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93화 (93/110)

#93. 느리게 닿는 말 (5)

바이샤의 품에 안겨 눈을 감은 세리아나는 귓가에 닿는 그의 심장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울 너머의 잔상을 떨쳐낸 것은 아니다.

제 죽음을 예상하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불안했고 불길했다.

그러나 이렇게 바이샤의 품에 안겨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모든 불안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아주 잠시 찾아오는 안식일 뿐이다.

언제까지 바이샤의 품속으로 도피할 순 없었다.

‘준비해야 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까지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

자신에게 찾아온 작고 여린 생명을 지켜야 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아이는 살아서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날 수 있게.

‘생각하자, 생각해야 해.’

치아린이 곁에 있었더라도 함께 나눌 수 없는 고민이었다.

세리아나는 필사적으로 제가 아는 것 중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들을 구분해 내고 그중에서도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들만을 따로 분리해 머릿속에서 차근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바이샤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세리아나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언가 깊은 생각을 할 때면 종종 보이곤 하는 그녀의 버릇을 확인하며 세리아나의 생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숨 쉬는 것마저 조심스러워졌다.

마차 안,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마차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휴식을 취해 가며 라젠으로 향할 때보다도 한참은 느리게 움직인 마차가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했다.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쿠드라와 라누아, 그리고 사막의 전사들 머리 위로 하얀 꽃비가 쏟아졌다.

큰 창을 넘어 무릎 위로 떨어진 하얀 꽃송이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세리아나가 환호하는 백성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바이샤는 일행의 가장 앞에서 말을 몰며 이 꽃비를 맞고 있을 것이다.

“라누아!”

“쿠드라!”

흥분이 섞인 여러 목소리가 섞여 울려 퍼졌다.

세리아나는 승리를 기뻐하는 그들이 더욱 기뻐할 수 있도록 창 너머 저와 시선을 마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치아린이 곁에 있었다면 팔 아프실 테니 그만하시라 말렸을 것이다.

오아시스로 향할 때보다 더욱 느리게 움직여 간신히 궁에 도착한 세리아나는 드디어 검은 베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라누아의 시녀 하나가 그것을 받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것을 무쇠로 만든 화로에 던져 불태웠다.

그 모습에 전사들이 환호했고 완벽한 승리를 축하하며 바이샤가 모든 전사에게 휴식을 허락했다.

전쟁의 마지막 의식이었다.

말 못 하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자신의 방으로 향한 세리아나도 드디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시녀들이 목욕 준비를 하는 동안 침대 위에 모로 누워 긴 숨을 내쉬자 또다시 잠이 몰려왔다.

“야안에겐 내가 갔어야 했는데…….”

치아린의 부탁으로 야안의 거처로 향했을 바이샤를 떠올리며 세리아나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도 피곤할 텐데 괜히 자신 때문에 번거로운 일을 맡은 것 같아 미안해졌다.

하지만 몸은 정직한 법인지 푹신한 침대 속에 파묻혀 눈을 깜빡이는 그녀는 이미 반쯤 잠이 든 상태였다.

“잠들면…… 안 되는데…….”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애쓰던 세리아나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느리게 숨을 뱉었다 들이쉬며 색색 소리를 내는 그녀의 상태를 알아차린 시녀들이 곧 목욕 준비를 멈추고 얇은 모포 하나를 가져와 그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늘 자신들에게 자비롭고 다정한 주인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시녀들은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갔다.

잠에 빠진 세리아나를 지키는 것은 그림자 속에 숨은 호위 전사들의 몫이었다.

그 시각, 주인이 행복한 꿈을 꾸길 기도하며 라누아의 방에서 빠져나와 다른 할 일을 찾던 시녀 하나가 사라졌다.

비명이라도 질러 다른 이를 부를 수 있었다면 그런 불행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을 하지 못하는 시녀에겐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말 못 하는 시녀 하나가 사라진 자리에 그녀의 옷을 입은 다른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시녀들과 마찬가지로 검은색 옷을 입고 검은 베일로 얼굴의 반을 가린 그녀의 두 눈동자가 헤이즐넛 색으로 붉게 빛나고 있었다.

* * *

야안에게 세리아나의 임신 사실을 알리고 내일 그 사실을 차이툰의 백성들에게 선포하겠다고 정한 바이샤가 제 방으로 돌아왔다.

길지 않은 시간을 비워뒀지만 바로 어제 사용했던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된 방을 돌아보니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긴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그건 나중에.”

“그럼 무엇을 먼저……?”

“내 라누아께서 왜 그러시는 걸까?”

“네?”

“생각을 좀 해봐.”

라누아의 불안을 왜 제게 묻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가 바이샤를 바라보았다.

바이샤가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지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지만 다른 이의 마음과 관련된 질문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그는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그러나 바이샤는 아주 뻔뻔한 얼굴로 낮은 소파에 앉아 카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암만 머리를 굴려봐도 생전 해본 적이 없었던 고민인지라 카얀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다.

물론 어서 답을 내놓으라는 다소 뻔뻔한 모습이었기에 그가 고민하기는 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는 카얀 말고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라누아께서 왜 불안해하고 계시는지 묻고 싶으신 겁니까?”

“그래.”

이번에도 훌륭하게 바이샤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지 알아차린 카얀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제게 이것을 물을 때까지 제법 마음고생을 했을 주인을 위해서라도 신중히 생각해봐야 할 문제였다.

“임신 초기에는 산모의 감정 기복이 격해진다 했으니…… 라누아께서도 그런 게 아닐까요?”

“아니, 그것과는 다르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직후 몸을 떨던 세리아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그런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거기다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순식간에 두려움으로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더 알 수 없는 문제였다.

거기다 이동하는 내도록 무언가를 열심히 고민하던 그녀의 모습은 바이샤로 하여금 그녀에게 다른 문제가 닥쳤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모친의 죽음은 슬퍼 눈물지으셨고 복수는 무감하셨다.”

검은 사막에 라젠의 왕을 버리며 정말 이것으로 괜찮으냐 물었을 때 세리아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미움은 애정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라젠의 왕에겐 사랑을 준 적도 받은 적도 없으니 어찌 미움이 생겨 더한 처벌을 요구하겠느냐고.

검은 사막 끝에 다다르면 살 수 있다는 헛된 희망으로 수갑과 족쇄를 찬 채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세리아나는 그렇게 아무런 미련도 없이 몸을 돌렸었다.

“두 감정은 사람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진 않아.”

“라누아께서 불안해하실 만한 것이라…….”

치아린이 있었다면 좀 더 쉽게 답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저 멀리 라젠 땅에서 제 주인을 그리워하며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기 위해 열성적으로 일하고 있을 미래의 아내를 떠올리며 카얀이 고개를 저었다.

“첫 아이라 불안해지셨을 수도 있고…….”

“있고?”

“음…… 죄송합니다, 쿠드라. 새 생명에 관한 부분에선 제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문제에서 그가 아는 것은 확실한 피임 방법과 약물을 이용한 영구적인 임신 단절의 방법뿐이었다.

주인의 일에 관해선 모르는 일이 없어야 하는 종이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다만 아이가 생긴 것으로 인해 무언가 불안해지셨다면…… 아이 자체가 문제이던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 문제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카얀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는지 고개를 끄덕인 바이샤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카얀의 말처럼 단순히 첫 아이라서 불안해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임신’이 혹은 ‘아이’가 두려움의 원인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남은 것은 아이와 관련된 것. 그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바이샤가 약간은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마…… 나인가?”

“네?”

“아이와 가장 밀접하게 관계된 것이 나 말고 또 있나?”

“…….”

카얀은 일단 말을 아꼈다.

어린 시절부터 바이샤 곁에서 단련해 온 촉이 말하고 있다.

여기선 긍정도 부정도 해선 안 된다고. 이것을 무시했다간 좋은 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어린 시절 충분히 경험한 그는 바이샤 스스로가 답을 내릴 때까지 침묵하기로 했다.

“내가 라누아께 무엇을 잘못했지?”

한쪽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바이샤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간혹…… 아니, 자주 침대 위에서 세리아나를 울리거나 곤란하게 만든 적은 있다.

그런데 그게 세리아나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떠는 이유가 되나? 자신 있게 말하건대 세리아나도 싫어하진 않았다!

존중했고 배려했다.

오아시스에서 했던 맹세 그대로였다.

그때 그녀는 분명 기쁘다고 말해주었다.

그때의 그 미소가 거짓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럼 대체 뭐지?

“……설마?”

“뭔가 떠오르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라누아를 아직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불안해지셨나?”

“……네?”

결혼식을 올리기 전 걱정하는 카얀에게 그리 말한 적이 있다.

순서가 뒤바뀐 것뿐이라고. 사랑하려 노력하면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을 거라 단언했었다.

그런데 아직 그것을 모르겠다.

과연 자신은 세리아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되어…… 불안해지신 건가?”

“저기 쿠드라? 아까부터 하시는 말씀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카얀, 말해봐.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지?”

헬라임이시여…….

카얀은 진지한 얼굴로 멍청한 질문을 하는 바이샤를 바라보며 신의 이름을 불렀다.

대체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면 저런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일까? 세리아나의 불안의 원인을 고민해 보겠다더니 사랑? 아니, 대체 왜? 거기다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카얀.”

“잠시만, 잠시만 제게 생각할 시간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 말을 들어주겠다는 듯 입을 다무는 바이샤를 보며 카얀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다시 신의 이름을 불렀다.

부디 자신의 충심을 이런 식으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대여섯 번 신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하게 기도를 올린 카얀이 바이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오류부터 정정하겠습니다.”

“뭐?”

“쿠드라께서 라누아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니요? 누가 봐도 사랑을 하고 계십니다.”

“무슨 말이지? 내가?”

“……그럼 쿠드라께서 라누아께 보이는 모습을 무엇이라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나는 내 라누아를 아내로서 존중하고 배려하고 있을 뿐이야.”

헬라임이시여, 당신의 마지막 자식이 또다시 멍청한 소리를 합니다.

카얀은 진심으로 눈앞에 앉은 사내를 한 대 치고 싶어졌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동무이고 자신의 주인이자 이 사막의 왕이 아니었다면 충분히 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는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충동을 애써 누르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대체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몰라.”

“……네?”

“모른다. 배운 적도 없고 해본 적도 없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조금 전부터 계속 당신을 찾아 죄송합니다, 헬라임이시여. 미천한 종이 간청하건대 당신 마지막 자식의 뒤통수를 한 대만 때려도 괜찮겠습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으로부터 답신은 없었다.

막냇자식을 아끼든가 아니면 막냇자식의 멍청함에 답할 의욕마저 잊어버렸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카얀은 내심 후자가 답일 것이라 여기며 한쪽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지. 대체 사랑은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는 거지? 사랑하면 뭐가 달라 보이나?”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릅니다.”

“보편적으로 겪는 증상을 말해봐.”

“……상대가 빛나 보인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어디에서든 그 사람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또 군중 속에서도 그 사람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치아린이 있었다면 이런 질문에 그리 진지하게 답해주지 말라 화를 냈을 만한 모습이었다.

“이상하군.”

“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카얀이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팔짱을 낀 채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바이샤가 호박색 눈 한가득 의문을 담은 채 카얀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부분이 이상한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가 말한 것 전부.”

“네?”

“내 라누아께선 처음부터 빛나셨고 향기로우셨으며 어디서든 선명히 내 눈에 들어오셨다. 그러니 이상하다는 거야.”

“처음……부터요?”

“그래.”

“그러니까 처음…… 라젠 궁의 화원에서 만난…… 그때를 말씀하십니까?”

대답조차 귀찮은지 고개를 끄덕여 답하는 바이샤를 보며 카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금 한숨을 내쉬었다간 그것이 욕설로 변할 것만 같았다.

맹세컨대 그의 종이 된 이후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충동이었다.

“쿠드라.”

“왜?”

“보통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말합니다.”

“……뭐?”

생전 처음 들어보는 바이샤의 얼빠진 대답에 카얀이 다시 한번 신을 찾으며 기도했다.

헬라임이시여, 이 미천한 종을 시험하지 마십시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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