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느리게 닿는 말 (4)
묶이지 않은 탓에 움직임이 자유로운 라젠의 왕이 무릎으로 기어 이타샨의 다리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가 기대한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타샨은 이미 죽은 옛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받았으며 새로운 주인을 섬기기 시작했다.
아직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외는 없다 하더라도 바이샤로 인해 가족이 구원받은 그다.
이제 와 마음을 돌릴 이유 따위는 없었다.
“이곳은 쿠드라께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입니다.”
“터, 터번 후작?”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쿠드라.”
이타샨이 고개를 숙였고 카얀이 지키고 섰던 입구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행동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바이샤가 몸을 돌렸다.
순서는 올 때와 똑같았다.
바이샤가 앞섰고 그 뒤를 카얀과 이타샨이 순서대로 따랐다.
다른 것이 있다면 뒤에 남는 자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어딜, 어딜 가는 거야! 나를 두고! 터번 후작! 후작!”
애원하던 목소리는 점차 협박으로 변하고 마지막에 이르러선 욕설로 변했다.
저급한 욕설이 지하감옥의 어두운 복도를 타고 울려 퍼졌다.
“재갈을 물리라고 해.”
“그러겠습니다.”
어떻게 신호가 전달된 것인지 곧 욕설이 살려달라는 애원으로 바뀌고 이내 잠잠해졌다.
이타샨은 잠시 놀란 얼굴로 멈춰 서서 앞서 걷는 두 사람의 등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당연히 모른다.
앞으로 차근히 배워 나가면 될 일이니 공연히 심기가 불편한 주인을 귀찮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바이샤와 카얀의 뒤를 쫓으려던 이타샨은 곧 자신의 옛 이름을 불러오는 이의 목소리에 다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터번 후작! 어떻게 풀려난 것인가!”
“자이로 왕세자…….”
깊은 곳에서 얕은 곳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인물들을 나누어 가둔 것인지 라젠 왕이 갇힌 곳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갇혀 있던 자이로 왕세자가 이타샨을 붙들었다.
그나 라젠의 왕과 다르게 수갑과 족쇄를 찬 자이로 왕세자의 어깨너머로 비치는 인영은 아마도 루미어스 왕녀일 것이다.
남의 것을 도둑질한 죄로 목이 잘린 왕비처럼 같은 죄로 양쪽 귀가 잘린 루미어스는 피가 말라붙은 제 귀를 두 손으로 가린 채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늘고 하얀 손목에도 자이로와 마찬가지로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나, 나도 좀 살려주게!”
조금 전 만났던 라젠의 왕과 똑같은 애원이었다.
이대로 지나친다면 분명 그 아비처럼 지하감옥의 복도를 소란하게 할 것이다.
“이타샨, 뭐지?”
“라젠의 왕세자와 왕녀입니다.”
“……아, 깜빡하고 있었군.”
워낙에 존재감 없이 제 부모의 등 뒤에 숨어 있었던 터라 지금까지 왕세자의 처분을 고민하지 못했다.
바이샤는 자신의 실책을 알아차리고 라젠의 왕세자와 왕녀가 갇힌 창살 앞에 섰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 아비와 다르게 상황 파악은 할 줄 아는가 보군.”
그러나 눈치는 없는 듯하다.
바이샤는 제가 이죽거리는 목소리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듯 안색을 밝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자이로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아는 듯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은 옳은 선택이었으나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틀린 답이었다.
“내가 널 왜 살려야 하지?”
“터, 터번 후작은 살리지 않으셨습니까?”
“네가 이타샨보다 쓸모가 있다?”
“네, 네!”
이타샨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자이로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느 부분이 세리아나와 이복형제라는 표시일까? 바이샤는 비굴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 있는 자이로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너에게 무슨 쓸모가 있지?”
“루미어스를 드리겠습니다!”
“……뭐?”
자이로의 대답에 바이샤가 저도 모르게 반문했고 카얀은 헬라임의 이름을 불렀으며 이타샨은 헛웃음을 삼켰다.
영특해 보이는 듯한 얼굴과 모자란 머리는 제 아비를 똑 닮아 내뱉는 말마다 실소가 새어 나왔다.
“루미어스는 이 라젠의 왕녀입니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계집입니다! 아, 아니, 세리아나, 아니, 그게 아니라 라누아 다음으로 아름답습니다!”
알현실에서 세리아나를 극진히 보살피는 바이샤의 모습을 제대로 기억한 것인지 재빨리 말을 바꾼 자이로가 빠르게 몸을 일으켜 구석에 몸을 숨긴 루미어스를 끌고 왔다.
거친 손길에 루미어스가 작게 비명을 질렀지만 자이로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동생의 얼굴을 잡아 바이샤에게로 돌렸다.
“지, 지금은 이렇지만 제대로 씻기고 치료만 받는다면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하도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그가 하는 짓을 지켜보고만 있던 바이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루미어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녀가 약자이기 때문이다.
오라비의 거친 손길에 눈물을 펑펑 쏟으며 신음하는 여인을 그 신분이 죄인이라 하여 가만히 지켜볼 바이샤가 아니었다.
“저건 검은 사막까지 갈 필요도 없겠군. 카얀!”
“네, 쿠드라.”
“우리가 떠날 때 저 녀석도 함께 처리해.”
“명을 받습니다.”
냉기 서린 명령에 자이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잠깐만! 이 아이를 드리겠다고……!”
“난 너의 쓸모를 물었지 네 동생의 쓸모를 가늠하겠다 한 적은 없다.”
“하, 하지만!”
자이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루미어스는 왕녀였고 라젠의 국왕인 아비의 소유물이었다.
아비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그 소유권이 왕세자인 자신에게 넘어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이는 라젠과 차이툰의 문화 차이를 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생각이었으나 사막의 전사들을 야만족 취급하며 제대로 알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이가 그것을 알 리 만무했다.
누가 알려주기라도 했다면 자이로의 다음 대처는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샤도 카얀도, 하다못해 이타샨까지도 그것을 알려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떠나는 길에 저 녀석의 비명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으니 재갈을 물리라 일러.”
“히아신 님과 타람 님께 전하겠습니다.”
이타샨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자이로의 최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라젠에서 유일하게 차이툰을 알려 노력했던 이가 바로 그였다.
이타샨은 바이샤가 자이로를 산채로 태워 죽이는 벌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곤 마른침을 삼켰다.
‘적응해야겠지.’
앞으로 많은 문제와 부딪히게 될 것이니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 놓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싶었다.
“라젠의 왕녀는 다른 곳으로 옮겨 둬. 처벌은 나중에 정하겠다. 일단 이곳을 나가야겠어.”
공기 중에 오물이 떠다니는 듯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지는 공간이었다.
바이샤가 움직이고 카얀이 고개를 숙인 순간, 이타샨은 바이샤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이들의 모습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횃불을 떨어트렸다.
다행히 듬성듬성 벽에 걸린 횃불이 남아 사방이 어두워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하나의 횃불만큼 주변이 어두워진 탓에 그림자에서 나와 빠르게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이 마치 어둠 속에 녹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다.”
카얀의 짤막한 한마디에 정신을 차린 이타샨이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아 발을 움직였다.
아까 라젠의 왕이 조용해진 것도 이런 방식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을 따라 지하감옥을 벗어난 이타샨은 새로 생긴 공터 한가운데서 불타오르고 있는 거대한 제단을 발견했다.
처음 국경에서 차이툰의 전사들과 전투를 벌였을 때 패배한 후 본 기억이 있는 장례식이었다.
“이타샨을 가족에게 안내해 줘라.”
“명을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쿠드라.”
어설프게 카얀의 인사를 따라 하며 고개를 숙인 이타샨을 손끝으로 물린 바이샤의 시선이 다시 세리아나에게 가 닿았다.
제 할 일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덩치를 키운 불꽃이 하늘 높이 닿을 듯 넘실거리고 있었다.
“빨리 해가 떴으면 좋겠군.”
그래야 세리아나가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해가 뜨고 불꽃이 사그라들 때까지 세리아나는 라큘의 나뭇가지를 들고 저 자리를 지킬 것이다.
세리아나의 파리한 안색을 떠올린 바이샤의 미간이 구겨졌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지금 이것이 세리아나가 라누아로 해야 할 마지막 일이라는 점이었다.
사막의 규칙을 따르자면 이후에 남은 일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치아린이 대신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매우 못마땅한 얼굴로 제가 남아 라누아의 일을 하겠다 답하던 치아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 주인 곁을 오래 떠나 있어야 하는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이 남지 않으면 세리아나가 그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돌아가시자마자 야안에게 먼저 들러주세요! 아니, 라누아께선 방으로 돌아가 쉬시고요! 쿠드라께서 가세요!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라누아께 문제가 생기면 다 죽여버리고 저도 죽을 거라 꼭 전해주셔야 합니다!]
섬기는 왕에게 신하가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바이샤는 너그럽게 받아주기로 했다.
아니, 받아주기는 했는데 기어이 한마디를 보태버렸다.
[라누아께 일이 생기면 내가 먼저 다 죽여버릴 것이니 네가 나설 자리는 없다.]
……라고.
이 말에 발끈한 치아린과 더 발끈한 바이샤가 말다툼을 벌이려는 걸 막은 것은 치료사였다.
이 싸움에 끼어 들어봐야 제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카얀이 일찌감치 자리를 비워버린 탓에 말릴 만한 이가 치료사뿐이었다는 게 그에겐 불행한 일이었다.
“세리아나, 대체 무슨 일이지?”
불타오르는 제단을 한 바퀴 돌아 다시 그의 시야에 들어온 세리아나를 바라보며 바이샤는 중얼거렸다.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뻐하던 모습을 눈에 제대로 담기도 전에 온몸을 떨며 까무러칠뻔한 그녀를 보고, 제가 놀라 기절할 뻔했다.
이후 이유를 물었지만 제대로 된 대답은 들을 수 없었고 산모에게 스트레스를 줘선 안 된다는 치료사의 말에 다시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당신이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알 재주가 없어.”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짐작해볼 것이나 그것은 바이샤만의 고뇌일 뿐 세리아나가 내어주는 정답이 되지 못 한다.
거기다 평생을 제멋대로 살아온 바이샤다.
쿠드라의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난 적은 없지만 남의 기분을 살피며 살아본 경험 같은 것은 없다.
그런 자신이 고민한다고 하여 엇비슷한 답이라도 내놓을 수 있을까?
“세리아나, 나의 라누아. 말해봐, 대체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거지?”
그의 길어진 혼잣말을 따라 하늘의 달이 서쪽으로 천천히 기울어 가고 있었다.
* * *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눈을 뜬 세리아나는 얇은 천으로 가려진 커다란 창 너머 모래사막을 눈에 담고 있었다.
오아시스로 돌아가기 위해 국경을 넘은 지는 나흘.
그간 뒤집혔던 낮과 밤의 여파가 남은 탓인지 아니면 배 속의 작은 생명이 자리를 잡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인지 그녀는 이동하는 내도록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치아린도 같이 돌아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라젠의 왕성에 남은 치아린은 히아신과 타람, 그리고 이제는 이타샨이라고 불리게 된 사내와 함께 세리아나를 대신해 교화(敎化) 작업에 힘쓰고 있었다.
영토의 주인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백성들은 바뀌지 않았다.
백성들을 끌어안지 못하면 전쟁의 승부 같은 건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본래라면 세리아나가 남아 해야 했던 일이었다.
헬라임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그를 섬길 수 있도록 가르침을 내리는 일. 물론 그 이전에 이전까지 섬겼던 신을 그들의 생활에서 파내 없애버리는 작업까지 진행해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단기간에 끝마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본래 전쟁보다도 수십 수백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 이 교화 작업이었다.
그러나 배 속에 자리 잡은 어린 생명 때문에 세리아나는 그 일을 맡을 수는 없었다.
임신 초기에는 절대적 안정과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모래사막의 오아시스만큼 완벽한 장소는 없었다.
라누아의 종으로 유사시 그 일을 대행하는 역할을 하는 치아린이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길로 그녀를 배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세리아나는 쿠션을 정리해 다시 그 속에 몸을 뉘며 사막의 건조한 모래 내음을 깊이 들이마셨다.
태어나 자라고 결혼해 떠나는 날까지 머물렀던 곳보다 이제는 이 메마른 모래 내음이 그녀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었다.
“세리아나, 괜찮나?”
“네, 괜찮아요.”
얇은 너울 너머 들려온 목소리에 세리아나가 고개를 들어 답했다.
그녀가 탄 마차 가까이 말을 몰아 다가온 바이샤가 능숙한 솜씨로 말 위에서 마차 안으로 몸을 움직였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여 세리아나가 머무는 공간으로 들어서 그가 아내의 얼굴을 살폈다.
“식사를 또 남겼더군.”
“먹히지 않아요.”
“치료사가 그래선 안 된다고 했을 텐데?”
“…….”
“……내가 잘못했으니 그런 표정은 짓지 마.”
나무라는 그의 말에 속이 상한 것인지 금방 우울한 낯으로 변하는 세리아나를 보며 바이샤가 빠르게 사과해왔다.
초기에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니 평소보다 배는 더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고 잔소리하던 치료사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제겐 잘못했다는 말은 하지 말라 하셨잖아요.”
“그건 당신만 금지야. 나는 해도 돼.”
기껏 신경 쓴 말투로 부드럽게 한다는 말이 평소와 다름이 없다.
세리아나는 그런 바이샤의 모습에 살포시 미소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누운 자세로 저를 안아달라 손을 뻗는 그 모습이 귀여워 바이샤의 얼굴에도 미소가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