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전쟁 (8)
마지막 저지선이었던 수도의 외성이 무너지고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터번 후작이 있기는 했지만 이미 기세를 탄 강물과도 같은 차이툰의 전사들 앞에 그 저항은 의미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당사자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겠지만 터번 후작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마지막까지 검을 놓지 않았던 기백을 바이샤가 인정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일반 병사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죽였다.
작위를 가진 자들을 포로로 삼았던 다른 전장과 다르게 바이샤는 이번 전투에선 단 한 명의 예외인 터번 후작을 남겨두고 모조리 베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경고였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고이기도 했다.
라젠의 왕성은 뒤집어졌다.
내성의 주변을 꼼꼼히 감싸고 선 차이툰의 전사들은 왕성 내에 숨은 이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사막의 거친 전사들이 왕성 안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는 것뿐. 저들이 왕성 안으로 발을 디미는 순간 그들의 목숨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도망치려는 쥐새끼들이 있다고?”
“명하신 대로 모조리 목을 잘라 왕성 안쪽으로 던져두었습니다.”
라젠의 왕성을 바라보며 선 바이샤는 카얀의 보고에 미간을 살짝 구겼다.
그가 싸움을 즐기기는 하지만 품위 없는 짓은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평소의 태도를 포기하고 이처럼 거칠게 구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 정도면 저 머저리들의 머릿속에 박힌 야만인의 모습으로 충분하겠지.”
“충분하고도 남아 이제 라젠 왕성에 숨어 있는 이들은 더한 것을 상상하고 있을 겁니다.”
“그걸 노렸다고 하면 뭐라고 할 거지?”
“그저 평소완 다르게 번거로운 일을 하신다 여길 뿐입니다.”
무심하게 답하는 카얀의 모습에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지은 바이샤가 팔짱을 낀 채 돌아섰다.
세리아나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누적된 피로와 예상치 못한 충격으로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이다.
“이것으론 부족해.”
“어찌할까요?”
“숨 쉬는 매 순간이 지옥을 헤매는 것처럼 고통스러워지게 만들어줘야지.”
그의 아내는 악몽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더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야 계산이 맞을 것이다.
바이샤는 왕성에 숨은 이들이 더욱더 공포에 질리길 바랐다.
그래서 그들이 세리아나의 손짓 하나에 겁을 집어먹고 두려움에 몸을 떨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내 라누아께서 바라시기 전까지 저 문은 열려선 안 된다.”
“네.”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게 해.”
“명을 받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카얀을 뒤로하고 바이샤는 세리아나가 쉬고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자신의 빈 자리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전사들을 신뢰했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전사들은 그 믿음에 언제나 보답했으니까. 바이샤는 움직이는 길에 마주친 전사들의 인사에 하나하나 고개를 끄덕여 답해주며 천막 앞에 도착해 안쪽의 분위기를 살폈다.
“어떻지?”
“깨어 계십니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치아린의 작은 목소리에 바이샤가 망설이지 않고 천막의 입구를 가린 덮개를 걷었다.
그리고 곧장 간이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는 세리아나 곁으로 다가간 그가 그녀의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식사는?”
“했어요.”
“안색이 돌아오질 않는군.”
“많이 좋아졌어요.”
세리아나의 허리를 감싸 안아 제 몸쪽으로 당기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바이샤가 치아린을 눈짓했다.
평소보다 체온이 높은 세리아나의 몸 상태를 알아차리곤 그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치아린은 작게 고개를 저어 아직 치료사가 그녀를 살피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치료사가 오지 않았나?”
“돌려보냈어요.”
“왜?”
“저보단 다친 전사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게 더 급하니까요. 조금 피곤한 정도로 호들갑을 떨고 싶진 않아요.”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그런 대답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화가 들끓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복잡한 기분은 어떻게 해결을 보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전사들의 상처 치료를 우선하는 세리아나의 태도는 ‘라누아로서’ 아주 훌륭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픈 몸을 돌보지 않는 ‘그의 아내’의 태도에는 절대로 동조해줄 수가 없었다.
“당신의 몸도 중요해.”
“라젠의 여름은 차이툰보다 아주 많이 습해요. 작은 생채기라도 확실하게 소독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덧나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저는 정말 괜찮아요. 푹 자고 일어났더니 개운한걸요. 버티기 어려우면 제가 먼저 치료사를 부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날이 갈수록 고집이 세지시니 내가 이길 수가 없군.”
“제 말을 따라주시는 것에 늘 감사하고 있어요.”
제 품에 안긴 채로 가슴에 얼굴을 기대며 살포시 미소 짓는 아내의 모습에 바이샤는 기꺼이 두 손을 들어 올려 항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제 마음을 흔들려 일부러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면 아주 조금, 정말로 아주 조금은 경계라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의도 하나 없이 오아시스에서 지내는 동안 몸에 익은 대로 움직일 뿐인 그녀의 모습에 무슨 저항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신과 함께 지내며 저절로 익힌 것이다.
이기는 방법 같은 건 없었다.
“……마음대로 해. 하지만 조금이라도 몸이 안 좋다 느껴지면 바로 치료사를 불러.”
“그럴게요.”
“왜 못 미더운 느낌이 드는 것인지 모르겠군.”
“그것보다도…… 다 끝난 건가요?”
의도적으로 말을 돌리는 세리아나의 모습에 혀를 짧게 찬 바이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신의 결정만 남았노라 말을 전했다.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아주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그때 움직였으면 해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
“아니요, 그저 라젠의 왕이 제 물음에 답했을 때의 얼굴을 선명하게 보고 싶을 뿐이에요.”
“당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대신 내가 먼저 움직인 이후에 당신이 움직여 줬으면 하는데…….”
“이유를 여쭤봐도 되나요?”
“그냥 좀…… 당신에겐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라.”
“전 괜찮은데…….”
“내가 보이고 싶지 않아.”
“네, 그럼 천천히 뒤따를게요.”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품을 파고들며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몸은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지만 정신은 날을 벼린 칼 위에 선 사람처럼 명료했다.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나 역시도.”
치아린은 서로를 끌어안고서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하는 왕과 여왕을 뒤로하고 천막을 빠져나왔다.
밤은 제 주인의 시간이었으나 오늘의 휴식을 두고 헬라임이 그 나태함에 벌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조용히 물러간 치아린이 제 주인을 대신해 일하는 동안 날이 밝아왔다.
서로에게 기댄 채 밤을 지새운 바이샤와 세리아나는 해가 둥근 머리를 빼꼼히 드러낸 순간 천막에서 빠져나와 주변을 살폈다.
전사들은 모두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세리아나 머리 위에 드리워진 베일을 정돈해 준 바이샤가 그 베일을 사이에 두고 그녀에게 입을 맞춘 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대화는 없었다.
그저 카얀이 치아린을 통해 ‘신호’를 보내겠다 일러왔을 뿐이다.
내성의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바이샤의 모습을 지켜보던 세리아나가 몸을 돌렸다.
더 이상의 싸움은 없다.
남은 것은 일방적인 학살이 될 터였다.
“기름을 먹인 나무는 충분해?”
“네, 충분합니다.”
“오늘 밤 달이 떠오르면 영혼들을 이끌 거야.”
“선언이 있은 이후에요?”
“응.”
전쟁의 시작을 선언했듯 전쟁의 종식 또한 바이샤의 입을 통해 선언될 것이다.
적들이 뿌린 피로 만들어낸 붉은 길 위를 걸었던 전사들은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고, 적들은 굴복하는 법을 영혼에 새기게 될 터였다.
“전사들을 돌볼 시녀들을 남기고 나머지는 나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준비해줘.”
“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세리아나는 그간 마음에 품어왔던 의문을 해결하게 될 것이다.
차마 물어볼 용기조차 가질 수 없었던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은 후 자신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이미 자신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세리아나는 부디 라젠의 왕이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며 라큘의 나뭇가지를 손에 쥐었다.
커다란 정문을 지나 라젠 왕성의 알현실에 도착한 바이샤는 저보다 앞서 움직인 카얀이 모아놓은 이들의 얼굴을 훑으며 왕좌로 향했다.
낮은 계단 서너 개를 올라 왕좌 앞에 선 바이샤가 몸을 돌리자 머리를 조아린 채 꿇어앉아 있는 라젠의 왕족들과 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아 있는 쥐새끼들이 생각보다 많군.”
차이툰의 전사들이 왕성을 에워쌀 때 도주하려 했던 몇몇 이들의 목을 처참히 잘라 전시한 이후 또 다른 도망의 시도는 없었다.
비겁한 겁쟁이들의 소굴. 바이샤는 이 안에 남은 이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이, 이게 무, 무슨 짓이, 이냐!”
“라젠의 왕이 언제부터 말더듬이였는지 모르겠군.”
위엄을 차려보려 노력한 꼴은 가상했지만 무릎을 꿇고 앉아 외치는 목소리엔 왕의 위엄 대신 겁쟁이의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대답하는 대신 큰 목소리로 혼잣말을 한 바이샤가 비어 있는 왕좌에 털썩 주저앉아 라젠 왕족들의 얼굴을 살폈다.
“빨리 치워버렸으면 좋겠군.”
“라누아께서 원하신 것이 있습니다.”
“설마 내가 내 라누아께서 청하신 걸 잊었을까?”
“조금만 참으시죠.”
그의 마음을 달래려는 것이 분명한 카얀의 목소리를 들으며 짧게 혀를 찬 바이샤의 눈이 라젠의 왕을 스쳐 구어슨 백작에게 향했다.
그의 여왕께서 용무가 남아 있는 쪽은 라젠의 왕뿐이었으니 저놈 정도는 제 입맛대로 처리해도 괜찮을 것이다.
“아, 그 전에 라젠의 왕 그대에게 선물이 있지.”
“무, 무슨……?”
“카얀.”
“네, 여기 있습니다.”
바이샤의 부름에 카얀이 나무 상자 하나를 가지고 와 라젠의 왕 앞에 내려놓았다.
아래 모서리 부분이 짙게 물든 상자가 바닥에 놓이자 진득한 핏물이 새어 나와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직접 열어보지.”
“무, 무례…… 무례한……!”
“상자를 여는 데 필요한 것은 손뿐인데 그것을 못하겠다 하면…… 쓸모없는 그 손목 지금 잘라줘도 불만은 없겠지?”
“히익!”
살기로 번들거리는 호박색 눈동자와 겁을 잔뜩 집어먹은 푸른색 눈동자가 부딪혔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기에 결말은 뻔했다.
바이샤의 눈빛에 질린 라젠 왕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었다.
애잔함마저 느껴질 만큼 겁을 먹은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그 모습에 바이샤가 입꼬리를 잡아당겨 웃으며 명령했다.
“열어.”
오줌을 지린 것은 아니겠지? 그런 의심이 들 만큼 몸을 심하게 떠는 라젠의 왕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단순히 위로 올리기만 하면 되는 상자의 뚜껑을 열지 못해 몇 번씩 헛손질하는 그를 바이샤는 인내심 넘치게 참아주고 있었다.
“우엑!”
마침내 상자를 연 라젠의 왕이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을 보며 구역질을 했다.
두려움에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인지 노란 위액을 연신 게워내는 그의 모습에 바이샤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 허약해 빠진 놈이 왕이라니…….
“왜 그런 반응이지? 자신이 섬기는 왕을 배신하고 제 입으로 야만족이라 불렀던 내게 투항하려던 자를 붙잡아다 주었는데?”
라젠의 왕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귀족들은 알아차렸다.
저 안에 담긴 것은 이 자리에 없는 밀라니안 공작이겠구나……. 상자는 그의 비대한 몸을 담을 만큼 크질 않으니 분명 저 안에 담긴 것은 그의 목이겠구나 하고.
“왕을 배반하고 나라를 등진 배반자의 몰골로 알맞을 테지.”
“형체는 남겨두셨으니 유하신 처벌이셨습니다.”
바이샤와 카얀의 대화를 들으며 간신히 구역질을 멈춘 라젠의 왕은 상자 쪽으론 눈을 돌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무릎으로 기어 그것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러다 제 뒤에 있던 루미어스 왕녀와 몸이 부딪혔지만 지금은 제 사랑스러운 딸의 작은 비명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칼슨 데이어 B. 다르미안.”
“네, 네.”
“나는 딱히 네게 궁금한 것이 없어. 하지만 내 라누아께서 물어볼 것이 있다 하시어 지금 이렇게 너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이야.”
“네, 네. 가, 감사…… 감사합, 니다.”
“그러니 내 라누아께서 하시는 질문에 제대로 답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도 잘 모르겠으니.”
“아, 알겠, 알겠습니다! 네, 네!”
“시시하군.”
자신이 토한 위액이 만들어낸 웅덩이에 이마가 닿을 듯 고개를 조아리는 그의 모습이 역겨워 바이샤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카얀이 가까이 다가와 질문했다.
“라누아를 모실까요?”
“아니, 그 전에 처리해야 할 것이 하나 더 남았다.”
“네.”
바이샤의 시선이 구어슨 백작에게 가 닿았다.
연신 눈알을 굴리며 살아날 길을 모색하던 그는 바이샤의 호박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것을 알아차리곤 몸을 크게 흠칫 떨었다.
죽는다.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그의 예감이 비명을 질렀지만 얼어붙은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질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바이샤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진해졌다.
그것은 그동안 노려왔던 먹잇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의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