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전쟁 (7)
바이샤의 품에서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내다 기절하듯 잠에 빠졌던 세리아나가 눈을 뜬 시간은 해가 다 저물고 달이 떠오른 시각이었다.
눈물을 너무 많이 쏟은 탓인지 뻑뻑해진 두 눈을 비비며 간신히 눈을 뜬 세리아나는 허전한 감각을 느끼며 누웠던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라누아, 일어나셨어요?”
“바이샤…… 아니, 쿠드라께선?”
“일단 물부터 한 모금 삼키세요. 목이 많이 상하셨어요.”
치아린이 건넨 물을 한 모금 삼킨 세리아나가 천막 안을 살폈다.
어미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라서 그런 것인지 잠들기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바이샤가 보이지 않는 것이 불안했다.
“쿠드라께선 전장을 정리 중이세요.”
“……정리?”
“네.”
잠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세리아나는 치아린이 말한 ‘정리’라는 말의 뜻을 뒤늦게 알아차리곤 간이침대 위에서 발을 내려앉았다.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어?”
“오래요. 그래도 하루는 넘기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배가 고프진 않으세요? 간단하게 드실 걸 챙겨올까요?”
“그보다도 쿠드라를 뵙고 싶어.”
입을 달싹이며 세리아나를 말릴 말을 고르던 치아린이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아나의 고집 가득한 눈빛에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평소 그녀의 부드러운 눈빛에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이 세리아나와 함께한 이후 처음 보는 저 단호한 눈빛을 어떻게 이기겠는가?
“모시겠습니다. 제게 기대세요, 라누아.”
“부탁할게.”
세리아나는 치아린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들기 직전까지 온몸을 떨며 눈물을 쏟은 탓인지 힘이 빠져 한 걸음 발을 움직이기가 힘에 부쳤다.
치아린에게 몸을 기댄 채 천막을 빠져나온 세리아나는 주변을 환히 밝힌 횃불들과 그 아래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자신의 시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잠든 사이 치른 전투가 격렬했던지 여기저기 상처를 돌보고 있는 전사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저기 한쪽에 모이고 있는 이들은 죽은 이들일 것이다.
깨끗한 물로 피를 씻어내고 상처를 ‘치료’한 그들은 조만간 세리아나의 인도 아래 헬라임의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다.
“모두…… 끝난 거야?”
“네.”
“그럼…….”
어머니는 어디에 계셔? 세리아나는 턱 끝에 걸려 나오지 않는 그 한마디를 삼키며 눈으로 바이샤를 찾았다.
지금 당장 그를 만나야 했다.
그녀의 불안을 빠르게 읽어낸 치아린이 세리아나의 몸을 두 팔로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이렇게 움직이시는 게 빨라요.”
자연스럽게 치아린의 목에 두 팔을 두른 세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부끄러워했을 그녀가 눈빛으로 재촉하는 것을 느끼며 치아린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치아린의 품에 안겨 걷는 주변의 풍경은 앞서 지나쳐 온 장소들처럼 무너지고 불타 제 형태를 잃어버린 폐허였다.
세리아나는 자신이 잠든 사이 이 땅 위에 얼마나 많은 피와 비명이 뿌려졌을지 생각하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제 일을 하면서도 가깝게 느낄 수 없던 죽음이 지금만큼은 그녀의 피부에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쿠드라.”
“벌써 일어나신 건가?”
반쯤 허물어진 성벽과 부서진 성문을 지나 외성의 안쪽으로 들어온 세리아나는 광장의 한가운데, 흔적만 남은 동상 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바이샤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치아린에게 안겨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리아나를 발견하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해 주었다.
“다치신 곳은요?”
“있을 리가 없지.”
“뺨에 상처가 난걸요…….”
“……모르는 척 해주셔도 좋을 뻔했어.”
치아린의 품에서 내려와 바이샤 앞에 선 세리아나는 그의 뺨에 난 작은 생채기를 손끝으로 훑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실금 같은 상처였지만 세리아나의 눈에는 크게만 보이는 것이 한동안 이 상처의 잔상이 그녀의 마음에 남을 듯했다.
바이샤는 제 뺨을 떠날 줄 모르는 세리아나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아 내리며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여전히 안색이 좋지 못한 아내에게 걱정을 더해준 것이 미안한지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아주 살짝 어둠이 내려앉았다.
“조금 더 쉬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아뇨. 달이 떠오른 걸요.”
“하루 정도는 게으름을 피워도 돼.”
“…….”
입을 꾹 다문 세리아나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바이샤를 고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제 남편이 일부러 말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런 모습에 결국 시선을 돌려버린 바이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카얀을 눈짓했다.
눈으로 던진 질문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답한 카얀이 치아린 곁으로 가 섰다.
“보고 싶은가?”
“……네.”
“난…… 당신이 보지 않았으면 하는데…….”
“보게 해주세요.”
“……안내하지.”
바이샤가 세리아나 앞에서 말꼬리를 흐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리아나는 단호했다.
그는 치아린이 그랬던 것처럼 세리아나를 두 팔로 안아 들고 엘라이어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라젠의 신이 머무는 신전이었다.
광장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움직였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높은 건물은 다른 곳들에 비해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는데 그곳에 엘라이어의 시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이샤가 특별히 신경을 쓴 덕분이었다.
한때는 매일같이 이름을 울부짖었던 옛 신이 머무는 자리에 도착한 세리아나는 신의 성화(聖畫)가 그려진 벽을 외면하며 눈으로 어머니의 모습을 찾았다.
“……내려주세요.”
엘라이어는 신전의 한가운데 마련된 제단 위에 누워 있었다.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품에서 내려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줘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바이샤의 협박이 먹혀든 것인지 거친 자루에 담기고 성벽에 매달리기까지 했었던 그녀의 외형은 제법 깨끗한 상태로 정돈되어 있었다.
후일 그녀를 보기 위해 찾아올 이들을 배려해 누군가 교살(絞殺) 자국이 남은 목 위에 둘러 묶어놓은 하얀색의 스카프가 평소 화려함을 즐겼던 엘라이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머니…….”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수척한 얼굴은 아름다웠다.
어머니와 이리 조용히 마주해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머니…….”
라젠의 천막 안에서 보았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딱 하루만 슬퍼하라 말씀하셨죠.”
평소와 다르게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었다.
구질구질하게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우울하게 보내지 말라고.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구차해질 뿐이니 딱 하루만 슬퍼하라고 그렇게 말했었다.
“아주…… 아주 나중이라고…… 하셨잖아요…….”
먼 미래의 일이라 믿었다.
그래서 붙잡지 않았다.
그저 자신은 행복하니 걱정하지 말라 그렇게 마지막 대화를 끝내버렸다.
사랑은 몰라도 진심으로 미워했던 적은 없었다 말하던 어머니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신은 어땠을까? 밉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늘 자신을 탓하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신을 흔들던 어머니였다.
미움이 어찌 쌓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사랑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사랑했다.
그래서 늘 어머니의 사랑에 목말라 했다.
어머니의 가혹한 처분을 따르고 맥락 없는 화를 감당하며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분 곁에 있고 싶은 욕심뿐이라 하셨으면서…….”
눈물이 다시 차오르고 목소리가 떨려왔다.
세리아나는 무거운 추를 단 듯 움직이지 않는 손을 힘겹게 들어 올려 싸늘하게 식은 어미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자랑하던 금발이 헝클어져 그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머니의 사랑은 왜 이렇게 어머니 자신에게 가혹한 거죠?”
사랑하는 사람 곁에 제대로 서고 싶다는 바람을 이루기 위해 천박한 엘라이어라 불리며 손가락질 받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 끝이 이거다.
세리아나는 더는 버티고 서 있을 힘이 없어 무너지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소리 없이 흐른 눈물이 바닥을 적실 뿐이었다.
“세리아나.”
재빨리 다가온 바이샤가 무너지는 세리아나의 몸을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이 작고 가느다란 몸 안에 이리 많은 눈물을 어디에 숨겨두고 있었는지……. 그는 쉴새 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며 엘라이어를 바라보았다.
대륙회의 때 라젠의 왕을 찾아 아무도 모르게 궁으로 숨어든 그녀를 아주 먼 발치에서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화려하기만 한 겉모습을 보며 세리아나와 닮은 부분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화장기 없는 얼굴로 고요히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니 세리아나와 닮은 부분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늦었지만 그대의 어머니도 오아시스의 궁으로 모셔 갈 거야.”
바이샤의 말에 세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먼저 부탁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응답한 적 없고 무시로 일관했던 신에게 어머니의 영혼을 맡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신은 믿지 않는다고. 그러니 이제 와 믿지도 않는 신의 품에 안기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것이다.
“전사들과 함께 헬라임의 품으로 저분의 영혼을 이끌어.”
“……받아 주실까요?”
“가장 아끼는 첫 번째 자식을 이 세상에 낳아준 이를 헬라임께서 외면하실 리 없어.”
울음이 남은 목소리로 묻는 세리아나에게 확신을 담아 대답해준 바이샤가 뒤로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카얀과 치아린이 하얀 천을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으로 엘라이어의 시신을 감싼 두 사람이 물러서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이 들어와 그녀의 시체를 조심스럽게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세리아나는 바이샤의 품에 안겨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젠의 왕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명심하지.”
자신의 질문에 그가 답할 때까지 죽이지 말아 달라는 세리아나의 말에 바이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제 손에 찢겨 죽을 것이다.
그런 실수는 없겠지만 혹여 온전한 부분을 남기더라도 상관없다.
그 부분은 치아린의 몫으로 넘겨주면 되니까.
바이샤는 세리아나의 한마디 덕분에 명줄이 아주 조금 더 길어진 라젠의 왕을 떠올리다 그의 곁에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밀라니안 공작을 생각했다.
그의 여왕께선 그 돼지 새끼에겐 질문할 것이 없는 것 같으시니 그자는 먼저 처리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전투가 끝날 때쯤 날아온 쟈캄의 매가 물어다 준 소식엔 엘라이어의 목을 비튼다는 생각을 해낸 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바이샤는 그가 단언했듯 그 생각을 떠올리고 실행에 옮긴 자를 찢어 죽일 예정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자가 먼저 이쪽에 연락을 취해 왔다.
‘은밀히 만나 전할 말이 있다고 했던가?’
혹여 어디로 달아날까 쟈캄에게 감시하라 일러두었는데 저쪽에서 오히려 먼저 만나고 싶다 연락해 오니 기꺼이 만나줄 참이었다.
그리고 무슨 개소리로 짖어 대기 전에 그 혀부터 잘라내고 최대한 천천히 찢어 죽일 생각이었다.
‘세리아나가 원하는 답을 얻고 나면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오아시스로 돌아가야겠어.’
전쟁이 끝나면 정복지에 머무르며 그들을 제 사람으로 흡수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리할 생각이 없는 바이샤였다.
후덥지근하고 끈적거리는 공기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긴 세리아나에게 악몽과도 같은 땅이다.
그는 악몽이 자리한 이 땅에 그의 아내를 오래 남겨두고픈 생각이 없었다.
‘히아신과 타람을 남겨두고 돌아가야겠군.’
성격이 극과 극인 라옴의 족장과 바라의 족장이 들었다면 불경스럽게도 자신들의 왕을 향해 소리라도 질렀을 법한 결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린 바이샤가 세리아나의 몸을 끌어안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오늘은 쉬어. 오늘이라면 헬라임도 용서하실 거야.”
“네…….”
엘라이어를 보러 오기 전 했던 게으름을 피워도 좋다는 그의 말은 세리아나의 짐작처럼 말을 돌리려는 시도이기도 했지만 바이샤의 본심이기도 했다.
환자처럼 파리해진 안색의 세리아나를 오늘 밤 움직이도록 내버려 뒀다간 정말로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물론 한 침대에 누울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안정을 위해 게으름을 피우라 말한 것인데 한 침대 위에 누웠다간 더 피곤하게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자신의 아내에 한해서만큼은 인내심을 절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바이샤였다.
“오늘 밤엔 내가 움직이지.”
“하지만…….”
“당신이 오기 전엔 늘 혼자 해왔던 일이야. 어려울 것도 없어.”
“미안해요.”
“푹 자고 일어나면 당신이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두지.”
“네.”
바이샤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세리아나는 순순히 대답하며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어느 때보다도 가깝게 들려오는 그의 심장 뛰는 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세리아나를 도닥여주고 있었다.