에 한쪽 무릎을 올리고 보기 좋은 색으로 물든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었다.

손길이 닿았다는 흔적조차 남길 수 없는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의 짙게 가라앉은 호박색 눈동자는 손길이 닿았던 자리에 제 흔적을 남길 듯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확실히 운이 좋은 편이야.”

갈망하기도 전에 제 손안에 떨어진 사랑이다.

세리아나를 얻은 순간부터 놓아줄 생각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지만 앞으로도 그런 생각을 떠올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가 간절히 바라더라도 무리다.

이 마음을, 제 사랑의 형태를 알아 버렸다.

알아 버린 것을 모르는 것으로 돌리는 방법은 신조차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나의 라누아, 나의 세리아나. 내 품 안에 있어.”

그녀의 옆자리에 누운 바이샤가 팔을 뻗어 세리아나를 끌어당기자 당연한 듯 품을 파고든다.

단순히 만족했다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 찌릿하게 그의 몸을 관통했다.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몸을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한편, 바이샤의 뒤를 따라 라누아의 방 앞에 선 카얀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각하기 전에도 세리아나에게 유달리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 왔던 바이샤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제 제 마음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만약 이런 때에 세리아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녀의 안전에 티끌만 한 문제라도 발생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카얀은 두려움에 차마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경비에 더 신경을 쓰라고 일러둬야겠군.”

오아시스 궁 안에서 그들의 여왕에게 문제가 생길 리는 없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카얀은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며 라젠에 홀로 남아 있는 치아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쩐지 그녀가 간절히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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