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 너머의 연인-88화 (88/110)

#88. 전쟁 (9)

이제 안으로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를 받은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안내에 따라 라젠의 왕성 안으로 발을 디뎠다.

왕성의 내부 구조를 더 잘 아는 것은 그녀였지만 치아린의 에스코트를 거절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 검은색 옷을 걸친 말 못 하는 시녀들이 뒤따랐다.

장례식과 같은 행렬이었지만 이것을 지켜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 드나들었던 정문을 지나 알현실의 커다란 문 앞에 선 세리아나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꽉 닫힌 문틈 사이로 피비린내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세리아나는 자신이 쓴 베일이 흐트러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치아린의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

그녀의 신호에 맞춰 치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 두 명이 잰걸음으로 무리에서 빠져나와 알현실의 거대한 문을 밀기 시작했다.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사이로 좀 더 짙은 혈향이 흘러나오고 그 문이 완전히 열렸을 때 세리아나는 자신을 위해 펼쳐진 것처럼 보이는 붉은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평소 그녀가 걷던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전쟁터의 전사들만이 걸을 수 있는 붉은 길이었다.

“라누아.”

“쿠드라.”

그리고 그 붉은 길 한가운데 바이샤가 서 있었다.

그가 든 검 끝으로 핏물이 방울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세리아나는 급하게 뜯어 덮은 것이 분명한 커튼 아래 저 작고 둥근 무언가가 라젠 귀족 중 누구일 것이라 짐작하며 바이샤의 모습을 살폈다.

“제가 그쪽으로 가도 될까요?”

다행히 상처 하나 없는 그의 모습을 확인한 세리아나가 질문하자 곧 대답할 것처럼 입을 달싹인 바이샤가 멈칫하며 주변을 살폈다.

겁먹은 라젠의 인간들을 살핀 것은 아니다.

그의 두 눈에 그런 머저리들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아내의 발이 닿을 곳이 마땅치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제 귀한 여왕의 발끝에 어찌 피를 묻힌단 말인가? 그녀가 걸어야 할 붉은 길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바이샤가 제가 들고 있던 검을 카얀에게 건네고 긴 다리를 성큼 움직여 세리아나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무엇을 할 작정인지 알아차린 치아린이 재빨리 깨끗한 손수건 하나를 건넸다.

그것으로 손에 묻은 피를 가볍게 닦아낸 그가 세리아나의 무릎 뒤에 제 한쪽 팔을 밀어 넣고 그녀의 몸을 덥석 들어 올려 끌어안았다.

갑자기 높아진 시야에 당황한 세리아나가 다급히 몸의 균형을 잡았다.

그녀가 제 품 안에서 자리를 제대로 잡은 것을 확인한 바이샤가 난 지 얼마 안 된 붉은 길을 따라 왕좌로 걸어갔다.

알현실 안에 살아남은 라젠의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올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제 곁을 스쳐 가는 바이샤의 발끝만을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바이샤가 걸음을 멈춘 곳은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깨끗한 왕좌 앞이었다.

세리아나를 조심스럽게 내려 그 앞으로 에스코트한 바이샤가 왕좌를 눈짓했다.

앉으라는 신호였다.

세리아나는 그의 그런 배려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나의 라누아께서 지금부터 질문하실 테니 제대로 답하는 게 좋을 거다.”

세리아나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바이샤는 그 의자 옆에 털썩 주저앉아 그녀의 무릎 위에 목덜미를 걸치며 몸을 비스듬히 기대었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육식 동물이 제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과 닮아 있었다.

만약 제 주인에게 손톱만큼이라도 불경한 모습을 보이면 그자의 목을 물어뜯을 준비가 된 짐승이 라젠의 왕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요한 알현실 안에 세리아나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조금 전 구어슨 백작을 말 그대로 찢어 죽이며 사납게 웃던 이의 목소리와는 다른 온도를 가진 목소리에 라젠 국왕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리아나는 검은 베일을 머리 위에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베일은 얇디얇았기에 그 안의 하얗고 고운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 그래, 오랜만이구…… 흐억!”

라젠의 왕은 삽시간에 제 목덜미로 다가온 서슬이 퍼런 칼날에 비명을 삼켰다.

죽을 듯 노려보는 여인의 검은색 눈동자가 말을 제대로 하라 협박하고 있었다.

“오, 오랜만에 뵙…… 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제 사생아에게 말을 높이고 있었지만 라젠의 귀족 중 그 누구도 그것을 지적할 수 없었다.

그리했다간 구어슨 백작의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느낀 것이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지만……. 우선은 들어드리겠습니다. 제게 하고픈 말씀이 있을 테지요.”

바이샤는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지금부터 모든 것은 세리아나 뜻대로 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세리아나는 그런 그의 머리를 저도 모르게 쓰다듬으며 라젠의 왕을 바라보았다.

저와 닮은 보라색 머리카락이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나, 나는…….”

“혀부터 잘리고 싶다면 계속 그런 식으로 말하라.”

목에 겨눈 칼을 더욱 가깝게 들이밀며 치아린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라젠의 왕은 두려워졌다.

대체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 때라면 제게 길을 일러줬을 밀라니안 공작은 저 상자 안에 목이 잘린 채 담겨 있었고 라젠의 다음 왕이 될 왕세자는 아까부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야만인들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억울…… 합니다.”

“무엇이?”

“이 모든 일은 밀라니안 공작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아니, 것입니다!”

“쿠드라께 보낸 친서에 적인 것과는 다르네요. 모든 일은 제 어머니의 질투에서 시작됐다 전하시지 않았나요?”

“아니요! 아니다! 그것 역시 저자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 모든 것은 밀라니안 공작이 벌인 일이었다.

자신은 그저 신하의 말을 잘 들어주는 어진 왕이었을 뿐이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으니 항변할 수도 없다.

잘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라젠 왕의 말이 더욱 빨라졌다.

“세리아나, 내 딸아!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내가 네 어미를 얼마나 아꼈는지!”

이번에야말로 그 목을 잘라버리겠다는 듯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는 치아린을 세리아나가 만류했다.

그 모습에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얼굴을 환히 밝힌 라젠의 왕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어찌 엘라이어를 버리겠느냐! 전부 밀라니안 공작의 계략이었다! 네가 네 어미를 원망할 것이니 엘라이어를 죽여 너의 마음을 풀어주자 했다!”

“그 의견에 따르신 거로군요.”

“방법이 없었다, 방법이! 난 두려웠어! 만약 내가 그자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면……!”

개소리.

세리아나는 생각했다.

정말 창의적이지 못한 개소리라고. 치아린이 들었다면 라누아의 고귀한 입에 올릴 단어가 아니라 기겁했을 테지만 지금 저 말이 개소리라는 것에는 동의했을 것이다.

그는 왕이었다.

최소 라젠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결정을 내리는 자였고 그들의 명운을 움켜쥔 자였다.

그런데 저 무책임한 발언은 무엇이란 말인가? 밀라니안 공작이 무슨 말을 떠들었든 최종결정권자가 라젠의 왕인 이상 그 말에는 힘이 없다.

결정을 내린 것은 바로 그다.

거기다…….

“세리아나, 내 사랑하는 딸아. 믿어주렴! 나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어!”

자신이 언제부터 저자의 딸이었던가? 제 소중한 딸인 루미어스 왕녀를 내놓고 싶지 않아 불러들인 이였을 뿐이다.

만약 차이툰이 왕녀를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세리아나는 다이아몬드 광산에 팔려 늙은 후작의 침실에서 말라 죽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

“그래! 이 무능한 것들이 나를 제물로 삼으려 수를 쓴 거야!”

라젠의 왕이 말하는 ‘무능한 것들’이란 이 알현실 안에 모여 있는 귀족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세리아나는 연신 침을 튀기며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라젠의 왕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 나는 억울해! 억울하다! 딸아! 내 말을 믿어다오!”

단 한 순간도 저를 자식으로 여긴 적이 없었던 사내가 애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함은 세리아나의 발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제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라젠 왕의 목소리가 어지간히 거슬렸던지 잘생긴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세리아나는 손끝으로 바이샤의 미간을 살살 문질러 주름을 펴고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후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항상 궁금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려면 어미와 아비가 필요한데 왜 내겐 어미를 이르는 말만 있고 아비를 이르는 말이 없는지에 대해.”

“그, 그것은…….”

“그래서 이번 기회에 그 답을 찾아볼까 했어요.”

“세리아나, 내 딸아…….”

“하지만 묻지 않아도 알겠습니다.”

라젠의 왕은 검은 베일 너머 저를 바라보고 있는 연둣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머리는 더 매달리고 애원하라 외치고 있었지만 그의 본능이 지금 그녀의 심기를 거슬러선 안 된다 소리 지르고 있었다.

“내 아비를 이르는 말이 없었던 이유는 내겐 아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을 이르는 말은 없으니 그것이 맞겠죠.”

세리아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녀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바이샤가 그 뒤를 따르듯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끝났나?”

“더는 물을 것이 없어요. 확인할 것도요.”

“이후의 일은 어찌 처리하면 좋을까?”

“당신의 뜻대로 하세요, 쿠드라. 당신이 뜻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

라젠 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렇게 끝이 난다고? 저 야만인은 저를 난도질 쳐 죽일 것인데 어찌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그는 숙였던 고개를 빠짝 치켜들어 세리아나를 향해 발악하기 시작했다.

“어찌 네 뜻이 저 야만인의 뜻과 같단 말이냐! 세리아나! 너는 내 딸이고 이 라젠의 왕녀다! 정녕 네가 네 나라와 아비를 버리려는 것이냐!”

“누가 나의 아비라는 거지?”

“뭐, 뭣?”

“어디가 나의 나라라는 것이냐?”

하대하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라젠 왕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그녀를 손가락질하고 싶었으나 다시 제 목덜미 위에 드리워진 서슬 퍼런 칼날이 그의 입과 행동을 막았다.

“나는 아비를 가진 적도 나라를 가진 적도 없다. 그대는 나를 해하려 한 이들의 왕이고 내 어미를 죽인 자일 뿐.”

세리아나의 작은 목소리가 가진 거대한 울림이 알현실을 가득 채웠다.

기백에 눌린 이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으나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없었다.

세리아나는 그런 그들을 눈으로 훑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세리아나 쿤 라누아. 헬라임의 첫 번째 자식이며 사막의 여왕이다.”

사막의 전사들이 고개를 숙였고 그녀를 따라온 시녀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그들의 여왕에게 예를 갖추었다.

라젠의 왕족과 귀족들은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조차 내지 못한 채 숨소리를 죽이고 관대한 처분이 내려지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나를 딸이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분을 죽인 것은 그대들이다.”

세리아나는 싸늘히 식은 모습으로 재회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머니를 죽여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라 진심으로 믿은 자들이 몇이나 될까? 어머니의 죽음은 그저 그들의 시간 끌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것을 알아 더욱 비통했다.

“내가 당장 라젠의 왕, 그대의 목을 비틀라 명하지 않는 것은 내 어미가 사랑했던 이이기 때문이다.”

“여, 여왕이시여…….”

“그러나 내 자비는 그것으로 끝이다.”

자신이 직접 나서 죽이지 않을 뿐 결국 저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이는 방법을 정하는 것은 바이샤가 될 터였다.

세리아나는 그의 남편이 어떤 처분을 내리든 관심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완벽한 무관심.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복수인 셈이었다.

“사, 살려주세요! 나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애처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루미어스 왕녀였다.

이제껏 제 모습을 차이툰의 전사들이 발견이라도 할까 어미의 품 안에 숨어 몸을 떨고 있던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가련함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빚어놓는다면 저런 모습일까? 세리아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몸을 떠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라누아? 왜 그러지?”

검은 베일로 가려진 세리아나의 연둣빛 눈동자가 떨리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은 바이샤였다.

그는 세리아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저를 닮은 자매의 가련한 모습에 흔들리기라도 한 것일까? 혹 그러하다면 저 왕녀 하나쯤은 살려주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할 때쯤이었다.

“라젠의 왕비와 왕녀가 제 어머니의 물건을 가지고 있네요.”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린 바이샤는 몸을 흠칫 떨며 두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려 하는 라젠의 왕비와 왕녀의 모습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에 익숙한 것들을 발견했다.

대륙회의를 위해 이곳을 찾았을 때 세리아나를 통해 엘라이어에게 선물했던 귀걸이와 목걸이가 주인이 아닌 이들의 목과 귀에 걸려 있었다.

“주인이 내어줬을 리는 없으니…… 도둑질한 건가?”

차이툰의 법에 따르면 도둑질한 자는 훔친 물건의 가치에 따라 작게는 한쪽 손목을 자르고 크게는 양쪽 손목을 자른 후 검은 사막으로 추방한다.

그가 엘라이어에게 선물한 것은 차이툰 내에서도 귀하게 여기는 두크란으로 만든 것이었고 라누아의 생모에게 선물한 값진 것이었다.

그러니 벌을 내린다면 후자를 따라야 했다.

“검은 사막까지 끌고 가기엔 너무 멀군. 어떻게 하고 싶지?”

“어머니의 물건만 돌려받고 나머지는 당신의 뜻대로 해주세요.”

“당신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방법을 찾아보지.”

왕좌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바이샤의 품에 안겨 알현실을 가로지른 세리아나는 두 발이 땅에 닿고 등 뒤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세리아나는 닫힌 문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무시하며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직은 태양이 떠오른 낮, 그녀의 시간이 오려면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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