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89화 (89/110)

#89. 느리게 닿는 말 (1)

비명이 가득했던 라젠의 왕성에 밤이 찾아왔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한 세리아나는 어머니의 목걸이와 귀걸이가 든 작고 납작한 상자를 손끝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다른 이의 물건을 취한 이들은 벌을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귀걸이를 하고 있던 루미어스 왕녀는 두 귀가 잘렸고 목걸이를 하고 있던 왕비는…….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야.”

상자의 걸쇠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이어지는 생각들을 털어냈다.

기묘하리만치 마음이 고요했다.

어떤 원망이나 미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그것들이 존재하기는 했던 것일까?

미움은 좋아하는 마음에서 생긴다.

원망은 애정이 근원이며 포기는 간절함이 그 시작이었다.

“지금 나와는 아무것도 맞지 않아.”

라젠의 왕에게 질문하지 않고도 그 답을 얻었을 때 알았다.

저들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그들에 대한 모든 처분을 바이샤에게 맡길 수 있었다.

벌하는 것은 그의 역할이었으니까.

“라누아, 이대로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라젠의 왕과 귀족들요…….”

세리아나가 고요히 행동하자 도리어 주변의 사람들이 안달을 내기 시작했다.

그간 그녀가 고국에서 어떠한 일을 겪어왔는지 아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엘라이어가 어떻게 죽었는지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리아나가 어떤 식으로든 복수해야 한다 믿었기에 모든 것을 바이샤에게 맡긴 채 뒤로 물러선 그녀를 보며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쿠드라께 말씀을 올리면 라누아께 양보하실지도 몰라요.”

‘몰라요’가 아니라 그리할 것이다.

치아린은 세리아나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바이샤가 죄인들에 대한 처벌을 미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게 이상했다.

다른 이들의 목이 잘려나가고 사지가 으깨어질 때 가장 먼저 처벌해야 할 라젠의 왕은 그저 감옥에 갇힌 채 아무런 벌도 받고 있지 않았으니까.

“나는 어머니의 목숨값만 받을 수 있다면 충분해.”

“하지만 라누아…….”

“내게 의미 없는 자들에게 신경 쓸 시간에 내 전사들의 상처를 하나라도 더 돌보고 싶어. 안 될까?”

“됩니다. 안 될 리가요.”

조금 전까지 제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여 보려 애쓰던 치아린이 단호한 얼굴로 원하는 건 전부 하셔도 된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세리아나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지만 치아린은 자신에게 너무 약했다.

치아린의 주장에 따르면 좋아하는 만큼 약해지는 것이라고 하니 자신은 그녀의 그런 마음을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이다.

“뭐가 된다는 거지?”

“쿠드라, 오셨어요?”

자신의 일을 끝마친 바이샤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세리아나와 치아린의 담소가 끝이 났다.

세리아나는 익숙한 손길로 제 허리를 감싸 안는 바이샤의 품에 기대어 그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이 진정되는 소리……. 세리아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치아린이 또 이상한 소리를 했나?”

“그냥, 포로들의 처벌에 대해 말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온 말이 다 된다?”

“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일 텐데……. 당신의 종은 가끔 내 역할까지 빼앗으려 들어.”

세리아나는 나중에는 치아린이 제 남편 자리까지 빼앗으려 들지도 모른다며 투덜거리는 바이샤의 팔뚝을 살짝 도닥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이샤를 올려다보았다.

“대신 당신의 역할은 아니지만 당신이 꼭 해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는 걸요.”

“그게 뭐지?”

그의 물음에 세리아나는 입을 열어 대답하는 대신 슬쩍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 베일을 눈짓했다.

제 품에서 배운 것이 분명한 애교 가득한 그 모습에 바이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곳의 정원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제 눈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여인과 제 품 안의 이 여인이 같은 사람이라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기껍지만 놀라운 이 변화에 자신도 가끔 놀랄 정도인데 곁에서 지켜보지 못했던 이들이라면 같은 외모의 다른 이라 착각할 법도 했다.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머리 위에 검은 베일을 씌우고 그 끝자락을 정리한 후 베일 너머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오아시스에 도착하기 전까진 그녀의 라일꽃 향기만으로 참아야 했다.

“내일이라도 떠날까?”

뺨에 닿은 뜨거운 열기에 얼굴을 살짝 붉힌 세리아나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품에 안겨 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쉬움에 미적거리는 바이샤의 손을 가볍게 뿌리친 세리아나가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천막을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빨리 나오셨네요?”

“치아린, 놀리지 마.”

“세상에 라누아, 제가 어찌 그런 짓을 하겠어요.”

“……지금 엄청 즐거워 보이는 얼굴인 거 알고는 있는 거지?”

“제가 이렇게 거짓말을 못 해 큰일이랍니다.”

세리아나는 밤의 어둠과 검은 베일이 자신의 붉어진 얼굴을 가려주는 것에 감사하며 연신 웃는 얼굴로 저를 놀리는 치아린의 손을 잡아끌었다.

평소와는 입장이 바뀐 듯한 모습에 치아린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치아린과 함께 라큘의 나뭇가지를 들고 주둔지의 곳곳을 살핀 세리아나는 마지막으로 제단이 만들어질 장소에 이르렀다.

그곳은 라젠 왕성의 커다란 정원 한가운데였다.

자라난 풀과 나무, 꽃들은 전부 뽑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세리아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세요?”

“조금.”

“오늘은 이만하시는 게 어때요?”

“여기까지만 살피고. 기름을 먹인 나무는 충분해?”

“네, 땅을 다지는 작업을 끝내면 바로 쌓을 수 있게 준비해 두었어요.”

“그렇구나.”

세리아나가 앉을 자리를 찾아 주변을 살피자 그것을 읽은 치아린이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나무 의자 하나를 재빨리 가져와 내려놓았다.

“안색이 안 좋으세요.”

“괜찮아.”

“정말 치료사를 부르지 않으시려구요?”

“불러도 나중이야. 지금은 내 전사들이 헬라임의 품에 모두 안길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더 중요해.”

고집이었다.

몸은 피로하고 쉴 새 없이 잠이 쏟아졌지만 세리아나는 쉽게 몸을 쉬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의 곁에서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누구보다도 라누아다웠던 이로 기억에 남고 싶었다.

욕심이지만…… 어떠한가? 엘라이어는 자신의 딸에게 필요한 것이 욕심과 이기심이라고 말했었다.

죽은 어미의 가르침을 조금 따른다고 하여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리고 세리아나는 자신이 있었다.

어머니와 똑같은 최후를 맞이하지 않을 자신. 적어도 그녀는 지금 바이샤의 곁에 선 유일한 사람이었고 차이툰의 유일한 라누아였으니까.

“라누아!”

“……괜찮아 조금 현기증이 났을 뿐이야.”

어머니를 떠올렸기 때문일까? 순간 눈앞이 흐려지고 몸의 균형을 잃을 뻔했지만 빠르게 그녀를 부축한 치아린 덕분에 볼썽사납게 바닥에 구르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안 되겠어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세요. 의식은 어차피 내일인걸요. 정화의 의식도 대부분 끝마쳤고 나머지는 이 치아린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일인걸.”

“라누아를 안전히 모시는 건 제 일입니다. 부디 제가 제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라누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저를 올려다보며 간청하는 치아린의 모습에 세리아나는 자신의 고집을 살짝 꺾기로 했다.

치아린의 간절함도 있었지만 정말로 몸이 좋지 않았다.

라누아의 역할에 욕심을 더 내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질 않으니……. 세리아나는 오아시스로 돌아가면 체력부터 다시 길러야겠다 생각하며 치아린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그 순간 하늘이 핑 하고 돌았다.

바로 옆에 서 있을 치아린의 목소리가 마치 멀리서 메아리치듯 들려오고 땅이 제 눈앞으로 다가온다 느낀 순간 밤보다 어두운 시간이 그녀를 덮쳤다.

“라누아!”

까무룩 정신을 놓고 쓰러진 세리아나를 품에 안아 든 치아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불안 불안하던 차였다.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에 핏기마저 찾아보기 힘든 며칠을 보낸 참이었다.

어떻게든 세리아나를 쉬게 만들려 애를 썼지만 제 주인이 의욕을 내며 덤벼든 일을 막을 수 없어 발만 굴리던 중에 결국 사달이 난 것이다.

치아린은 세리아나의 검은 베일을 황급히 걷어 주인의 안색을 살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과 파리한 안색이 곧 제 주인이 죽을 것처럼 보여 치아린은 순간 빠듯하게 조여오는 심장의 통증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쥬드! 당장 치료사를 불러와!”

황급히 세리아나를 품에 안아 든 치아린이 그림자 속에 숨은 쥬드에게 명령을 내리고 바이샤가 머무는 천막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잠들어 있을 시간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로지 축 늘어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제 주인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치아린?”

“비켜요, 카얀! 라누아께서 쓰러지셨어요!”

바이샤의 천막 앞을 지키고 있던 카얀은 정신을 잃은 세리아나와 그녀를 안고 달려오는 치아린의 새파란 얼굴을 발견했다.

그 다급한 모습에 바이샤에게 이 일을 알려야겠다는 생각보다도 먼저 몸을 움직인 카얀이 천막의 입구를 막고 있는 덮개를 들어 올렸다.

“치료사는?”

“쥬드에게!”

“무슨 소란……!”

“비키세요, 쿠드라! 라누아께선 누우셔야 해요!”

얕은 잠에서 깨어난 바이샤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그를 침대에서 밀어버린 치아린이 조금 전까지 그가 누워 있던 자리에 세리아나를 눕혔다.

치아린의 기세에 밀려 침대 아래로 내려왔던 바이샤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절한 듯 잠들어 있는 세리아나의 모습을 확인하곤 안색을 굳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쓰러지셨어요!”

“뭣 때문에?”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아 말씀드리기 힘들어요. 쥬드를 보냈으니 곧 치료사가 올 거예요. 그때 자세히 물으세요.”

“치아린!”

“저도 이유를 몰라 미치기 일보 직전이니 좀 참아주세요!”

치아린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린 바이샤가 치아린을 뒤로 밀어내고 누워 있는 세리아나 곁에 다가갔다.

그 모습에 울컥한 모습으로 한마디를 더 붙이려던 치아린은 제 어깨를 누르며 고개를 젓는 카얀의 모습에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흥분을 가라앉혀.”

“알아요, 알지만…….”

“치아린.”

“제 눈앞에서 쓰러지셨어요…….”

“우리가 누구인지 잊지 마. 조금 전엔 당신이 과했어.”

“……알아요.”

자신이 섬기는 이가 세리아나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왕인 바이샤에게 그런 언행을 보여서는 안 됐다.

두 사람은 쿠드라와 라누아의 종인 동시에 왕과 여왕의 신하이기도 했으니까. 바이샤는 라누아의 종인 치아린을 벌할 수는 없지만 조금 전의 무례는 그가 문제로 삼으려 했다면 충분히 처벌할 수 있을 만큼 수위를 넘어선 행동이었다.

“죄송합니다, 쿠드라. 제가 너무 흥분해서 제 본분을 잠시 잊었습니다.”

“라누아의 일이었으니 용서하겠다.”

“감사합니다.”

세리아나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한 바이샤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이 천막을 나설 때 안색이 조금 나쁘기는 했지만 요 며칠간 그러했던 터라 이번에도 괜찮다 은연중에 그리 여겼던 것이 잘못이었다.

“쉬시라 붙잡아야 했다.”

“……붙잡혀 주지 않으셨을 겁니다.”

바이샤의 혼잣말에 카얀이 답했다.

세리아나의 변화는 급하게 다가왔지만 그것에 빠르게 적응한 이들이었다.

다른 이들의 의견을 존중만 해왔던 그들의 라누아는 이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의견을 꺾을 수 있는 이는 차이툰의 사막에 존재하지 않았다.

누가 감히 그들의 여왕이자 여신인 라누아에게 반박을 할 수 있겠는가? 유일하게 가능한 상대라고 한다면 바이샤가 유일했지만 그는 아내의 그런 모습에 기꺼워할 뿐 그 뜻을 꺾으려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치료사는?”

“여기 왔습니다, 쿠드라.”

때마침 들려온 목소리에 카얀이 서둘러 천막 입구의 덮개를 걷었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온 치료사는 예법에 맞춰 인사를 올리려 했지만 다급히 그를 잡아끄는 치아린의 손길에 예를 갖추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라누아의 그림자가 급히 찾아왔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결국 탈이 나셨군요.”

“잔소리는 나중에.”

“네, 살피겠습니다.”

손을 내저은 바이샤가 자리를 내어주자 치료사가 고개를 숙이고 정신을 잃은 세리아나 곁으로 다가갔다.

얼굴의 혈색을 살피고 호흡을 체크한 후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맥을 살피는 치료사의 얼굴이 무척 신중해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세리아나의 몸을 살피던 치료사가 그녀의 손목을 내려놓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진료하는 동안 혹시 일이 잘못될까 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던 치아린은 그런 그의 모습에 불길함을 느낀 듯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왜 말이 없지?”

“쿠드라.”

“많이 안 좋으신가?”

“아…… 그것이…….”

“내 명줄을 그런 식으로 줄일 생각이 아니라면 당장 말해.”

애가 탔는지 슬슬 협박으로 태세를 전환한 바이샤를 보며 치료사가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저를 무섭게 노려보는 치아린과 바이샤의 얼굴을 바라보다 슬쩍 세리아나에게로 시선을 돌린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건 라누아께서 깨시면 함께 들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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