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느리게 닿는 말 (3)
기름을 먹인 나무로 만든 제단에 불이 붙었다.
세리아나는 붉은 나뭇가지를 품에 안고 그 제단 주변을 돌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시녀들과 횃불을 든 전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고요한 장례식이었다.
불길이 피어오르는 공터에서 조금 벗어난 위치에 선 바이샤는 그 모든 장면을 눈에 담고 있었다.
뜨거운 불꽃이 일렁일 때마다 세리아나의 검은 베일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춤을 췄다.
“내가 이기지 못할 고집도 있는 모양이군.”
“라누아이시니…….”
바이샤의 뒤에 서 있던 카얀이 그 혼잣말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 천막 안에서 뭔가에 놀란 듯, 혹은 두려운 듯 몸을 떨고 있던 세리아나는 주위의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저 자리에 서 있었다.
검고 붉은 너울이 진 세리아나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검은 베일이 그 얼굴을 가리고 있다 해도 바이샤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다행히 또다시 정신을 놓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차라리 기절해 쓰러졌다면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을까?
평소라면 해보지 않았을 여러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떠돌고 있었다.
“내 고집으로 이길 수 없는 분은 처음이라…… 새로운 기분이군.”
그 혼잣말에 카얀은 이번엔 입을 다물었다.
저를 저리도 잘 아는 분이시라 뭐라 덧붙일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카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못마땅한 얼굴로 세리아나의 뒷모습을 좇던 바이샤가 몸을 돌렸다.
세리아나의 휴식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마무리할 때였다.
“그 쳐죽일 놈은?”
“……쿠드라…….”
“내 라누아께서 아비가 아니라 했다. 그런데 내가 예의를 따져야 하나?”
“쳐죽일 생각이 아니라 찢어 죽일 작정이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 잊을 뻔했군.”
무덤덤하고 무해한 포지션을 가지고는 있지만 카얀도 사막의 전사였고 어린 시절부터 바이샤와 함께 자라온 사내였다.
평소엔 바이샤와 치아린에 밀려 티가 나지는 않지만 가끔 이렇게 보여주는 모습이 이 사내도 보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사소한 문제라면 가장 가까이에 붙어 있는 이가 바이샤, 그가 아니면 치아린이었기 때문에 그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몇 없다는 데 있었다.
이게 왜 사소한 문제씩이나 되냐면…….
“평소에도 티를 좀 내고 살아. 그러니 너를 만만히 여기는 놈들이 나오지.”
“그 정도도 판단하지 못하는 머저리라면 살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벌한 농담, 혹은 진담을 주고받으며 한참을 걷던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라젠 왕성의 지하감옥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인지 죄인들이 머무를 장소까지 화려하게 치장되어 생소한 혐오감을 주는 장소였다.
“폐궁에 머물 때도 느낀 거지만 참 취향 한번 독특하군.”
“왕성의 지하감옥엔 특별히 계급이 높은 자들만 갇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거겠지요.”
“높든 낮든 죄인은 죄인이지. 결국, 목이 잘려 죽을 것들인데 이런 꽃장식이 필요한가?”
감옥 벽면에 마치 수를 놓은 듯 양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꽃들을 손끝으로 훑으며 얼굴을 찌푸린 바이샤가 쓴소리를 뱉었다.
국경을 넘고 왕성에 도달하기까지 몇 번 구미에 맞는 전투가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실망스러운 싸움들이었다.
오랜 시간 명맥을 유지해 온 나라가 왜 이다지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혹시 어딘가 그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함정이라도 숨겨진 게 아닌가 고민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답이 여기에 있었군.”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 아니다.
내부에서부터 착실하게 썩어들어 간 것이다.
안에서부터 썩어 죽어버린 나무는 어린아이의 주먹질에도 무너져 내린다.
라젠이라는 나라가 바로 그런 고목이었다.
“쿠드라, 이쪽입니다.”
찡그린 얼굴로 물비린내가 가득한 복도를 걷던 바이샤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쇠창살 너머 삶의 의욕을 잃고 주저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재미없는 얼굴을 하고 있군.”
“내가 죽을 차례요?”
어둠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답하는 남자는 터번 후작이었다.
외성에서의 전투가 끝나고 포로로 붙잡힌 그는 내성이 함락된 이후 바로 이곳으로 옮겨졌다.
하나의 창살 안에 갇힌 다른 포로들과 다르게 홀로 갇혀 방치된 그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제법 많은 생각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순순히 죽어줄 생각인가?”
“내 나라를 지키지 못했소. 가족들 역시…….”
“지킬 것이 없으니 죽겠다?”
“…….”
간혹 그런 자들이 있다.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 ‘나’를 지키기보다 ‘남’을 지키는 데서 보람을 찾는 이들은 누구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누구보다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바이샤가 느끼기에 터번 후작이 바로 그런 자였다.
[터번 후작은 라젠 귀족 중 존경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포로의 거취 문제를 고민하며 물었을 때 세리아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기사도를 아는 기사, 귀족의 의무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유일한 귀족이라고.
전쟁터에서 검을 섞은 것은 몇 번이 되지 않지만 올곧은 검의 궤적에서 바이샤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리 망설임 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 수 있었다.
만약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괜한 불씨를 끌어안는 일이 될 테지만 그것 하나쯤 감당 못 하는 자가 쿠드라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까. 바이샤는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네가 지켜야 할 것에 왕의 이름은 없군.”
“기사의 명예는 목숨과도 같은 것, 왕께서 나의 명예를 버리라 명하셨으니 그분을 지키고 섬겨야 할 기사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소.”
그것은 엘라이어를 외성의 성벽에 매다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가 선택한 왕이었다.
휘청이는 고국을 다시 세워줄 성군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터번은 젊은 시절 만났던 왕의 푸른 눈동자를 떠올렸다.
선명하고 맑은, 푸른 하늘을 닮은 그 눈동자와 감춰지지 않았던 영민함을 믿었다.
그것이 왕이 된 이후의 향락을 생각하며 빛나던 눈이었고 책사를 통해 미리 머릿속에 욱여넣었던 영민함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건 나중의 일이었다.
“가족들이 살아 있다면 어찌할 거지?”
“……지금 뭐라고 했소?”
“나라는 사라졌지만 지켜야 할 네 가족이 아직 살아 있다면 어찌할 것이냐 물었다.”
바이샤의 물음에 터번 후작의 흐릿한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모두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지하감옥에서도 들릴 만큼 큰 비명이 들려왔고 전쟁터에서나 맡을 수 있었던 진한 피비린내를 맡았으니까. 그런데…… 살아 있다고?
그의 가족이 살아남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라젠의 왕 덕분이었다.
그는 터번 후작이 전쟁터에서 도망이라도 갈까 그의 가족을 인질로 삼아 성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감금해 두었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터번 후작가의 사람들을 생각하기보다 제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 더욱 급했던 터라 잊고 방치해 버린 것이다.
그 덕분에 터번 후작의 가족은 무사히 살아남아 궁을 뒤지던 차이툰의 전사들에게 발견되었다.
“저, 정말 내 가족이 살아 있소?”
“내 물음에 답을 하는 것이 먼저다.”
“무엇이든 하겠소.”
“무엇이든?”
철창 바로 앞까지 다가와 무릎을 꿇은 그가 바이샤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죄인들과 다르게 손과 발 그 어디에도 족쇄를 차지 않은 터번 후작은 스스로 제 눈높이를 낮춘 채 간절하게 눈을 빛냈다.
“나의 쓸모가 남았기에 제안하는 것이리라 믿소. 그렇다면 당신이, 아니, 쿠드라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
“변절자라 손가락질받을 것이다. 추락한 명예를 되찾을 수도 없다. 그래도?”
“나라가 없는 변절자가 어디 있으며 이미 죽어버린 명예를 되살릴 방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젠을 지키던 터번 후작은 나라와 함께 죽었고 그 왕을 섬기던 기사 역시 죽어 외성의 무너진 성벽 아래 묻혔습니다.”
바이샤를 올려보던 터번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내 엎드린 자세가 되어 바이샤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엎드린 사내의 등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 한쪽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지었다.
“지금부터 너를 이타샨이라 부르겠다. 이름이 없는 자라는 뜻이다.”
“네.”
“너는 지금 이 순간부터 헬라임을 섬기게 될 것이고 그분의 충실한 신도이자 전사가 되어야 한다.”
“네.”
“이 땅에서 라젠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 너의 첫 번째 임무다. 그것을 훌륭히 해낸다면 너에게 진짜 이름을 내려주마.”
“감사합니다, 쿠드라.”
“카얀, 문을 열어라.”
“명을 받습니다.”
카얀은 기다렸다는 듯 두꺼운 창살의 문을 열었다.
그는 바이샤가 처음부터 터번 후작을 욕심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욕심이 많은 그의 주인이 주인 없이 굴러다니는 인재를 버려둘 리 없었다.
라젠의 인간이라는 것이 아주 작은 흠이었으나 그 흠은 이타샨이라는 이름으로 바이샤의 명을 따르는 동안 지워질 것이다.
“일어나라.”
“네, 쿠드라.”
“카얀이 네게 차이툰의 전사가 어떤 자들인지 알려줄 것이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좋군.”
한마디를 툭 뱉은 바이샤가 걷기 시작하자 카얀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이제 이타샨이라 불리게 된 사내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타샨이 갇혀 있던 장소에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자 병자들의 신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이샤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더욱더 깊은 곳, 먼저 걸었던 길보다 어둡고 음침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간 그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어둡군.”
바이샤의 한마디에 이제껏 묵묵히 뒤를 따르던 이타샨이 움직였다.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홰가 보관된 상자를 찾아 횃불을 밝힌 그가 이제 자신이 섬겨야 할 주인의 시야를 밝혀주었다.
“익숙해 보이는군.”
“이곳의 관리자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기사를?”
“한때입니다.”
젊은 시절, 자신이 섬기는 왕의 폭정에 참지 못하고 올린 충언이 문제였다.
그는 한동안 반성하라는 왕의 명령으로 이곳 지하감옥에서 삼 개월을 보냈다.
가뭄으로 굶주린 산짐승들이 산에서 내려와 수도의 인간들을 위협하지 않았다면 더 오랜 시간 머물렀을 것이다.
바이샤는 무감한 얼굴로 답하는 이타샨의 얼굴을 아주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무심한 얼굴이었으나 그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조금 전 제 나라와 섬기던 왕을 버렸다.
마음에 파도가 이는 것은 당연했다.
오히려 저 정도 반응으로 끝난 것이 대단한 것이리라.
“제대로 주웠나 보군.”
마음에 드는 것이라곤 세리아나의 고향이라는 사실 단 하나뿐이었던 장소에서 제법 마음에 차는 인물 하나를 주웠으니 기뻐해도 좋을 것이다.
바이샤는 그렇게 생각하며 횃불로 밝힌 창살 너머를 노려보았다.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인 이곳에서도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바로 저기에 있었다.
“나, 나는 와, 왕이야……. 감히 누가 나를……. 나는 왕, 이 라젠의 왕…….”
횃불이 만들어낸 진한 그림자를 아직 보지 못한 것일까? 그것은 구석에 머리를 박고 몸을 움츠린 채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주 잠깐 뭔가 중요한 말이라도 하는 건가 싶어 귀를 기울였던 바이샤가 미간을 찌푸리며 짧게 혀를 찼다.
“맛이 갔군.”
“대화를 나누실 생각이셨습니까?”
“아니. 통보를 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이 상황이라면 통보 이전에 제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태인지부터 확인해야 할 노릇이다.
긴 한숨을 내쉰 바이샤가 카얀을 향해 눈짓했다.
귀찮았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일도 제대로 해내야 하는 것이 쿠드라인 것을.
끼익하고 쇠가 긁히는 소리가 나며 철창의 문이 열렸다.
카얀이 열어준 그 문 안으로 들어간 바이샤는 그때까지도 넋을 놓은 사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라젠의 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말할 것이다.”
바이샤의 목소리가 드디어 닿은 것일까? 그의 한마디에 라젠 왕의 몸이 튀어 오르듯 움찔거렸다.
“너는 검은 사막으로 보내질 것이다. 기뻐해라, 그때까지 네 명줄은 무사할 테니.”
“사, 살려주는 것……이냐?”
몸을 돌린 라젠 왕의 얼굴은 시체처럼 퀭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번들거리며 빛을 내는 푸른 눈동자가 기괴해 어지간한 담력이 없는 자라면 소름이 끼쳐 몸을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내용이었다.
바이샤는 숨겨진 말의 뜻을 짐작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를 냉소하며 말을 이었다.
“네 손목을 자르고 발목에 말뚝을 박아 쇠사슬을 감을 것이다. 너는 검은 사막의 끝까지 그 상태로 걸어가야 한다.”
“무, 무슨……!”
“만약 그 검은 사막의 끝에 살아서 도착한다면 너를 살려도 좋다는 헬라임의 뜻이라 생각하고 용서할 것이나 도착하지 못한다면.”
“아, 안 돼…….”
“너는 죽어서도 검은 사막을 떠나지 못하는 죄인이 되어 낮에는 태양 아래 불타오르고 밤에는 달 아래 얼어붙는 지옥을 떠돌게 될 것이다.”
번들거리던 푸른 눈동자의 빛이 사라졌다.
죽은 이의 것을 닮은 탁한 눈동자가 드디어 제 몸과 어우러져 좀 전의 기괴함을 없애버렸다.
절망한 자의 눈동자가 호박빛 눈동자를 차마 노려보지 못하고 배회하다 그 뒤에선 익숙한 이의 얼굴에 가 닿았다.
“터, 터번 후작!”
낭떠러지에 매달려 죽기 직전의 사람이 동아줄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라젠의 왕이 소리 질렀다.
“살려줘! 살려주게! 나를 구해! 어서 저 야만인을 죽이고 나를 구하란 말이다!”
“…….”
“터번 후작, 내 잘못했네! 내 금은보화를 주겠네! 아니면 왕의 자리를 원하나? 얼마든지 줄 것이야! 그러니 나를 살려! 아니, 살려주게!”
절박한 그의 목소리가 좁은 공간 안에 울려 퍼졌지만 그것에 반응을 보이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