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느리게 닿는 말 (2)
“뭐?”
치료사의 대답에 얼굴을 찌푸린 바이샤가 되물었다.
그러나 치료사는 정말로 지금 당장은 말해줄 생각이 없는 듯 세리아나의 몸 위에 얇은 모포 하나를 덮어주곤 제 옷자락을 정리한 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 아시고 기다리세요. 기력 회복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챙겨오겠습니다.”
그리곤 치료사는 정말로 천막을 빠져나갔다.
쓰러진 세리아나를 살피라 급하게 불러들인 치료사가 아주 여유로운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날 때까지 바이샤와 카얀, 그리고 치아린은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를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제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기다리라고 했나?”
“도움이 될 것들을 챙겨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버렸네요?”
미처 세리아나의 그림자 속으로 돌아가지 못한 쥬드마저 당황한 채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치료사는 바이샤와 카얀, 그리고 치아린을 어린 시절부터 봐온 사내였다.
그것은 세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잔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라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서로에게 격이 없고 편안히 대하는 관계였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자리를 뜨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단 다른 말이 없는 것을 보면…… 라누아께선 크게 나쁜 상태는 아닌 거겠죠?”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치아린이 입을 열었다.
세리아나는 곤히 잠든 상태였다.
여전히 안색은 나빠 보였지만 딱히 이렇다 할 행동을 취하지 않은 치료사 덕분에 도리어 안심할 수 있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다시 온다고 했으니 기다릴 수밖에.”
바이샤의 말에 천막 안에 남은 이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세리아나가 깨어나야 한다.
아마도 그러기 위해 치료사가 무언가를 준비해 돌아온다고 했으니 그들은 아주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이리라.
세리아나가 눈을 뜬 것은 새벽 별이 지고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의 시간이었다.
기름을 먹인 나무로 쌓은 제단이 완성될 때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잠에서 깨어난 세리아나는 저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이샤? 치아린이랑 카얀까지…… 무슨 일이 있나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는 세리아나를 부축한 바이샤는 헛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무슨 일은 바로 당신에게 있었다 말하고 싶었지만 달이 서쪽으로 기울 쯤 찾아왔던 치료사가 절대 안정을 외친 덕분에 그 말은 전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어.”
“네?”
간이침대 위에서 일어나 바이샤의 가슴에 몸을 기댄 세리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자신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자신이 언제 이 천막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지금은 당신의 시간인가요? 아니면 저의 시간?”
“해가 떠오르고 있어.”
“……그런데 제가 왜 잠들어 있었죠?”
“그건 나도 궁금하니 조금만 기다리도록 하지.”
천막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할 생각이긴 했지만 잠들 생각은 없었던 세리아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는 바이샤에게서 시선을 돌려 치아린을 바라보았다.
바이샤가 답을 안 해주면 치아린이 답해주리라. 하지만 그런 그녀의 기대를 배반하듯 치아린도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 뿐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카얀까지?”
치아린은 저를 바라보기라도 했지 카얀은 아예 다른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운다.
진중한 성격의 카얀이 제 시선을 외면할 정도라니…….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구나 싶어 세리아나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세리아나의 얼굴에 불안과 걱정이 드리워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세 사람은 치료사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리아나가 깨어난 순간 쥬드를 보냈으니 지금쯤 도착하는 것이 정상일 텐데 오늘따라 그의 걸음이 느려지기라도 한 것인지 천막 너머 그의 발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조금의 시간이 더 흘러 드디어 치료사가 도착했다.
조수들까지 대동하고 나타난 그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올린 후 재촉하는 바이샤를 뒤로하고 다시 한번 세리아나의 상태를 살폈다.
“내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문제라고 한다면 문제겠지요.”
“치료사가 병자의 걱정을 덜어줘야지 더해주는 건 무슨 심보지?”
“라누아께선 병자가 아니시니 상관없지 않습니까?”
“……타르안.”
“하하하.”
자신에게 무슨 큰 병이라도 생긴 것일까 걱정하던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타박에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치료사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문제가 있다면서 병자는 아니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를 놀릴 생각이라면…….”
“축하드립니다, 두 분.”
“……뭐?”
“아기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귀로 받아들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버벅거리는 바이샤와 세리아나를 바라보는 치료사의 얼굴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찾아오신 지 얼마 안 되십니다. 최근 몸이 무겁고 잠이 늘지 않으셨습니까?”
“그, 그렇긴 한데 난 그저 낮과 밤이 바뀌어서라고…….”
“처음 찾아오는 아기씨이시니 모르시는 게 당연하지요.”
세리아나와 바이샤의 시선이 그녀의 납작한 아랫배로 향했다.
아기라니…… 갑작스러운 소식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라누아께선 월경의 주기가 일정치 않아 더욱 짐작하기 힘드셨을 겁니다.”
마른 몸으로 미인의 척을 가리는 라젠에서 태어나 엘라이어의 지독한 관리를 받는 동안 ‘건강’을 잃은 세리아나는 다른 라젠의 귀족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불규칙한 월경 주기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도 그러했고 주변의 다른 여인들도 그러했기에 그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세리아나였다.
그러던 그녀가 차이툰으로 와 충분한 보살핌을 받으며 건강을 회복했다.
거기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이샤와 함께 밤을 보내었으니 아이가 들어선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치료사의 거듭된 축하에도 믿기지 않는 듯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세리아나가 두 손을 조심스럽게 제 아랫배로 가져갔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이곳에 바이샤와 자신의 아이가 있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정말로…… 아기가?”
“축하드립니다, 라누아.”
“축하드려요, 라누아!”
드디어 모든 상황을 이해한 카얀과 치아린의 축하 인사가 전해졌다.
아이와는 인연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두 사람이었기에 기쁨은 더욱 컸다.
제 주인들의 아이라니!
“아직 초기라 아기씨가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했을 겁니다. 한동안은 먹고 마시는 것 외에 행동하는 모든 것 하나하나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으, 응.”
“제 조수들이 머무르며 라누아와 아기씨를 살필 겁니다. 치아린 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당연하죠!”
“그리고 쿠드라?”
“……어, 음…… 왜, 왜 그러지?”
이제껏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세리아나의 아랫배만 바라보고 있던 바이샤가 치료사의 부름에 넋을 놓은 사람처럼 대답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린 치료사가 입을 열어 하려던 말을 이었다.
“라누아의 육체는 저희가 살필 것이나 마음은 쿠드라께서 돌보셔야 합니다. 아기씨가 들어선 초기에 심한 정신적 압박이나 충격은 두 분 모두에게 좋지 못하니까요.”
“그, 그러지.”
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바이샤에게서 다시 한 번 확답을 받아낸 치료사의 시선이 세리아나에게 가 닿았다.
“라누아, 식사를 제대로 못 하신다 들었습니다.”
“조금…… 삼키는 게 힘들어져서.”
“그것 역시 초기의 증상입니다. 구역감을 느끼시더라도 아기씨를 생각해 식사를 꼭 챙겨주십시오.”
“노력할게.”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치료사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주의사항과 잔소리, 그리고 축하 인사를 늘어놓곤 세리아나와 바이샤 두 사람만을 제외한 모두를 이끌고 천막을 빠져나갔다.
부부만의 시간을 줘야 한다는 눈짓에 치아린과 카얀, 그리고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쥬드와 듐까지 빠져나간 천막 안은 고요했다.
“꿈을 꾸는 걸까요?”
“……이번만큼은 나도 확신할 수 없군. 꼬집어 볼 텐가?”
“제가 바이샤를요?”
“그럼 내가 하지.”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제 허벅지를 세게 꼬집은 바이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 모습에 정말로 이게 꿈인가 싶어 심각한 표정을 지었던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이어지는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꿈인가? 안 아픈데?”
“바이샤?”
“정말로 꿈…….”
“바, 바이샤! 칼은 내려놓으세요!”
“꿈이라면 괜찮을 거야.”
“꿈이 아니에요! 보세요! 여기요! 빨갛죠?”
“당신 팔을 꼬집으면 어떻게 해!”
당장이라도 제 팔뚝에 박아넣을 듯 칼을 세게 움켜쥐고 있던 바이샤는 세리아나가 제 팔을 꼬집어 붉은 흔적을 내자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굴었다.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팔에 남은 붉은 자국을 손끝으로 훑던 바이샤의 입꼬리가 점점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눈꼬리가 휘고 입꼬리가 점점 위로 당겨 올라가며 그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작게 시작된 그 웃음이 큰 웃음으로 변하는 데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세리아나, 나의 라누아.”
“좋으세요?”
“아주 많이.”
겁이라도 먹은 듯 용기를 내지 못하고 배 주위를 맴도는 커다란 손을 잡아 제 아랫배 위에 올린 세리아나가 그 위에 제 손을 겹쳐 올리며 미소 지었다.
“여기에 우리 아이가 있는 거예요.”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군.”
“다시 한 번 꼬집어볼까요?”
“날 꼬집어, 날! 당신의 피부는 연약해서 금방 흉터가 남아버리니까.”
세리아나가 또 제 팔을 꼬집기라도 할까 냉큼 그녀의 몸을 감싸 안은 바이샤가 제 손바닥 아래의 납작한 배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작은 생명이기에 저기에 저리 자리를 잡았을까?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선물을 받은 것만 같아 실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단속할 수가 없었다.
“고마워, 축하해.”
“저도 고마워요.”
“무엇을?”
“기뻐해 주셔서요.”
“당신과 나의 아이야.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지.”
바이샤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그 품에 안겨 제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그의 손위에 제 손을 겹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행복에 절여지는 느낌이었다.
세리아나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며 제 안에서 작게 울리기 시작한 아주 작고 여린 고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애썼다.
태동을 느끼기엔 너무 작고 작은 생명이라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가…….”
세리아나의 작은 중얼거림에 그녀를 더욱 단단히 감싸 안은 바이샤가 조심스럽게 배를 쓰다듬었다.
머리와 귀 끝에 쉴 새 없이 닿았다 떨어지는 바이샤의 입술이 무척이나 부드럽고 뜨거웠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
조심스럽게 아름다운 미래를 그려보려던 순간 세리아나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붉은 길 위의 바이샤, 누군가를 바라보는 미래의 그, 그 자리에 없는 자신.
‘그, 그럼 우리 아이는?’
조금 전까지 행복 속에 노곤히 잠겨 있던 세리아나의 몸이 빠르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미래에 자신은 없다.
바이샤의 곁에는 다른 사람이 서게 될 것이다.
그럼 그때에 이 아이는? 아이는 어디에 있었지?
“세리아나?”
갑자기 굳어버린 몸이 조금씩 떨려오는 것을 느낀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지금은 깨져 사라져버린 거울은 처음부터 바이샤 외의 다른 사람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럼 그 흐릿한 풍경 너머 두 사람의 아이가 어딘가에 서 있었을까?
“세리아나, 왜 그러지? 타르안! 당장 들어와!”
미약하던 떨림은 이제는 주체할 수 없어 몸이 들썩일 정도로 변했다.
조금 전까지 기쁨에 발갛게 상기되어 있던 사랑스러운 두 뺨은 핏기가 가셨고 행복에 잠겨 몽롱한 빛을 띠던 연둣빛 눈동자에 가득한 것은 불안이었다.
“세리아나!”
바이샤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변화에 당황하며 다급히 치료사의 이름을 외치며 그녀의 떨리는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대체 무엇이 자신의 아내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괴로웠다.
그와 나누었던 말 중에 힌트가 있을까 싶었지만 지금 당장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라누아!”
천막의 입구를 가리고 있던 덮개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펄럭이고 치료사가 뛰어 들어왔다.
그 뒤를 치아린과 카얀이 뒤따랐지만 바이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린 시절부터 저의 건강을 살펴준 치료사 단 한 사람뿐이었다.
“내 라누아께서 갑자기 몸을 떠신다! 내 말을 듣지 못해!”
“진정하십시오, 쿠드라! 그대로 라누아의 몸을 끌어안고 계세요!”
“세리아나!”
“네, 그렇게 계속 이름을 부르십시오.”
다급히 뒤따른 조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세리아나의 안색을 살피는 치료사의 목소리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바이샤의 목소리가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세리아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채 검고 질척이는 바닥이 없는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